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예술'이 자연스럽게 폐기처분되는 그날을 기다리며
✍ 오경미
문화예술노동연대 사무국장
“‘청년예술’을 폐기하라”라는, 누군가에게는 도전적일, 누군가에게는 반감을 불러일으킬, 누군가에게는 공감을 얻을 선동적인 문구를 주제로 하여 성연주, 정진세, 신지연, 오경미, 김선기, 장은정의 순으로 이어지고 있는 이 일단의 연구릴레이는 서울문화재단에서 실시한 청년예술지원사업인 《서울청년예술단》과 《최초예술지원》사업을 시작으로, 예술지원사업의 새 범주로 떠오른 ‘청년예술정책’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청년예술’을 폐기하라”라는 문장은 충분히 도발적이나 청년예술에 붙어있는 작은따옴표를 놓치지 않는다면 이 도발은 청년을 대상으로 한 예술지원 정책을 모조리 폐기하라는 주장이 아니라 어떤 조건을 전제하고 있는 주장이라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해당 주제로 릴레이 필진을 모으며 기존의 지원사업과 구별되는 파격적인 혜택과 예산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사업이 장기화되지 못하고 좌초된 원인을 찾으려 했던 문화사회학 연구자 성연주도, 2017년 《서울청년예술단》 사업의 설계 과정에 참여하며 겪었던 경험을 되돌아보며 성찰적 태도로 설계의 오류와 성급함을 인정했던 극작가이자 비평가인 정진세도, 서울문화재단의 두 사업 중 《최초예술지원》 사업과 2019년도에 청년예술지원사업 내에 신설된 다년(2년)간 지원유형에 선정되어 예술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기획자 신지연이자 창작자인 신소우주도, 모두 한결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들에게 폐기되어야 할 것은 청년이라는 대상에 대한 인식적 부족함으로 인해 빈약하게 설계된 정책과 사업진행 과정에서 나타난 오류이지 청년 예술인을 대상으로 한 공공지원 정책사업은 아닌 것이다. 필자 역시 같은 마음이다. 우리에게는 지금의 것과는 다른 청년예술 지원정책이 필요하다. 청년 예술인은 (연령을 기준으로 구분하건 다른 무언가를 기준으로 구분하건) 예술계로 갓 진입하여 멀지 않은 훗날 예술계를 주도해 나갈 이들이다. 청년 예술인이 꾸준히 안정적으로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게 된다면 예술인으로 살아가게 될 이후의 삶까지도 지금보다는 안정적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청년 예술인을 위해 필요한 예술지원 정책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지금까지의 예술지원 정책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청년예술 정책 사업은 무엇을 놓치고 있나?
현재의 지원정책은 누구에게, 무엇을 목적으로 지원하는가 라는 내용의 변주만 끊임없이 반복할 뿐 예술인 서로를 경쟁하게 만들어 경쟁을 통과한 소수에게만 대체로 1년을 넘기지 않는 한정된 기간 동안 혜택을 제공하는 배타적인 공모의 형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항상 하나의 사업으로 다중의 목적을 수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위기에 처한 예술인을 지원한다고 문화체육관광부가 내놓은 공공미술 프로젝트 사업 역시도 “피해예술가 지원, 지역주민의 미술문화 향유, 품격 있는 문화 공간 조성”이라는 세 가지의 정책 목적을 담고 있었다. 서울문화재단의 두 사업은 물론 타기관에서 시행하고 있는 청년예술 지원사업 역시 마찬가지다. 천편일률적인 방식의 공모는 여러 한계를 안고 있는데, 청년 예술인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특히나 적절하지 않다. 본 연구릴레이의 논의 대상인 《서울청년예술단》, 《최초예술지원》사업과 함께 현재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아르코청년예술가지원》사업의 지원요건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서울문화재단 서울청년예술단 | 서울문화재단 최초예술지원 | 아르코청년예술가지원 |
●3인 이상으로 이루어진 단체 | ●개인 | ●개인 |
●20-35세 | ●39세 이하 예술인 ●데뷔 10년 이하 예술인 ** 위의 두 요건 중 하나에 해당하는 자 |
●만 39세 이하 |
●지원 년도 3월 기준 학부생, 휴학생이 아닌 자 ●증빙 가능한 예술 활동 경력을 가진 자 ●지원년도 여타 예술 지원사업의 수혜를 받지 않은 자 |
