우리의 이야기가 휘발되지 않도록, 청년예술 다시 쓰기
권수빈(문화연구자/ksubinn@hanmail.net)
5회의 청년예술 아카이브 리뷰가 끝났다. 청년예술 담론을 모아 아이브를 만들겠다는 기획은 미흡하고 설익은 채로 남았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며 6개월간의 리뷰를 갈무리하고자 한다. 아카이브 리뷰를 마친 나의 소감을 적었고, 서울청년예술인회의 웹진 ‘숨은 참조’에 실린 여러 필진의 글을 마지막 읽기 대상으로 삼았다.
벗어날 수 없는 어떤 재현과 정형화의 시선들
김치를 나눠줄까. 청년예술가에 대한 글을 여는 시작으로 대체 무슨 말이냐고 하겠지만, 이 말은 내가 2년 전 청년예술가와의 인터뷰에서 들은 것이다. “예술가여서 어떻게 하냐. 김치를 좀 나눠줄까.”라는 말로 단숨에 예술가를 가난한 사람으로 만드는 주변 인식은 청년예술가가 실제 경험하는 세상이었다. 내 생각에, 이 말만큼 예술가를 향한 반사적인 시선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게 있을까 싶다. 내가 만난 청년예술가는 힘들게 배곯아서 자기를 깎아가며 작업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 가난한 사람이라는 주변 인식이 ‘실제 그러한가의 여부’와 관계없이 자신을 쫓아다니며 괴롭힌다고 여겼다. 또 다른 청년예술가는 새해면 가족들이 “예술 활동을 그만두고 공무원 준비를 하는 것은 어떠냐.”고 요구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는 예술가의 삶이라는 것이 ‘불안정’하기에 ‘안정’으로 이행하라는 충고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충고가 내 가족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충고들은 청년예술가를 향해 정책과 연구, 그리고 사회가 요구해온 것이기도 하다. 내가 청년예술에 관한 학술 연구와 사회 담론이 청년예술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고 어떤 청년예술정책이 만들어져왔는지 살펴본 지난 6개월은 이를 재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청년예술에 대한 말들을 모아 아카이브를 만들어보겠다고 기획한 이유는 청년예술에 관한 담론을 축적하고 생산하기 위함이었다. 담론 주체가 누구이든 청년예술에 대한 발화가 어떤 목적과 쟁점, 내용을 담고 있는지 파악하려 했다. 이 작업으로 청년예술에 관한 플랫폼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내가 가장 많이 확인한 것은 제도, 정책, 학술, 담론이 어떻게 청년예술가를 특정 대상으로 상정하고 재구성하는지였다. 청년예술가에 대한 어떤 재현들, 특히 궁핍과 가난이라는 이미지는 일정 부분 여전히, 어쩌면 아주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듯 보였다. 적지 않은 문화정책 연구자들과 현장의 예술가들이 청년예술의 함의가 극심한 빈곤으로 죽음을 택하거나 물리적으로 어린 나이임을 강조하는 것에 있지 않음을 강조해왔음에도 말이다(성연주, 2020).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출구 없는 이미지로도 보였다. 2017년 이후 본격적으로 구성되기 시작한 청년예술이라는 영역은 넘쳐흘러 정리할 수 없는 정책들과 방만한 논의들 속에 놓였지만, 역으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그야말로 빈곤한 것이기도 했다.
지난 아카이브 리뷰를 예로 들면, 학술 연구에서는 “어떻게 청년예술가가 예술 활동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까?”가 주된 내용이었다. 예술 활동의 안정성은 청년예술에 대한 논의에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지만, 내가 짚고자 하는 점은 이를 다루는 연구자들의 태도가 청년예술가에 대한 특정 이미지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청년예술가들이 경험하는 위기를 면밀하게 살피고 지원사업의 한계를 낱낱이 톺아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연구들이 청년예술의 문제를 경제적 차원으로만 환원하여 대안으로 제시되는 정책이 일자리 정책으로만 수렴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정책도 마찬가지다. 실제 지원정책 사례를 검토했을 때도 반복적으로 청년예술에 대한 특정 재현들이 전제되었다. 국가 문화정책기관에서 청년예술가를 기표로 갖는 정책은 다양하지 않았다. 오히려 청춘마이크사업과 같은 지원정책처럼 청년예술에 대한 고착화된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어 청년예술정책에 대한 다양하고 튼튼한 토대를 마련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광역, 기초 단위 문화재단으로 이동할수록 청년예술정책은 이해관계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과잉되는 양상을 보였다. 청년예술을 지역사회에 가용될 자원으로서 이해하며 지역과 예술가 사이의 상호연결보다는 도구적 활용을 기대하는 흐름도 있었다.
