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예술인세대의 등장은 가능할까
✍ 김선기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연구원
흘러내린 물은 절대 다시 올라갈 수 없다. 청년예술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도입하면서 진행된 서울문화재단의 대규모 지원사업은 2020년부터 자취를 감추었을지언정, 이미 3년이라는 기간 만큼의 변화를 창출했다. 그 변화의 효과는 당장 현재태로 인식하기 어려울 수 있으나 잠재태로서 예술계 내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나는 ‘청년’이라는 단어 속에서 한국사회를 조금이나마 변화시킬 희망적 동력과 이미 낡은 논리들이 새로운 척하며 귀환하는 장면을 동시에 본다. 아마 예술계의 생리에 대해서는 무지하나 ‘청년’에 대해 생각하는 문화연구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엎질러진 물의 흔적에 존재하는 희망의 잠재력을 이론적으로 해석하고, 조금 더 보태면 그 희망을 써 나가고 있는 실존하는 청년 주체의 실천이 있음을 표면화시키는 일 정도일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와 청년예술
성연주는 연구릴레이를 여는 글에서 청년예술 사업이 3년 동안 시행되었음에도, ‘청년예술’이 끝끝내 담론화되지 못했다고 지적하며, 피에르 부르디외의 장이론(field theory)을 원용하여 그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청년예술 지원사업의 도입 맥락이나 선정 기준으로 작용해 온 ‘나이’나 ‘청년예술가의 생계 곤란 문제’는 예술 장(field of arts) 내에서 상징투쟁의 대상이 되는 내기물로 작동하기 어려우며, 또한 그렇기에 청년예술 지원을 받았다는 것 혹은 ‘청년예술인’이라는 명칭 자체가 예술계에서 통용되는 상징자본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 시점에서 보면 매우 적확한 평가로 보이며, 범박하게 보아 부르디외의 계급재생산 이론의 논리적 틀거리에 잘 들어맞는다. 하층계급의 실천감각이 발현된 결과 그들이 획득하게 되는 각종 자본은 그 양과 특성 면에서 사회공간 및 여러 장에서 적절하게 인정받지 못하는 종류의 자본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러한 통계학적 상관관계는 계급의 재생산과 계급 위계의 유지에 복무한다. 유사하게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예술 장’이라는 것을 적절하게 개념화할 수 있다면, 거기에서 청년예술이라는 자본은 아마도 미숙함이나 될성부름으로 통용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성연주의 글을 읽으며, 그가 글의 제목처럼 ‘청년예술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 문장은 오히려 반어법에 가깝다. 청년예술의 ‘진정한 함의’를 이야기하며 새로운 청년예술의 시대를 ‘호출’하려는 목적성을 가지고 쓰여진 일종의 ‘어그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청년예술 담론이 아직 명료하게 드러나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청년예술이라는 범주를 동원한 지원사업이 변화의 실마리를 남겨놓았다는 점을 다시 부르디외의 이론을 통해 이야기해보겠다. 부르디외를 현실의 재생산에 관한 사회이론가로만 읽는 것을 반대하는 독일 학자 슐러카의 논의를 참조하자.¹⁾ 총체적인 하비투스-장 이론의 틀 내에서 변화(change)는 언제나 기입되어 있는데, 부르디외는 모든 장(field)의 현재 모습이 지난 투쟁(struggle)과 사건들의 연쇄로 만들어진 결과라고 보기 때문이다.
모든 장은 안정적인 구조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것은 지속적인 투쟁 과정의 한 시점의 단면에서만 살펴볼 수 있는 일시적인 타협점에 불과하다. 직접 세대 개념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지는 않았지만, 부르디외에게 세대(generation)라는 관념은 장의 역사성을 이론화하는 데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²⁾ 출생과 사망이라는 자연의 주기는 장의 역사에 있어서도 연속적인 변화의 동력을 제공한다. 간략히 말해, 특정한 장에서 이미 중요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기존 행위자들과 장에 새롭게 진입하는 신참자(entrants)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이 있고, 이 긴장이 어떻게 해소되는지를 바탕으로 장의 변화와 역사가 설명 가능한 것이다.