●공공지원금 수혜 경험이 없는 자 | ●지원신청일 기준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정책사업 수혜를 받지 않은 청년 예술가 ●초중고, 대학교 재학생이 아닌 자 ●분야마다 다르나 지난 5년간 작품 발표 경력이 있어야 함 |
●최대 5천만 원 | ●최대 2천만 원 | ●최대 2천만 원? |
●전문 예술인으로 활동하고자 하나 기회가 부족하여 경력을 쌓지 못하고 공공지원에서조차 소외되고 있는 청년 예술인들에게 예술 창작 및 공공활동 기회를 제공하여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고자 함 | ●공공지원금 수혜경험이 없는 청년 예술인의 예술계 진입장벽을 해소하여 다양한 예술 활동 기회를 제공하고 창작을 위한 새로운 실험과 도전이 가능한 환경을 제공함 | ●예술의 다양성 확보, 일자리 창출 및 안정적 예술현장 진입을 위한 ... 청년 예술가 지원 ●국가적 창의성 제고와 사회적 통합에 기여하는 예술의 사회•경제적 가치 확대를 위하여 청년 예술가의 창작활동 기회를 확대하고, 예술현장에 대한 진입장벽 해소 ●청년 예술가의 창작 역량 강화 및 예술현장 일자리 창출 기반 마련 |
세 사업 모두 창작 활동의 기회를 확대하고 예술현장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어 경력을 쌓을 기회를 만들어주어 청년 예술가의 창작 역량을 강화한다는 유사한 기조를 공유하고 있다. 《최초예술지원》 사업의 경우 데뷔 10년 이하라는 조건을 하나 더 두어 지원대상의 범위를 다른 사업보다 넓혀두긴 했지만 모든 사업이 적게는 35세에서 많게는 39세까지로 연령의 제한을 공통으로 두고 있다. 또 공공지원금 수혜 경력이 아예 없거나 제시한 기간에 수혜를 받은 이력이 없어야 하고 예술 활동 경력을 증빙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지원사업의 목적과 자격조건은 그 자체로는 문제없어 보인다. 예술 활동 기회가 부족해서, 경력을 쌓을 수 없어서, 예술계 진입 장벽이 너무 높아서, 공공지원 수혜의 대상도 되지 못하여 등등 서로 얽혀 있는 다양한 원인으로 난관에 봉착해 있는 청년 예술인을 돕겠다는 지원사업의 취지는 얼핏 보기에 적절한 지원사업처럼 여겨진다. 또 국가의 한정된 자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정책사업이기에 자원은 어쩔 수 없이 한정된 대상에게만 배분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행정편의를 위해 우리 사회에서 청년이라는 집단을 구분할 때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연령 제한의 방식을 해당 사업의 자격조건 제한 방식으로 차용한 것 역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모를 통해 수혜 대상을 선정하는 정책사업의 진행방식은 분명한 한계를 가진다. 이와 같은 형식의 정책사업은 경쟁을 통과한 한정된 집단에 배타적으로 예산을 배분하는 것이기에 필연적으로 형평성의 문제에 있어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상 집단이 겪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한다. 경쟁적 공모의 방식이 분배의 형평성 문제에 있어 갈등을 불러일으켰던 가장 최근의 사례로 얼마 전 실시된 문체부의 공공미술 프로젝트 사업을 들 수 있겠다. 코로나-19로 예술관련 행사가 연달아 취소되고 관련 기관이 폐관하게 되면서 직접적인 피해를 본 대표적인 예술분야는 공연예술 분야였다. 그렇지만 문학 분야처럼 예술작품 제작 과정의 특수성으로 인해 피해가 바로 드러나지 않는 분야도 있었다. 문학 작가들은 사례를 수집하기 위해 사람들을 인터뷰하거나 대면할 일이 빈번한데, 코로나-19로 많은 작가가 올해 이 과정을 포기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피해는 올해 즉각 나타나지 않고 내년 혹은 내후년이 되어서야 나타날 것이다. 반면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지원 대상이었던 미술가들은 코로나-19로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예술가 그룹에 속한다. 이는 문체부가 내놓은 지원정책이라는 것이 분야별 피해상황에 대한 조사도 없었고, 당연히 특수성을 고려한 대책도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형평성의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지원 방식은 당연히 문체부의 신뢰도를 떨어뜨릴 뿐 아니라 예술인이 서로를 반목하게 하는 여지를 만든다.