청년예술정책의 영역이 열어젖혀지면서 동시에 생겨난 포럼, 토론회, 회의 등에서 청년예술가 당사자들은 이 한계를 지적하고 담론의 재모색을 시도해왔다. 청년예술정책을 지배하는 언어를 대체하는 새로운 비평언어, 당사자 참여 기반의 협의 구조 마련을 고민했다. 하지만 예술가들이 이렇게 청년예술정책에 대한 요구와 지향, 협의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과 달리 청년예술을 정의하고 적용하려는 주체들이 청년예술을 호명하며 불러낸 이미지는 앞서 말한 것처럼 매우 단편적이다. 나는 지난 리뷰에서 청년예술이라는 단어의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생계 곤란 등의 일종의 고착화된 조어들이 반복적으로 재생산해온 과거와 단절할 필요가 있음을 말했다. 기회를 갖지 못하거나 설 자리를 잃은 채 주저앉은 것도, 도전과 진취와 실험이라는 단어를 대표하면서 새로운 예술성을 담보해야 하는 것도 아닌 청년예술을 새롭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서다.
이것은 재현을 거짓이라 보며 재현으로부터 사실을 구분하고 청년예술가들이 직면한 현실의 본질이나 진실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청년예술의 구조적 문제들을 파악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찾는 일에 덧붙이고 싶은 것은 문제 해결의 과정에서 간과되어서는 안 될 재현의 문제다. 재현은 독립적이거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을 단순하게 상징적 형태를 통해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재현이 대신하고자 하는 바로 그것에 대한 의미로 구성된다(Barker, 2004/2009: 267). 그런 점에서 재현은 대상에 대한 타자화, 대상화, 동형화, 정형화 등에 복무하며 어떤 대상을 ‘실제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여부와 별개로 특정한 대상으로 만드는데 기능한다. 특정한 이미지를 만들어 대상에 부과하고 그것을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으로 고착화한다. 그래서 재현은 특정 이미지나 상징의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그것으로 만드는’ 행위이며 과정적이다. 또한 외부에 의해 호명되거나 부과된 것이 아닌 대상이 원래 갖는 특질로 만든다는 점에서 재현은 매우 정치적이다.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실은 어떤 것도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 재현의 과정을 통해 일어난다.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88만원세대, N포세대 같은 유행어들이 실제 청년의 것과는 거리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쉽다. 재현의 과정은 청년세대 담론에 대한 언론, 학술, 정책 등의 다종의 작업에서 드러나왔고 청년예술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재현의 문제를 고려하는 일은 수치화나 그를 통한 객관화 과정을 통해 청년예술이 처한 구조적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려는 일과 함께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즉 청년예술을 말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는 오경미(2020), 정진세(2020)가 지적한 청년예술가들의 경제적 위기와 자립의 불가능성, 이를 초래하거나 해결하지 못하는 일회성 지원사업과 그 불분명함에 대한 비판과 함께 수행되어야 할 일이다. 나는 그랬을 때 청년예술이 갖는 모호함과 그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청년예술을 가늠하고 설명하려는 시도를 다시 논의할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논의를 바탕으로 한 청년예술이라는 영역에 대한 재정의는 도달해야 할 종착점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청년예술이라는 영역의 곤란함
그런데 안타깝게도 청년예술이라는 영역을 재정의하는 일은 녹록지 않다. 내가 청년세대와 지역(지방) 청년 담론에 관심을 두고 있는 연구자다 보니 청년세대를 교차하는 여러 담론과 실천을 가까이 접할 때가 많았다. 아카이브 리뷰를 통해 청년예술 가까이 보기를 시도하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청년예술’이 ‘청년’과 다르다는 점이었다. 물론 젠더, 섹슈얼리티, 장애, 지역과 같이 어떤 세부 지점을 교차하느냐에 따라 그 결이 달라지는 게 당연하겠지만 ‘청년’에 ‘예술’이라는 말이 합해져 만들어내는 지점들은 독특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느낄수록 내게 ‘청년예술’이란 흥미로웠고 궁금했고 또 곤란한 것이었다.