장의 경계에서 진입을 시도하거나, 나아가 장의 무게중심을 이동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신참자는 이념형적인 두 가지 전략 중 하나를 취할 수 있다. 현재 장의 논리를 충실히 따라 이미 정당화된 종류의 상징자본을 더 많이 취득함으로써 장의 중심부로 진입하는 계승 전략과 기존 장에서 통용되는 상징자본 자체를 부정하고 장의 내기물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새로운 것으로 재정의하는 전복 전략. 신참자가 어떤 전략을 취하게 되는지의 문제는, 그가 이미 가지고 있는 자본의 양과 구성비 등과 체계적으로 관련된다.
예컨대 지금 한국의 예술 장을 빗대어 이야기해보면, 인정받는 몇몇 대학 혹은 외국 학위 등을 취득하고 기존 평단으로부터 인정받으면서 장에 진입하는, 소위 ‘꽃길’만 걷는 예술가들은 계승 전략을 취할 개연성이, 적절한 상징자본을 예술계 진입과정에서 획득하지 못한 예술인들은 전복 전략을 취할 개연성이 크다. 아니, 이것은 완전히 반대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나마 기성 예술 장이 승인한 예술인 지원사업에 생활을 걸어야 하는 경우 계승 전략을, 기존의 제도에 종속되지 않고도 예술을 계속할 수 있는 ‘믿을 구석’이 있는 경우 전복 전략을 구사할 수도 있다. 아무래도 금전적으로, 또 사회적 네트워크로 든든한 지원을 해 줄 수 있는 집안 배경, 혹은 매우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길러진 개인의 예술성(부르디외식의 문화자본)이 중요한 믿을 구석이 될 수 있다. 아르바이트하지 않고 학업과 자기 경험에만 집중할 수 있는 중산층 이상의 환경이 구직자의 퍼포먼스의 중요한 결정 요인이 되듯, 예술계 내에서도 당연히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가진 자’에 의해서 취해지는 전복 전략은 특정 예술계 내에서의 예술성을 어느 정도 재정의하는 전복성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예술 장에서 극히 소수만이 성공할 수 있는 엄혹한 현실, 성공한 예술가의 뒷배경은 가려지고 ‘재능’과 ‘능력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이 영역에 떠돌게 되는 상황을 그대로 유지, 즉 계승한다.
새로운 네트워크, 새로운 실천 감각
나는 청년예술인을 지원했던 3년의 시간, 그리고 사업을 없앨 수는 있어도 역사를 지울 수는 없게 되어 떠돌게 된 ‘청년예술’이라는 기표가 예술 장의 신참자들을 전복 전략으로 조금은 기울게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고 판단한다. 일단 이 사업을 통해 예술인의 경계 안으로 발을 들이게 된 많은 행위자의 ‘출신 성분’이 그러하다. 청년예술단이나 최초예술지원 사업에서의 예술인 기준은 예술활동증명보다도 충족하기 쉽게 적용되었는데, 기존의 예술 장 진입 경로와는 다른 배경을 가진 예술인들이 창작 활동의 주체가 될 기회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청년예술이라는 명칭은 ‘예술’이라는 범주로 묶이지 않더라도 ‘청년’이라는 범주에 해당하는 주체들을 예술인으로 호명하는 효과를 지녔던 것이다. 이를테면 이미 예술계에서 활동한 경력이 꽤 되었던 신지연은 최초예술 지원사업을 거치면서 스스로에게 ‘독립기획자’이자 ‘창작자’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하게 된 사연을 담담하게 풀어놓기도 했다. 아마도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새로운 창작자라는 정체성 또한 기성 예술계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성의 하나일 테다.