청년 예술인을 대상으로 한 정책사업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드러난다. 교육통계서비스의 2020년 조사에 따르면 해당 년도에 순수미술(미술과 조형) 대학을 졸업한 졸업자만 2,480명이고, 연극⦁영상대학 졸업자는 2,217명이다. 서울문화재단의 두 청년예술지원 사업은 2017년 한해에만 700여 건을 선정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20년 《아르코청년예술가지원》 사업의 경우 시각예술 분야에서 16팀, 문학 분야에서 7팀, 공연예술 분야에서는 31팀이 선정되었다. 예술대학을 졸업한 모든 이들이 예술 활동을 이어나가지는 않겠지만 청년 예술가를 대상으로 한 공모사업의 수혜대상이 턱없이 부족한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청년 예술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지원사업에 선정이 되건 안 되건 쉽사리 해결할 수 없었던 생계의 문제와 그로 인한 막막함, 그리고 죽거나 다른 일을 찾아 떠나는 동료 예술인을 지켜보았다는 신지연 작가의 서글픈 자기 고백은²⁾ 청년 예술인을 대상으로 한 현재의 정책사업이 청년 예술인이 직면한 문제의 본질을 짚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청년 예술인들이 예술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고, 예술 활동을 이어가지 못해 경력을 쌓지 못하고 있고, 이렇다 할 경력이 없어 다음 단계로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공적지원의 대상에서 탈락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이다. <2018 예술인 실태조사>를 살펴보면 실태조사를 하기 전 1년간 예술인이 예술 활동으로 벌어들인 개인 수입은 평균 1,281만 원이었다. 더 심각한 것은 예술 활동으로 벌어들인 수입이 ‘없다’는 응답이 28.8%나 되었고, ‘5백만 원 미만’이 27.4%, ‘1~2천만 원 미만’도 13.2%나 되었다는 것이다.
해당 실태조사가 예술인복지재단의 예술활동증명 신청을 완료한 예술인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업 수혜 예술인, 문화예술 관련 협회⦁단체 회원 등 이미 신진 예술인의 단계를 벗어난 예술인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평균 소득은 더욱 낮아질 가능성도 있다.
이런 탓에 대부분의 예술인은 겸업을 하면서 막막한 생계를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다가(주로 그 고비가 40세 전후다) 더는 예술 활동을 이어갈 방안이 없게 될 때 떠밀리듯 예술계를 떠난다.³⁾ 떠나지 않고 남은 예술인들은 상위에 랭크되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청년 예술인 시절부터 맞닥뜨려왔던 생계를 고민하며 여전히 고달픈 삶을 이어나간다. 어느 시기를 넘기게 되면 이직도 어려워 몇몇은 그렇게 전전긍긍 살아가다 죽는다. 경제적 문제는 청년 예술인 시절부터 시작되어 평생 이어진다. 60세 이상 예술인의 평균수입이 859.8만 원으로 집계되었고, 전체 60세 이상 예술인의 44.1%가 ‘예술 활동 수입이 전혀 없다’는 <2018년 예술인 실태조사>의 결과는 끝까지 끈질기게 버텼지만 예술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난하고 서글픈 노후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유사한 정책사업을 반복해서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예술인을 위한 정책사업을 검색하다보면 연령을 기준으로 한 정책사업이 청년층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중장년의 예술인은 물론이고 원로 예술인을 대상으로도 시행되고 있는 것을 쉽게 찾을 수 있다.⁵⁾ 어디 이뿐일까? 