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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숨은참조'

by 서울청년예술인회의 2020. 8. 10.

<편집자의 변>

서울청년예술인회의의 웹진 
‘숨은참조’를 준비하며


✍ 최선영

서울청년예술인회의 운영단

 

 


민주적인 절차에서도 놓치기 쉬운 것들


문화예술정책 안에서 ‘청년¹⁾,’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사업이 많이 기획되었지만, 공공적 담론 안에서 청년 세대의 등장을 환대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개인적으로 많지 않았다. 여기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는 심정적, 감정적, 직관적 경험이다. 이것은 마치 논리와 근거를 놓친 주관적 인상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이 부분에 밑줄을 긋고자 하는 이유는 사실적 근거 위주로 설명되기 쉬운 정책의 설계 및 실행 단계에 대한 한계부터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청년 세대 그리고 그와 관련한 사회 구조적 문제를 연구하고 분석한 다양한 관점이 있다. 이 관점은 연구자, 학자, 활동가, 정책 설계자 혹은 공공기관 관계자라는 주체를 통해 현장에 전달되곤 한다. 현장 예술인의 입장에서 보면 공공이 이슈별, 분야별, 사업별 주제에 따라 적극적으로 청년이나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온·오프라인으로 불러모아 말을 거는 것으로 보인다. 질문도 등장한다. 그 구체적 현장은 크고 작은 라운드 테이블, 포럼, 간담회, FGI(Focus Group Interview), 좌담회, 설문조사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말을 걸고 질문을 하는 것은 그것을 하는 주체의 입장이다. 그렇다면 호명되어 답변하는 입장은 어떨까. 만약 한쪽이 말을 걸고 질문을 했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는 반면, 한쪽은 그 질문이 (‘청년’으로 개념화되기도 전에) 나를 빗겨 가고 있다고 느낀다면 어떨까. 그 심정에 대해 질문하는 입장은 궁금해하고 있을까. 민주적인 절차를 바탕으로 묻고 답하는 자리가 마련된 것과 별개로, 답변하는 이의 심정을 궁금해할 필요성은 어떻게 발생할 수 있을까. “당신은 청년의 입장에서 예술 활동의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라는 질문 이전에 “당신은 예술 활동을 어떻게 전제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도 필요할 것이다. 혹은 “그 어려움을 말하는 심정은 어떻습니까”라는 질문도. 개인적으로는 ‘어려움을 전제하는’ 사회적 의도가 더욱 궁금하다. 그 의도가 청년 세대에게 어려움을 내재화시키는 것은 아닌지, 그래야만 청년으로서 답변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닌지 추후 더 논의하고 싶다.

 




답변자로 배치된 청년


이러한 맥락에서, 청년들은 이미 마련된 질문에 답변해야 했던, 그래서 질문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입장보다 주로 답변을 하고 떠나는 입장으로 배치되었다고 볼 수 있다.²⁾ 이러한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청년이라는 개념은 사회적으로 등장하였으나 실상은 존재 자체로 환대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그 현장의 기록과 언어들은 답변하는 사람의 삶의 일부에만 포커스되어 정책과 사업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많이 물어보았다’는 정책 설계자나 전문가의 입장을 충족시키고 ‘충분히 말하지 못했다’는 청년의 입장을 발생시키면서도 다양한 사업들로 구체화된다. 현실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절차적, 구조적 한계도 물론 존재한다. 그러나 청년 관련 사업의 다양화 및 확장을 근거로 세대 간 위계가 줄어들고 다음 세대의 언어가 등장했다고 보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 청년이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만드는 역할로 호명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이와 관련하여 ‘발언권을 달라’는 표현을 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많은 경우 ‘답변의 기회를 달라’는 방향으로 해석되거나 작동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같이 질문을 만들자’는 제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급변하는 사회 안에서 기존의 지배적 관점으로 동시대의 이슈, 감각, 언어 등을 찾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니, 그 한계가 마주해야 할 변화와 흐름을 함께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답변자에서 질문자로