물론 청년예술 지원사업 이전에도 스스로를 ‘예술인’의 범주 경계에서 정체화하고 있었던 이들이 이 사업에 참여한 예술인들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기는 한다. 그렇지만 출신을 막론하고, 청년예술 지원사업이 이들에게 허락한 시간과 경험은 이전의 예술활동 경험과 질적으로 다른 것이기도 했다. 연극과 같은 집단예술의 경우 젊은 나이에 자기 작품을 창작하는 것, 혹은 좀 더 젊은 나이로 구성된 팀이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 가능해지고 활성화됐다. 문학과 같은 개인창작 영역은 어떠한가. 연구릴레이 회의에서 장은정 평론가는 이 사업을 통해 문학인들 사이에서 팀을 만들어 활동하는 일종의 작은 유행이 생겨났음을, 또 그 과정에서 창작에 수반되는 기획, 회계 등의 실무와 씨름하는 문학 창작자들의 모습이 나타났음을 알려주었다. 이 새로운 주체의 잠재력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다른 논리와 방식을 경험하고 따라서 단 1~2도라도 기존과는 다른 예술 하비투스(habitus)³⁾를 가지고 활동하게 될 주체들이 생겨났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구체적으로 어떤 다른 하비투스, 즉 예술 실천에 대한 다른 실천 감각을 기대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 두 가지 정도의 가설을 제기해보려 한다. 우선 예술의 수요에 대한 다른 감각을 들 수 있다. 창작을 위한 자금이 어떠한 수요로부터 나오는지가 예술 실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소수 귀족의 후원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예술과 국가 지원제도가 보장하는 창작, 거대한 시장 논리에 반응하며 제작되는 예술상품과 상대적으로 소수인 예술 장 내의 평판을 더 중요시하는 작업 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부르디외는 <예술의 규칙>에서 18세기 프랑스 문학 장을 분석하며, 당시 중등교육을 받았으나 기존의 사회가 제공하는 일자리가 흡수하지 못한 존재들이 대거 출현한 사회학적 상황 속에서 ‘보헤미안적’인, 즉 기존 사회 세계나 예술 장의 논리와는 다른 존재의 양식이 출현하게 되었음을 암시하였다. 이들은 플로베르처럼 직접 전복 전략을 구사하는 창작자가 되기도 하고, 또 그러한 전복 전략에 조응하는 새로운 동맹군이자 믿을 구석으로서의 독자층이 되기도 한다. 청년예술에서도 유사한 잠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청년실업 해소’라는 담론이 그 출발점의 정당화 논리를 제공하였을지라도, 이 사업은 특정한 연령 구간에서 갑자기 ‘예술인’의 범주 경계에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대거 늘리면서 흩어져 있던 어떤 에너지를 예술 장 내로 제도적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고등교육 이수자에게 적합한 일자리가 너무 부족한 한국사회의 현실, 그리고 어딘가 ‘보헤미안적’인 청년들이 모이는 서울이라는 환경을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기성 ‘예술 장’의 논리에 따라서는 예술인으로 정체화하기 쉽지 않거나 혹은 이미 장 내부에 있는 행위자에게 그렇게 인정받기 어려웠지만, ‘청년’이라는 다른 기준을 통해 예술인의 범주 경계로 진입한 예술가들. 청년예술인이라는 시기가 지나서, 혹은 그 사업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이들이 예술 장에 계속해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 새롭게 바뀐 예술지원 제도를 따라가기 위해 ‘청년’ 아닌 ‘예술인’으로 변신하는 전략도 있을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청년예술’로 인해 호명되었던 ‘청년예술인’ 그리고 이들 각각의 네트워크 내에서 예술 경험을 했던 수요자층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공동의 다른 기준을 세워나가는 것도 전략이 될 수 있다. 즉, 기성의 예술인들과 그 암묵적인 규칙에 호소하거나 시장 논리를 향해 예술을 하는 대신, 청년예술 혹은 그렇게 명시적으로 범주화되지는 않더라도 무언가 다른 종류의 감상자들을 고려하면서 예술하는 종류의 내적 논리가 발생할 수 있다. (아직 두드러진 사례가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대안적인 전략은 예술인들에 의해 이미 실천되고 있다.) 이미 있던 것과 다른 기준으로 네트워크를 짜는 일은 이들이 이미 공고한 예술 장의 논리를 ‘계승’하지 않더라도 예술 장 내에서 하위 분파로서 생존하거나, 향후 주류화를 노려볼 수 있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청년예술이라는 범주가 예술을 탈신비화하거나 내지는 조금 더 ‘사회적인 것’으로 위치 짓고자 하는 종류의 실천 감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감히 해 본다. 이러한 기대 또한 청년예술을 통해 예술인으로 호명된 이들이 다수는 기성의 예술인들과는 약간 다른 주체일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한편으로 청년예술인들이 속하는 출생코호트는 주로 사회적인 착취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가진 세대로 특징지어진다. 젊은 시절을 버티면 조금 나은 내일이 있을 수 있다는 종류의 미래에 대한 기투(projection)가 객관적으로도 불가능한 이들은 현재로부터 생존을 위한 대책을 끌어올리려 한다.