그간 문체부는 예술인에게 직업(2005년 국악강사풀제로부터 출발한 학교예술강사 지원사업)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또 예술인이 경력을 형성하고 관리할 수 있는 지원방안에 대한 연구(한국문화관광연구원, <미술작가 커리어형성 및 관리 지원방안 연구>, 2015)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정책사업과 연구는 예술인이 겪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못할뿐더러 예술인은 자립이 불가능한 존재라는 인식을 오히려 강화한다. 더군다나 예술인의 자립 불가능은 구조적인 문제이지만 그것을 예술인 개인의 무능으로 돌리며 왜 국가가 그들에게 국민의 세금으로 그들을 먹여 살리느냐는 일반인들의 오해도 불식시키지 못한다. 청년 예술인을 대상으로 한 지원이든 어떤 지원이든 지원사업은 기본적으로 일회성의 성격을 띠고 있어 청년 예술인이 예술 활동을 지속할 수 없는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격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또 예술노동
이 지점에서 예술노동이라는 이제는 빛이 바랜 것만 같은 그 의제를 우리 사회는 물론이고 예술인 스스로도 복기할 필요가 있겠다. 어떤 활동을 노동 혹은 비노동으로 분류하는 것은 그 활동의 방식과 형태라기보다는 사회적 합의다. 우리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노동은 단일한 형태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매우 다채롭다. 고도의 숙련 기술을 더 요구하는 분야가 있을 수 있고, 육체적인 활동을 더욱 필요로 하는 분야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며, 온종일 사무실에 앉아 서류작업만을 할 것을 요청받는 업종도 있을 것이다. 크리에이터, 콘텐츠 창작자나 기획자나 스타트업계 쪽 직종은 작업 방식에서도 근로자들의 직업적 정체성에서도 예술분야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다.⁶⁾ 예술 분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래의 형식과 유사한 형태의 고용이 등장하기도 했다. 지난 10년 동안 급증한, 초단기계약의 형태를 띠며, 사업주가 불분명한 경우가 대부분인, 불안정한 노동의 대명사인 플랫폼 노동은 예술인이 예술 현장에서 맺어왔던 거래의 형태와 매우 유사하다. 이렇듯 노동의 형식이나 노동의 강도 혹은 직업의 종류로 어떤 것이 노동이다, 노동이 아니다를 단순하게 구분할 수 없음에도 예술계는 이와 같은 기준을 근거로 “예술은 노동이다.”는 의제를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비예술인들은 심지어 예술노동 의제를 예술인들이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왜곡하기도 하였다.
어떤 활동을 노동 혹은 비노동으로 구분하는 분류의 체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노동의 범주(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법적으로 인정받는 노동의 범주)에 포함되는 활동을 하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사회적인 혜택을 더 많이 보장받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더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근로기준법이며, 해당 법체계가 인정하는 노동이나 근로의 형태가 아니면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다. 그녀 혹은 그가 제공한 노동력에 대한 적절한 보상과 각종 사회보장보험 등의 사회적 안전망은 그녀/그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 누리게 되는 구체적인 혜택이다. 예술계가 예술이 노동이 될 수 있느냐 아니냐는 정확한 개념을 다투는 중에 잊어버린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예술=노동”이라는 등식은 법적, 사회적 보호망 안으로 예술인을 포섭해달라는 요구를 간결한 용어로 치환한 것이자 일종의 메타포였던 것이다.