내가 연구에 가깝게 위치한 사람이다 보니, 무엇보다 학술적 논의에서 청년예술을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컸다. 그렇지만 청년예술 담론을 축적하려는 시작점에서 검토할 수 있는 연구물은 많지 않았고 학술적 논의를 모아 아카이브를 만드는 작업은 특히 어려웠다. 신진예술가에 대한 논의는 꽤 있는 편이었지만, 이를 소급해서 적용하기에 신진예술과 청년예술의 결은 다르게 느껴졌다. 청년예술은 분명 청년세대 담론과 정책이 쏟아지는 과정에서 새롭게 구축된 영역이었고, 신진이면서도 신진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묶어 부르는 집단 같았기에, 여러모로 이전의 신진예술가와는 다른 맥락에 놓인 듯 보였다. 그런 중에 찾을 수 있었던 몇몇 청년예술에 관한 학술적 논의들은 특정한 구조를 공유하는 듯 보여 아쉬웠다. 예술 활동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자립의 위기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청년예술정책 지원의 다양화라는 대안들, 예술의 사회적 참여라는 정당성과 당위성의 주장까지 연구들은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청년예술이 청년과 예술을 다루는 논의 양쪽에서 깊이 있게 주목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펴본 지원사업의 수나 종류만 보아도, 청년예술은 정책 용어로 등장한 시점부터 줄곧 주목과 관심의 대상이었던 듯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청년예술에 대한 재현의 과잉은 오히려 그것의 빈약함을 가리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년예술이라는 영역의 독특함은 단지 인상적인 정도만이 아니라, 청년에 대한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한 영역으로 여겨지도록 했다. 청년예술가라는 말은 예술 장안으로의 진입 시점과 장에서의 관계 형성과 전략, 나아가 한국 사회의 청년세대 담론과 예술가에 대한 표상들이 중첩된 형태를 가졌다. 청년예술가들은 청년세대라 뭉뚱그려 부를 수 없는 어떤 특정한 단위를 구성하고 있고 그들이 청년예술가라는 위치를 고민하는 정체화의 과정은 다른 청년세대의 것과는 다르다. 또한 이들이 청년이라는 기표를 활용한 정책에서 경험한 것들도 분명 이전의 예술 활동과는 다른 것이었다(김선기, 2020). 더군다나 청년정책 장에서 당사자 참여를 일궈내며 운동하는 청년들의 움직임과 청년예술정책과 가까이 또는 멀리 관계를 맺어가는 청년예술가 당사자 참여 역시도 다르다. 큰 틀에서 청년 당사자 참여는 청년정책의 흐름을 변화시키고 재조정해온 활동이자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부문 운동으로서 청년예술가들의 당사자 참여는 그것을 조직화하는 과정과 이행의 어려움에서 청년 활동과는 비교적 다른 결을 갖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처럼 청년예술가는 상이한 자기, 외부 규정에 의해 뒤얽혀 재현될 뿐 아니라 스스로도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정체화하는 주체들이다. 때문에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적 논의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내가 청년예술에 비교적 가깝게 지낸 시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청년예술이라는 영역에 대한 풀리지 않는 고민을 갖는 것도 그 이유다.