최근의 신참자들은 ‘예술은 배고픈 것이다’와 같은 낭만 속에서 희망을 찾기보다는 투잡을 꾸려 가든, 아니면 지원사업형 인간이 되든 간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소득과 경력을 관리하는 삶의 방식에 대체로 익숙해졌다. 예술인이 국가 지원사업, 기업 후원, 크라우드 펀딩 등 다양한 소득 포트폴리오를 만들어가는 현상은 기업가적 주체가 된 예술인들을 경유하여 예술이 시장에 포섭될, 예술인들이 자기책임화의 윤리를 내면화할 우려로 인해 신자유주의 비판론자들에 의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받아온 것이기는 하다. 그런데 예술가가 계속해서 자신의 예술의 값어치에 대해서 고민한다는 사실은, 결국 예술경제가 사회적인 맥락과 탈구될 수 없는 한 예술의 사회적 쓰임새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특히 지원사업과 관련해서는 예술의 공공성에 대한 고민이 동반될 개연성도 크다.
물론 시장 논리와 지원사업에서의 공공성 모두 현재 시점의 현실태로 보면 굉장히 협소하고, 거기에서 다른 희망을 본다는 점이 과도하게 낭만적인 기대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의 전선에 균열을 내기 위해 새로운 담론을 만들고 있는 예술인 주체들이 있으며, 그들이 다소간은 청년예술이라는 낯선 예술범주 혹은 정치적 언어와 맞물려 있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다. 이 연구릴레이에 참여하고 있는 필자들이 대부분 그러하고, 우리와 연결된 젊은 예술인들의 담론적이고 정치적인 실천들이 그러하다. 오경미의 글에서 예술노동이라는 문제의식을 빌어 현재의 청년예술 지원에 던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진공 상태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술인 지원이 예술인의 ‘인권’을 보장하는 데 이르러야 하며, 또 예술인의 불안정성을 낳는 근본적인 구조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는, 적어도 그러한 문제의식을 품고 있는 청년예술인이 이미 존재한다.
오경미는 예술노동 논의가 법적이고 사회적인 보호망 내에 예술인들을 포섭해달라는 요구이자, 노동의 범주에 포함되는 활동을 하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사회적인 혜택을 더 많이 보장받는 구조적 모순에 대한 문제제기임을 분명히 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 ‘노동’이라는 보편을 확장하기 위하여 예술을 거기에 포함되도록 하자는 논의를 역으로 이렇게 사고해볼 수도 있겠다. 젊은 혹은 청년예술인의 자리는 예술이 다른 노동과는 다르게 특별한 것으로 여겨지도록 했던 약간의 신비함을 벗겨내는 주체가 되는 것에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노동자’ 개념의 실질적인 확장, 그리고 인간의 ‘권리’에 기반을 둔 사회 정책의 실현을 앞장서서 주장하고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는 계기로서의 청년예술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⁴⁾
청년예술인세대의 등장을 기대하며
이 글을 쓰면서 매우 마음이 어려운 점이 있었는데, 내가 스스로를 예술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외부자라는 점 때문이었다. 앞에서 나는 ‘청년예술’의 잠재성을 이론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을 하면서 실제로는 청년예술인들을 특정 과업의 주체로 호명한 셈이나 다름없기도 하다. 기성 예술 장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예술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예술을 사회적인 것으로서 재구성하면서 좀 더 평등한 권리의 실현에 있어서 역할하는 주체가 청년예술이라는 범주를 경유해 조직될 가능성을 전망한 것이다. 한데, 나는 이러한 전망이 실제 예술인들에게 읽힐 때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될 것인지에 관해 참조할 만한 사전 지식이 많지 않고 그래서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를 늘어놓았다거나, 오히려 예술인에게 과한 의무와 책임감을 부여하면서 ‘예술적인 것’에 대한 몰이해를 전시한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특히 청년예술에 대한 논의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특정한 연령층과의 관계를 끊어낼 수는 없는데, 젊다는 이유만으로 젊지 않은 사람들이 져야 하는 이러저러한 의무를 더 부과받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당한 일이다.