예술 활동을 비노동으로, 예술인을 비노동자 혹은 비근로자로 간주하는 사회적 인식은 예술 현장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를 심화시켜왔고 여전히 그러하다. 먼저 예술 현장에서 예술인을 취약한 위치에 처하게 하여 적절한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만들었다. 우리 중 몇몇이 부정하려고 해도 예술 활동은 온전히 예술가 자신을 위한 사적 유희나 활동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행해지기도 하며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목적에 따른 거래가 지금도 활발하게 예술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예술 활동을 노동권의 문제와 분리하는 사고방식은 이러한 거래과정에서 예술인을 취약하게 만든다. 문화예술노동연대의 제5차 예술노동포럼 <문화예술인들은 왜 노동조합을 결성했나?> 자료집에 의하면 문화예술진흥법상의 문화예술 분야에 포함되어 있고, 예술인복지법상 예술활동증명의 대상인 웹툰작가, 문학 장르에 속하는 어린이⦁청소년 장르의 책을 집필하는 작가, 방송작가 등의 예술인은 현장에서 임금체불, 부당해고를 상시 겪어왔으며, 계약을 체결할 시에 지적재산권 일체 양도 등을 요구받는 등의 부당한 계약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영화제작 현장의 스태프들 역시 턴키 계약으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거나 제작이 무산되는 경우 임금을 지불받지 못하는 경험을 빈번하게 해왔다.⁷⁾
그뿐인가? 예술인은 예술을 직업으로도 근로로도 노동으로도 바라보지 않는 사회적 인식 때문에 작품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연습시간과 준비기간에 대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 법적인 보호를 받는 임노동 범주에 포함되는 근로자들은 연습기간, 준비기간은 물론 휴식과 휴가도 보장받지만 예술분야의 경우 주로 결과물에 대해서만 보상을 해왔다. 예술작품은 보통 기획과 준비(혹은 연습), 생산, 결과물 산출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따르는데, 평범한 직장의 근로자 역시 유사한 과정에 따라 업무를 완수한다. 완성된 결과물과 그것을 공유하는 대상과 발표의 형식만 다를 뿐 업무의 처리 과정에서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전통적인 형식의 노동과 동떨어진 분야라고 여겨왔기 때문에 결과물이 산출되는 과정에 필히 소요되는 시간에 대해서는 논의의 필요성조차 고려되지 않았다.
연습기간과 준비기간에 대해 보상을 해야 한다는 인식 부족은 예술인을 경제적으로 더욱 취약하게 만들어 자립 가능성을 한층 더 저하시킨다. 한 점 혹은 한 편의 작품이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기획의 단계와 제작하는 과정, 타인에게 작품을 공개하는 과정 등에 소요되는 일련의 시간이 필요하다. 당연히 전 과정에 소요되는 매 시간은 예술인의 숙련기술 등 고도의 전문성으로 채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물론 예술 현장 역시 작품을 결과물로만 판단하고 그 결과물에 대해서만 가치를 매겼을 뿐 작품 생산에 필수적인 연습기간과 준비기간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 20일이며, 한 명의 예술인이 1년에 12개의 작품을 완성했다고 가정해보자. 예술인은 휴식시간을 제외하고 1년을 꼬박 작품 창작을 위해 예술 활동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결과물을 발표하는 짧은 순간에만 가치를 매기는 현재의 관행상 예술인의 예술 활동은 1년에 12번, 그것도 작품을 발표할 때 소요되는 1-2 시간 정도로만 공식화된다. 준비 기간 없이는 작품이 만들어질 수 없으므로 예술인은 1년 내내 상시로 작품을 발표할 수 없다. 당연히 창작할 수 있는 작품의 수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예술인이 가난한/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심지어 활동의 내용이 법적으로 보호받는 특정 직업의 그것과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예술’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활동의 가치가 저하되거나 법적 보호망에서 노골적으로 제외되는 경우도 있다. 전국 예술인 강사 제도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한 문화예술인들이 자신들이 가진 숙련기술을 활용해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초⦁중⦁고등학교와 예술인들을 매칭해주는 제도로 한국문화예술진흥위원회가 담당기관인 예술‘지원’정책이다. 연극인, 무용인, 음악인, 미술작가, 만화작가 등 대부분의 문화예술 인력들이 예술강사 제도의 대표적인 ‘수혜대상’이다. 그러나 해당 제도는 예술 활동을 업으로 인정해 그 활동을 통해 경제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근본적인 대책이라기보다는 예술인이 부가적인 활동을 통해 그것을 해결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문제는 사회적 인식을 고려해 예술인을 제도로 편입시키기에 급급했지 예술강사의 제도상 법적 지위의 문제는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예술인 강사의 업무 내용은 정규직 교사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지만 예술강사는 그에 상응하는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2008년 한 예술강사가 예술강사 사업을 주관하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주최한 예술강사 연수 때 사고를 당한 후 산재보험료를 진흥원으로 청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한다. 이 소송에서 대법원은 예술강사의 노동자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은 대법원의 판결을 따라 예술강사의 산재보험료를 지급하는 대신 예술강사 지원사업을 지역문화재단으로 이관하였고, 예술강사들의 수업시수도 제한해버렸다. 