이러한 고민은 스스로 예술인으로 정체화하지 않기 때문에 나를 청년예술 담론의 당사자라 말할 수 없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김선기(2020)가 청년예술에 대한 말하기를 아주 조심스럽게 시도하는 이유에 대해 깊이 공감하면서도, 청년예술 담론의 말하기에 앞서 당사자라는 위치를 보이지 않는 경계선으로 두는 것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내게는 청년예술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의 과제가 남아 있고, 기꺼이 연구의 방법으로 청년예술에 대한 다른 말하기를 시도할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실마리는 기존의 청년예술에 대한 논의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여긴다. 청년예술(가)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 지적과 해결의 방식이 아니라 국지적 사례 분석에 대한 연구들이다. 국지적 사례에 대한 분석에서 실마리를 발견하는 이유는, 청년예술가에 대한 인상 비평이나 정형화된 재현으로부터 연구의 시작점을 찾고 ‘보편’적인 대안의 제시라는 이유로 청년예술가의 실제 경험과는 다른, 혹은 피상적인 겉핥기식의 연구 과정과 다른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그것이 국지적이라 할지라도, 매우 구체적인 장면에서부터 출발할 때 청년예술가의 삶과 경험의 국면을 비출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례 분석 그 자체로는 청년예술가가 어떤 정체화 과정을 갖는지, 그들이 스스로를 어떠한 방식으로 정의하며 어떤 경험의 지평을 구축해가는지, 청년예술가 내부에서도 존재하는 차이들과 그것의 관계망은 어떻게 뒤섞여 있는지를 살피는 데는 한계를 갖는다. 그럼에도 나는 이와 같은 구체적 사례에 대한 다층적인 이해의 시작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로부터 청년예술가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한 국면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시도하는 담론의 굴절과 타협들, 재구성의 실천적 가능성을 역으로 추적해가는 것이 유효할 것이라 믿는다. 특정한 사례에서, 그 경험의 지평에서부터 복합적인 국면들을 포착해나갈 수 있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연구자인 내가 할 몫은 이전의 청년예술에 대한 고착화된 재현과 단절하는 것이다. 또한 청년예술을 논의한다는 이유를 빌미 삼아 당사자들의 경험과 목소리를 착취하고 이용할 수 있음을 부단히 경계하는 일이다. 그리고 청년예술을 고민한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삶과 동떨어진 피상적 논의를 이론화된 설명으로 포장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많이 말해진 것이지만 정말 지키기 어려운 ‘당사자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협의하는 일’의 방법을 고민하기 위해, 여러 방향성을 함께 심사숙고하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청년예술 담론을 어느 하나의 방향으로 국한되지 않으면서 다양한 언어가 가능한 영역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올바른 대답은 어려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하고 질문하며 함께 가는 것이 나의 몫이라 생각한다.
청년예술가에 대한 말을 뒤흔들고 타격하기
청년예술 아카이브 리뷰를 시작하기 전 나는 청년예술에 관한 연구가 수적으로 부족하다고 여겼고 정책은 어디에 있는지 파악되지 않았으며 담론은 휘발적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청년예술에 대한 논의의 수적인 증가는 그것이 학술, 이론, 정책, 사회적 담론 어디에서든 필요하지 않았다. 같은 말만을 반복하며 성과만을 위한 연구가 양산되거나 지원을 위한 지원이 반복되는 일은 오히려 청년예술담론의 확장에 걸림돌이 될 일이었다. 현재의 틀 안에서 이미 해왔던 담론을 추가하는 일은 무용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청년예술 담론을 모은 아카이브 리뷰를 하나의 발판으로 삼는다면, 내가 제안할 수 있는 것은 청년예술에 대한 담론에 제대로 직면하는 것이다. 청년예술을 호명하려는 외부 주체들의 시선이 일종의 고착화된 재현으로 드러났다면 그것을 뒤흔들고 타격하는 방법은 이 재현을 정치화하는 것이다. 재현의 정치는 ‘어떻게 잘 재현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넘어 ‘재현의 당사자가 무엇을 말하는가?’가 중요하다. 무엇을 말하는가는 재현의 정치의 방향을 흔들 수 있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서울청년예술인회의의 ‘숨은 참조’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여긴다. 방만하지만 흩어진 말을 모으고, 굳어진 듯 보이지만 불완전한 담론의 공간을 틈내는 일이 우리의 말로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선영(2020)은 숨은 참조를 시작하며 청년예술인에 대해 어려움을 전제하는 사회적 의도가 청년에게 어려움을 내재화시키려는 것이 아닌지, 그럴 때에야 청년이 일종의 답변자의 위치라도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닌지를 물은 바 있다. 