그래도 나는 ‘청년예술인세대’의 등장을 기대해 본다. 전술한 노파심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만 여기에서의 ‘세대’는 특정한 연령층을 배타적으로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법이 아니다. 헝가리 출신의 지식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의 세대 개념은 연령을 절대적인 참조점으로 삼지 않으면서 ‘청년’과 ‘세대’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에 대한 영감을 제공한다(cf. Mannheim, 1929/2013). 만하임식 세대 이론의 핵심적인 변별점은 세대를 연속적인 무엇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현상으로 설명했다는 데 있다.⁵⁾ 자연적인 출생의 연속과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이 주는 리듬에 따라서, 30년 내지는 10년과 같은 주기로 새로운 세대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학적으로 특정할 수 있는 현상으로서의 특징을 가진 ‘세대’라고 부를만한 코호트는 매우 가끔씩 출현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인구 전체를 예컨대 10년 단위로 끊어 다양한 세대가 연속된 상태로 묘사하는 몇몇 논자들의 논의⁶⁾는 이 관점에 따르면 틀린 것이다. 대부분의 출생코호트는 세대사회학적 관점에서 동질적 집단으로서의 특징을 가진 엄밀한 의미의 세대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역사 속에서 ‘세대’를 가져본 적이 거의 없다고도 할 수 있는데, 부르디외가 <호모 아카데미쿠스> 등의 저작에서 묘사했던 프랑스 및 서유럽에서의 ‘68세대’나 한국에서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3)86세대’ 정도가 많지 않은 예외적인 실제 세대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실질적 세대는 그들이 창출하여 공유하는 공통적인 세계관과 사회의식으로부터 변별되는 것이므로, 같은 연령대라고 해서 모두 포함되지도, 또 다른 연령대라고 해서 배제되지도 않는다. 나는 ‘청년예술인세대’라는 언표를 통해서 그간 많은 이들이 ‘청년예술’이라는 말에 투영했던 기성의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바탕에 둔 새로운 예술 장에 대한 열망이 응축되는 모습, 그리고 느슨하든 강고하든 이 세대가 만들어가는 연대 속에서 일정한 변혁이 실행되는 모습을 본다.
새로운 실질적 세대로서의 ‘청년예술인세대’에 대한 기대 그리고 기획은 그리 간단치 않다. 하지만 이 세대 형성 작업의 기초가 될 정치적인 기회구조, 그리고 이 작업의 필요성이 각각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새로운 세대 형성의 가능성은 미시적으로는 앞서 본론에서 살펴보았던 바와 같이, ‘청년’과 관련한 수많은 제도 및 담론 속에서 여기에 이해관계를 거는 주체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거시적으로 보아도 ‘청년’이라는 말이 다종다양한 장에서 또 사회공간 내에서 하나의 내기물로 작용하고 있음이 확연하다. 세대, 특히 ‘청년(세대)’은 사회 담론에서 “사회적 불평등·복지·경제정책·인구문제·정치 이념 등과 관련된 특수한 이해들이 응축되어 있는 기표”로 활용되어 왔다(김선기, 2016, 34쪽). 우리 각자의 어떠한 희망이 일상적으로 ‘청년’이라는 개념에 투사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권력이 작용하여, 특정한 ‘청년’ 담론은 실제 연령상의 청년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으로 포장해버리고, (주로 전복적인) 다른 ‘청년’ 담론은 일부에게나 해당하는 것으로 배제해버린다. 이 과정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청년팔이’를 동반하는데, 여기에 바로 ‘청년예술인세대’를 조직해야 할 필요성이 따라온다. 정진세는 서울시 청년예술 지원사업의 설계 과정을 회상하면서, 초창기 그 당시 이 사업을 지원받을 대상으로서의 당사자성을 가진 ‘청년예술’에 대한 대표성을 가진 혹은 자임하는 주체가 없었다는 점을 인상깊게 강조하고 있다. 더불어 그렇게 당사자 목소리가 없는 정책이 설계되고 운영된 결과, 3년간의 사업이 청년예술가를 대상화하는 부작용을 동반한 채로 갑작스레 사라지게 되었음을 되짚는다.
예술인들에게 벌어진 ‘청년팔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물론 청년팔이를 하지 말라는 담론을 펴는 방법(‘우리는 청년이 아니다’)이 하나 있겠으나, 이미 ‘청년’이 사회적 화두로 공고해져 가고 있다는 조건을 생각해봤을 때, 오히려 적극적으로 ‘청년’이라는 기호에 담긴 의미를 빼앗아오기 위한 담론 투쟁에 뛰어드는 방법이 더 유효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더 정치적이고, 더 윤리적인 ‘청년팔이’를 고민하고 실제로 수행하는 ‘청년’의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이다(김선기, 2020).