예술인 강사의 권익을 보호해야 할 진흥원이 제도 시행의 절차를 변경하여 예술인의 권익을 침해해버린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예술강사들은 하루아침에 최단시간 노동자로 전락했고, 그간 보장받고 있었던 4대 보험과 실업급여 제도 등의 혜택에서도 자연스럽게 제외되었다. 2014년 2월 17일에는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붕괴 참사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게 된 10명 중 한 명이 예술강사였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예술강사는 3월-12월까지 10개월의 계약직으로 고용되어 보통 1,000만 원-2,000만 원 이하의 적은 연봉으로 생활해야 하므로 겨울방학 동안 생계를 위해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야 한다. 리조트 사고의 희생자였던 고 최정운 역시 같은 이유로 아르바이트를 하다 참변을 당했다. 매년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것을 말할 것도 없고, 단기 계약직이라 퇴직금은 당연히 생각할 수 없다. 강사직을 도서산간 지역으로 배정받았을 경우 교통비, 숙박비도 개인 돈으로 지출하며 강의를 다녀야 할 정도이다. 예술인 강사제도가 시행된 지 15년이나 흘렀으나 강사료는 그간 딱 한 번 인상되었다. 물가인상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강사료가 삭감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이 정도면 예술인에게 질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줬다기보다 직업을 이르는 명칭을 예술로 바꾸거나 그 명칭에 예술을 덧붙이고 예술인의 전문적인 기술과 능력을 값싸게 전유 혹은 착취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예술인고용보험 특례법을 필두로 하여 전국민 고용보험의 초석이 놓였다. 전국민 고용보험의 요지는 소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있게끔 하여 실직 시 받을 경제적 어려움을 완화하는 사회적 안전망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소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라는 표현은 사업주와의 종속 관계를 명확하게 입증할 수 있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사람만을 법이 보호해야 할 근로자로 간주해왔던 전통적인(혹은 보수적인) 근로의 개념에서 탈피하겠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거대한 전환이다. 예술계 역시 사회의 변화에 발맞추어 경직된 사고관에서 탈피해나갈 필요가 있다.
예술지원 정책의 목표와 방향 재설계로 '청년예술'의 자연스러운 폐기를 유도해야
앞서 살펴본 예술계 내부의 구조적인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예술인을 위한다는 정책사업이 아무리 많이 실시된다고 해도, 그 어떤 정책사업이라도 지엽적인 문제를 일시적으로 해결하는 미봉책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동료 예술인을 밟고 올라서야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잔혹한 지원정책이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다. 예술인을 위한 정책사업은 지금보다는 다각적인 목표와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청년예술’ 역시 자연스럽게 폐기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예술인에 대한 지원을 시혜적인 복지의 관점에서 탈피해 예술인이 누려야 할 권리가 무엇인지 알리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이것이 예술현장에 적용될 수 있게끔 하는 정책사업을 설계하고 실시해야 한다. 현재 예술 현장에서 첨예한 쟁점은 예술인의 활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의 문제로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예술가가 누려야 하는 총체적인 권리란 비단 정당한 보상에 한정되지 않는다. 자신의 활동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누릴 권리는 권리의 집합체에 포함되는 일부일 뿐이다. 권리의 집합체에는 정당한 보상을 보장받을 권리를 포함하여 자신만의 예술 활동을 이어 나가는 과정에 있어 안전을 보장받을 권리, 자신의 활동에 대한 보상을 통해 예상치 못한 위험 등을 대비할 수 있도록 하여 더욱 안정적인 미래를 설계해 나갈 권리까지 포함한다. 예술인이 예술 활동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집합적인 권리가 필요하지만 지금까지 예술인을 대상으로 한 정책은 정작 그 문제는 방치해두고(혹은 예술가들이 스스로 해결하도록 떠넘겨버렸거나) 그저 결과물만 만들어낼 수 있도록 약간의 도움만 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여겨왔던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예술인이 입은 피해는 청년 예술가가 겪고 있는, 그리고 청년시기를 지나 중년의 시기를 지나 은퇴를 앞둔 그가 여전히 겪고 있을지도 모를 생계의 막막함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코로나-19로 인한 예술계의 피해는 정책의 영역이 그간 예술인의 권리를 방치해둬서 생긴 결과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며, 이런 권리의 보장이 얼마나 절실한지, 이런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주체의 삶이 얼마나 피폐해질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런 권리들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예술가가 예술가로서 자립할 가능성은 현재보다 현격히 높아질 것이다.