이 문제 제기에는 청년예술인이 ‘답변자’로의 위치만을 가진다는 것뿐 아니라 ‘답변자의 답’ 역시 정해져 있다는 지적이 포함되어 있다. 앞서 내가 언급한 청년예술인에 대한 대상화, 정형화가 그를 증명한다. 그렇기에 최선영(2020)은 이미 청년들은 마련된 질문에 답변해야 했던 입장으로만 배치되어왔고, ‘많이 물어보았다’는 정책설계자나 전문가의 입장과 ‘충분히 말하지 못했다’는 청년의 입장이 충돌된 채로 청년예술정책이 다양한 사업으로 실행되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충돌 지점은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가 말하는 불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불화는 기존의 공동체가 그대로 인정된 상태에서 그 내부에서 벌어지는 투쟁, 갈등, 적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윤영광, 2014). 성원으로 인정된 사람들 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합의의 과정이 불화는 아니며, 오히려 누가 성원인가 그 자체를 의문시하며 논쟁적이고 계쟁(係爭)적인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 불화다. 내가 불화라는 말을 가져온 이유는 학술이나 정책이 청년예술을 대상화하고 그래서 당사자들이 대상화를 문제 삼고 정형화를 깨트리며 맞서 온 흐름에 다른 질문을 더해 보기 위해서다. 담론을 비틀고 전유하기 위해 ‘청년예술의 폐기’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당사자들이 모여 발언하고 그 흐름을 바꿔오는 과정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영역이 여전히 존재하지는 않은가 하는 염려에서다. 최선영(2020)은 숨은 참조를 통해 청년예술정책이 이제는 ‘같이 질문을 만드는 일’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분명히 이 작업은 중요하지만 나는 같이 질문을 만드는 일 이전에 존재해야 할 다른 충돌, 불화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장 내에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왜 불화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청년예술의 판을 흔들고 경로를 변경하기 위한 우리의 움직임은 꽤 의미 있는 궤적을 이뤄왔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청년예술을 말하기 위해 미뤄두거나 잊어버린 것들이 도처에 산적해 있다는 생각에서다. 담론의 주체들이 청년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대상화하려는 그 대상에도 일종의 등급이 존재했던 것은 아닐까하는 질문, 내지는 그렇게 매겨진 등급에 따라 청년예술이라는 영역 안에서 말하고 들을 수 있는 답변자의 위치를 획득한 당사자와 그렇지 못한 당사자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든다. 논의의 한계를 분석하고 정책의 부족함을 지적하며 새로운 합의점을 찾아내려는 우리의 모색이 한편으로는 ‘우리들만의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면 간담이 서늘하기까지 하다. 청년예술의 말이 의미 있는 담론이 되지 못하고 흩어져버렸던 또 하나의 이유는 아카이브나 플랫폼이 없어서가 아니라, 청년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논의의 장에 등장했던 이야기들과 사람들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청년예술이라는 영역은 특정한 이미지만을 소구해온 사회적 담론과 그에 맞추어 할 수 있는 정도의 변화나 인정할 수 있는 수준의 권리만을 추구하며 장 안에 무사 안착해온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 많은 ‘불화의 무대’(Rancière, 1995/2016: 99)가 필요하다. 그 언젠가 청년정책 장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보겠습니다.’ 이 문장은 많은 것을 함축한다. 나를, 나와 당신을, 우리를 옭아매는 어떤 것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것들이 내 발목을 휘어잡음에도 전진할 것임을 선언하는 말이다. “전환을 맞이해야 하는 국면 속(성연주, 2020)”에서 청년예술은 불화와 함께, 새로운 경계를 열어야 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경계를 여는 흥미로운 첫 출발은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이 청년예술에 대한 지원 당위성이자 정당성, 또는 요구로 위치 지어졌다면 이 기반 위에서 새로운 전환을 시도하는 것이 될 것이다. “어떻게 청년예술가가 예술 활동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기존의 접근법이 구제의 방식으로 귀결되면서 투명한 벽을 언제나 만들어왔다면, 우리의 방법은 청년예술을 호명하고 재현하며 위치 짓는 그 대지의 바로 위에서, 이들과 결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면서 움직임의 흐름을 가져오는 일일 것이다. 