더불어, 질문하고 발언하는 것, 그다음의 과정과 결과를 현실적으로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최근 서울문화재단의 ‘THE 넓은 라운드 테이블’, 예술지원체계 개선에 관한 'THE, 듣는 공청회', 관련 연구사업 및 제1회 서울청년예술인회의, 그리고 여러 기관과 민간단위의 논의 테이블에서 많은 이야기가 쏟아졌다. 위에서 언급한 ‘질문을 함께 만들자’는 제안도 각기 다른 표현으로 등장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실한 기록과 자료화를 넘어서는 구체적인 작동구조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으로 그 작동구조를 누가, 어떻게 기획하고 운영할 수 있을지 모호하다는 생각도 든다. 기존의 논의구조는 민주적 절차를 획득하는 발언 기회의 마련, 이것의 확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기적인 정책과제, 혹은 공공적 담론으로서 질문과 발언, 그리고 답을 도출해갈 주체를 어떤 과정으로 형성할지, 그들의 활동을 위한 현실적 기반 마련은 어떻게 가능한지, 그 활동의 파급력이나 정당성을 마련해줄 장치로 무엇을 활용할 수 있는지, 혹은 그 장치마저 새롭게 만들어나가야 하는지 등 촘촘한 고민과 구체적 의지가 요구된다. 그 필요성 안에서 ‘서울청년예술인회의’가 서울문화재단의 청년예술 관련 협력 파트너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체적 질문자 이전에 주로 답변자로 발언해왔던 청년 세대가 주요 구성원이 되면서 ‘서울청년예술인회의’가 무엇에 대해 함께 질문을 만들고 대화를 해나가야 할지 방향을 잡는 데 긴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그 과정에 있다. 동시에 몇몇 구성원 중심으로 논의의 주제를 설정함에 따라 발생하는 관점의 한계, 문화예술 관련 다층적인 이슈 설정의 어려움도 발견하고 있다. 또한 ‘서울청년예술인회의’ 역시 단지 많이 듣고 열심히 정리하는 것에만 집중할 경우 듣는 입장의 정당성만 강화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특히 문화예술계 안팎에서 안정된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렇게 많은데도 왜 정책으로 연결되지 못하는지에 대한 현실적 고민이 크다.




목소리가 작동될 수 있는 근거와 환경


이것은 ‘서울청년예술인회의’가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역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의지와 관련이 깊다. 이에 따라 ‘서울청년예술인회의’는 청년예술(인)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으로 연결 가능한 근거자료로 재구성하는 역할을 하고자 한다. 다양한 삶의 언어를 정책적으로 작동 가능한 참조자료로 축적하고 발신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발언이나 근거는 현실적으로 몇 가지 유형을 띄어야 하는 경우가 있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보다 어떤 유형을 취하느냐가 더 중요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청년예술(인) 관련 논의가 공공적 담론 및 제도로 적극적으로 수용되지 못했던 이유는 그 작동 장치가 구체적으로 마련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것은 청년 혹은 청년예술인 스스로 그 장치를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그것을 고민할 사람들이 능동적이고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있었는가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최근 불거진 예술계 성폭행 관련 이슈만 살펴봐도 그렇다. 누군가는 위계의 공고함을 즐기듯 행동할 수 있고, 누군가는 그 안에서 개인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채 윤리와 폭력에 대해 외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이슈는 위계가 작동 가능한 구조의 문제로 이어지고 성폭행이든 차별이든 혹은 그런 이름도 부여받기 모호한 위계적 상황 자체로 이어진다. 이 상황이 촘촘히 엮여 있을 때, 새로운 사람이 기존과 다른 질문을 던지고 그것의 작동 과정을 기획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런 맥락에서 ‘서울청년예술인회의’가 서울문화재단의 협력 파트너로 시작되었지만 그렇기에 자발적 움직임의 한계 안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목소리를 조직하여 공감받는 질문으로

 

결국 사람을 조직할 것인가, 목소리를 조직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많은 발언자를 포섭하고 모으고 그 숫자를 성과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를 공동의 질문으로 조직하는 실천이 ‘서울청년예술인회의’의 역할로 보인다. 질문들의 발화에만 자기합리화하지 않고 그 질문이 뻗어 나갈 수 있는 구체적 자리를 만들어 정책이나 담론으로 맺힐 수 있는 작동구조를 찾는 것도 필요하다. 현재 현장 프로그램, 인터뷰, 웹진, 포럼 등이 그 연결지점들로 기획되어 있으며 이 기록들이 서울을 넘어서는 다양한 현장에서 참조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말들이 매우 거창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거창함 대신 태도를 마련하기 위한 약속의 언어로 앞으로의 활동을 이어가고 싶다. 그 언어들이 궁극적으로는 청년 세대만을 위한 세력화된 의제로 작동하지 않고 다양한 예술인에게 공감과 지지를 얻기를 바란다. 그래서 ‘서울청년예술인회의’가 현장을 잘 대변하고 정리하는 역할에 집중하기보다 서로를 향하는 질문의 범위와 내용을 함께 찾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특히 최근, 과거와 현재를 흔들어버리는 이슈와 사건을 마주하고 있지만, ‘서울청년예술인회의’가 미래에 대한 공허한 다짐 대신 공감받는 질문을 마련할 수 있도록 노력하기를 바란다.


1) 여기에서 ‘청년’은 서울문화재단의 청년 관련 지원사업 기준에 따라 만 39세 이하로 정의한다. 이는 글의 전개상 편의를 위함이며, 장기적으로는 ‘청년’ 혹은 ‘청년예술’을 정의하기의 한계를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2) 한편 이러한 상황은 청년뿐만 아니라 특히 예술지원정책에서의 예술인 전반에도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