그리고 정책사업을 위해 얻고자 하는 목표는 최소화하고 지원사업과 용역사업은 분리할 필요가 있다. ‘청년예술 정책의 목적이 예술가의 복지를 위한 것인지, 성장을 위한 것인지, 일자리를 장려하기 위한 것인지 헷갈렸’으며, ‘예술정책의 목적은 정확해야 하며 오해가 없어야 한다’는 정진세 필자의 말로 어림짐작할 수 있듯, 현재의 정책사업은 하나의 사업으로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한다. 한정된 예산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려는 정부의 방침일 것이지만 하나의 정책사업으로 인한 다층의 효과는 주요 목표가 온전히 실현된 후 그 영향으로 얻을지도 모를 긍정적인 효과이지 예측 가능한 효과일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문체부도, 예술인 스스로도, 지자체도 그리고 전체 우리 사회도 정책사업이 자립 불가능한 예술인을 구제하는 시혜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책사업 중 폐교, 폐건물 혹은 인구가 줄어들어 낙후되고 있거나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된 지역을 재활성화하기 위한 사업이나, 국민의 문화 향수권을 충족시키는 사업은 국가나 지자체가 사회적 문제를 예술의 방식으로 해결하기 위해, 즉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기획하는 사업이다. 이와 같은 정책사업들은 지원사업이 아닌 용역사업으로 불러야 마땅하며 당연히 그에 합당한 보상도 예술인에게 지급해야 한다.
위의 해결책들은 예술분야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방책들이다. 청년 예술인은 사각지대에 방치되어왔던 대표적인 그룹이다. 정책의 개선으로 사각지대가 차차 사라진다면 자연스럽게 지금 우리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 ‘청년예술’은 폐기될 수 있을 것이다.
오경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에서 민중미술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한 논문으로 전문사학위를 취득했고,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T정책전문대학원 디지털문화정책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을 쓰고 있다. 예술인의 노동권 향상을 위해 문화예술노동연대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문화정책, 페미니즘 미술비평과 페미니즘 과학기술론에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1) 문화체육관광부(2018), 『2018 예술인 실태조사 보고서』 26쪽.
2) 신지연(2020), 나는 청년예술인이었다, 웹진 『숨은참조』, 서울청년예술인회의.
3) 동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42.6%에 달하는 예술인이 예술 활동 외에 겸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고, 겸업 예술인의 73.6%가 ‘낮은 소득’(46.5%)과 ‘불규칙한 소득(27.1%)으로 예술 활동에 전념하고 있지 못하다고 하였다. 위의 보고서, 21쪽.
4) 위의 보고서, 86쪽. 『예술인』(2019), Vol. 35, 한국예술인복지재단. http://news.kawf.kr/?searchVol=35&subPage=02&searchCate=11&page=&idx=549
5) 현재 한국예술인복지재단, 강원문화재단, 인천문화재단, 대구문화재단, 제주문화예술재단, 울산문화재단, 대전문화재단이 원로예술인을 대상으로 한 지원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위의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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