물론 서울시의 청년예술 사업은 잠시 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자치구나 다른 지자체 단위에서 혹은 ‘청년’이라는 말에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는 현상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감각 안에서 ‘청년문화’, ‘청년예술’과 같은 범주들이 반복해서 되살아날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젊은 예술인들 혹은 예술인의 경계에서 예술 장의 문을 두드리는 젊은이들이 스스로 그 범주를 다시 소환할 수도 있다. 정진세가 회상했던 2016년의 풍경과 달리, 새롭게 만들어질 전선에 ‘청년예술인세대’가 존재한다면 어떨까. 똑같이 ‘청년예술’을 이야기하더라도 탑다운이냐 바텀업이냐, 아니면 그것을 말하는 주체가 누구냐,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말하는 것에 따라서 결과값은 당연히 달라진다. 청년예술인세대는 공공성이란 무엇인지, 또 청년예술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 작업에서부터 연결된 주체들의 생각을 모아내고 새로운 방향을 도출해서 사회에 설득시키는 주체로서 역할할 수 있다.
청년예술인세대는 ‘청년예술’을 어떻게 다시 써야 할 것인가. 그 방향에 대해서야말로 내가 감히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다만 이 연구릴레이의 제안자였던 성연주의 제안이 큰 틀에서 유효하다고 여겨진다.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예술의 위치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 “전통적인 예술 장의 신화를 깨부수는 것”을 통해서 아마도 청년예술인세대는 예술이라는 단어가 다른 일상사회와 분리된 요새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어떤 감각을 변화시킴으로써 예술 그 자체를 새롭게 쓰는 주체가 될 수 있을지도, 그러한 방향성이 적어도 나 개인에게는 상당히 설득적으로 들린다는 점을 적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겠다.
참고문헌
김선기 (2016). ‘청년세대’ 구성의 문화정치학: 2010년 이후 청년세대담론에 관한 비판적 분석. <언론과 사회>, 24권 1호, 5-68.
김선기 (2020). ‘청년팔이’의 시대. <인문잡지 한편>, 1호, 21-40.
Bourdieu, P. (1988). Homo Academicus. 김정곤, 임기대 (역) (2005). <호모 아카데미쿠스>. 서울: 동문선.
Bourdieu, P. (1992). Les Règles de L’art: Genèse et Structure de Champ Littéraire. 하태환 (역) (1999). <예술의 규칙: 문학 장의 기원과 구조>. 서울: 동문선.
Mannheim, K. (1929). Das Problem der Generationen. 이남석 (역) (2013). <세대 문제>. 서울: 책세상.
Purhonen, S. (2016). Generations on Paper: Bourdieu and the Critique of ‘Generationalism’. Social Science Information, 55(1), 94-114.
Schlerka, S. M. (2019). It’s time for a change: A Bourdieusian approach on social change. Time & Society, 28(3), 1013-1038.
1) Schlerka, S, M. (2019). It’s time for change: A Bourdieusian approach on social change. Time & Society, 28(3), 1013-1038.
2) 부르디외 이론에서의 ‘세대’ 관념에 대해 장-특정적 세대(field-specific generations) 개념을 만들어 설명한 핀란드 학자 푸르호넨의 논의는 다음의 문헌을 참조하라. Purhonen, S. (2016). Generations on paper: Bourdieu and the critique of ‘generationalism’. Social Science Information, 55(1), 94-114.
3) 하비투스에 대한 설명
4) 최근 예술계에서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기본소득, 기본자산, 기본서비스 등에 대한 논의 또한 비슷한 결에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인’에게만 배타적으로 적용되는 ‘예술인기본소득’은 기본소득의 원칙에도 맞지 않으며, ‘예술인’의 특수성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나 개인적으로는 찬성하기 힘들고, 사회적으로는 정당화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다만 ‘기본소득’ 논의에 담겨 있는 어떤 평등에 대한 열망을 밀어붙인다면, 한국사회에서 통용되는 ‘노동’이나 ‘활동’, ‘권리’ 등의 의미를 확장하면서 유의미한 사회적 대안을 도출하는 데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없지는 않다.
5) 카를 만하임의 세대 이론은 지금까지도 세대에 대한 거의 모든 학문적 논의의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모든 학자들이 나의 만하임 이해 방식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만하임에게서 연속적이고, 내부가 어느 정도의 공통성을 갖는 종류의 실정적 세대 개념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나는 그것이 틀린 이해라고 본다.
6) 예컨대, 한국전쟁 세대 – 산업화 세대 – 386세대 – X세대 – 88만원 세대 – MZ세대 와 같은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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