사회의 다양한 화두와 결합한 예술 실천의 사례들이 존재하고 있고, 그 실험들로 이루어진 예술과 사회의 다른 관계성은 이미 청년예술가들이 시도하고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성연주(2020), 김선기(2020)가 언급했듯이 흥미롭게도 다수의 청년예술가는 이미 장의 경계를 넘나들고 무너뜨리며 일하고 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우리가 이미, 익숙하게, 목격하고 있는 예술의 변화이자 사회의 변화다(성연주, 2020). 다른 실천 감각을 체득한 이들에게는 예술가라는 이름 외에도 기획자, 창작자, 활동가라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음을 지난 리뷰를 통해서도 확인했다. 예술 언저리에서 일어나는 많은 활동과 실천들은 어디까지를 예술이라 말해야 하는가의 경계 짓기의 문제를 넘어선다. 과연 무엇이 내 직업이 될지 있을지 모르겠다는 모호함은 오히려 불안정한 채로도 청년예술가의 작업과 활동, 일이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자신의 작업을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함은 오히려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틈을 갖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출발은 그 움직임의 흐름에서 하나의 언어를 결코 상정하지 않는 것이다. 언어, 말, 질문, 답변이라는 단어 모두 ‘목소리’의 문제인데 이 목소리라는 것은 굉장히 정치적이다. 어떤 것은 들릴 수 있는 것으로, 다른 것은 들리지 않는 것으로 혹은 들린다 하더라도 말의 체계를 갖지 못해 비가시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타자화는 목소리를 말이 아닌 소음으로 몰아내고 일종의 잡음으로 치부한다. 랑시에르는 어떤 말은 담론에 속하는 것으로, 어떤 말은 소음에 속하는 것으로 알아듣도록 만드는 치안의 질서와 달리, 정치적인 활동은 어떤 신체를 그것에 배정된 장소로부터 이동시키거나 그 장소의 용도를 변경하는 활동이라 본다. 이러한 활동은 보일만한 장소를 갖지 못했던 것을 보게 만들고, 오직 소음만 일어났던 곳에서 담론이 들리게 하고 소음으로만 들렸던 것을 담론으로 알아듣게 만든다(Rancière, 1995/2016: 63).
우리의 말이 소음이나 잡음으로 그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해진 위치가 있다면 그것을 뒤집고, 해야만 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을 잡음과 소음으로 떠들썩하게 만들어야 한다. 정돈되고 균형 잡힌 질문이 아니라 흐트러지고 불완전하며 불균형할지라도 질문의 충돌 지점을 계속 재생성해내야만 한다. 이것은 최선영(2020)이 언급하는 ‘질문을 같이 만드는 작업’을 넘어선다. 질문을 만드는 일과 여러 목소리를 드러내는 작업이 동반할 때, 다양한 목소리를 공동의 질문으로 조직하는 실천, 즉 서로를 향하는 질문의 범위와 내용을 함께 찾아가는 일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 것이다.
청년이라는 나이, 풋내기 애송이라는 경력의 미천함, 가난과 궁핍함의 아이콘으로 존재하는 청년이 아닌, 예술가하기의 성공적인 전환을 통해 사회와 긴밀히 소통하고 자신의 작업 세계를 공고히 쌓아가는 청년예술의 시대를 호출하는 것으로서 “청년예술의 폐기”를 불러온다면(성연주, 2020), 나는 그것이 불완전한 빈틈으로 가야만 한다고 덧붙이고 싶다. 이질적인 것들의 마주침, 그것이 우리가 청년예술 나아가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정치다. 청년예술이라는 영역 위에 보이지 않았던 목소리를 끄집어 올려 이질적인 것, 낯선 것, 발견하지 못했던 것과 마주하고 부딪히는 과정이, 우리에겐 늘 필요하다.
참고문헌 및 자료
김선기(2020). 새로운 예술인세대의 등장은 가능할까. 웹진 ‘숨은참조’ 연구릴레이. https://seoulartist.tistory.com/67?category=917556
성연주(2020). ‘청년예술’을 폐기하라. 웹진 ‘숨은참조’연구릴레이. https://seoulartist.tistory.com/34?category=917556
오경미(2020). ‘청년예술’이 자연스럽게 폐기처분되는 그날을 기다리며. 웹진 ‘숨은참조’ 연구릴레이. https://seoulartist.tistory.com/64?category=917556
윤영광(2014). 탈정체화의 정치-랑시에르 정치철학에서 주체(화) 문제. 문화과학, 77, 295-318.
정진세(2020). 청년예술을 폐기하더라도. 웹진 ‘숨은참조’연구릴레이. https://seoulartist.tistory.com/50?category=917556
최선영(2020). 서울청년예술인회의의 웹진 ‘숨은참조’를 준비하며. https://seoulartist.tistory.com/pages/%EC%9B%B9%EC%A7%84-%EC%88%A8%EC%9D%80%EC%B0%B8%EC%A1%B0-1
Barker, Chris. (2009). 문화연구사전.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원서출판 2004)
Rancière, Jacques. (2016). 불화. 진태원 역. 서울: 도서출판 길. (원서출판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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