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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숨은참조'/읽는다

[읽는다] 연구스위치|(2차) 예술과 사회 : 블랙리스트의 작동방식에 따른 자기검열 구조 파악 ✍신민준(불나방 기획)

by 서울청년예술인회의 2022. 3. 15.

예술가에게 검열은 어떻게 일상이 되는가?

: <프린지 블랙리스트를 말하다 2 : 친애하는 자유에게>,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넘어서 사유하기

신민준

시각 예술가·문화운동가

 

Chapter 3 : 검열의 이후 : 징후들

#지원사업#블랙리스트작동구조#예술가자기검열

올해 8, 독립예술 축제인 서울프린지페스티벌 2021과 함께 기획전시 <프린지 블랙리스트를 말하다2 : 친애하는 자유에게>가 개회하였다. 2회를 맞는 이 전시는 현재의 시점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짚어보고, 공론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1회가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객관적으로 사건으로서 블랙리스트를 보여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면, 2회는 아카이브와 함께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사건으로서 블랙리스트를 넘어 사회에 내재해 있는 블랙리스트의 작동 기제자체에 질문을 던지는 확장을 의도하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전시에는 권은비, 김성균, 한받, 노순택, 허위(계원예술대 내 블랙리스트를 고민하는 모임)이 참여하였고 나 또한 참여를 제안 받았다. 아마 내가 활동가로서 블랙리스트에 대응해온 한편, 작업으로서 예술계의 구조와 예술가의 고민에 대해 질문하는 예술적 시리즈를 해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건상 기존의 작품을 출품할까 고민하였으나, 기획의도에 맞는 작품을 제작하고 싶어서 조금은 무리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다. 작품을 제작하고 전시에 참여하는 과정은 그동안 블랙리스트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정리해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 글은 블랙리스트와 검열에 대한 개인의 고찰과 고민을, 전시를 위해 제작한 <예술적 프레임워크 #1>와 함께 논해보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lt; 프린지 블랙리스트를 말하다&nbsp; 2 :&nbsp; 친애하는 자유에게 &gt;

자기 검열로부터 블랙리스트를 찾는 것을 시작하기

돌이켜보면 예술가 외에도 활동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와 관련된 활동을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종종 해왔다. 대학 시절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서 블랙리스트의 실행자로 지목된 학교 교수에 대해 비판하는 대자보를 냈었고 16년에는 다른 예술계열 학생들과 함께 블랙리스트를 비판하며 광장에 섰으며, 이때 만들어진 학생단체가 이어지고 이어져서 지금까지 소속되어 활동을 해오고 있다. 이후에는 블랙리스트 실행자가 총장으로 임명된 예술학교에 연대활동을 갔었다. 특히, 마지막은 5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블랙리스트 총장을 반대하는 침묵집회를 상황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임명식을 강행하며 그 임명식에 국회의원, 시장, 타 학교 총장 등 저명인사가 축사 발언을 하는 모습이 너무 강렬해서 나에게 그 이전과 같은 삶이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라는 각인을 심어준 사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블랙리스트와 관련된 활동을 하면서 예술계에서 당사자들은, 특히 나와 비슷한 동 세대들은 블랙리스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의문을 가진 적이 많았음을 고백한다. 문화·예술 정책에서는 그동안의 정책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증거로서 미투와 함께 블랙리스트를 빠짐없이 언급하고 이번 정부의 문화예술 분야 국정과제 1호로도 블랙리스트 청산을 꼽았지만, 정말로 예술인 당사자들이 이 문제를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하는지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왜 지원 사업과 비교하면 블랙리스트 문제는 당사자의 관심이 덜할까? 그래서 궁금해서 친구에게 블랙리스트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보았다. 친구는 블랙리스트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명단에 오른 사람들은 불쌍하다. 하지만 나와 관련된 일은 아닌 것 같다. 당사자성이 떨어진다라고 답변해주었다. 나는 슬프게도 친구의 답변이 블랙리스트에 관한 보편적인 인식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블랙리스트의 현재성을 묻는 전시에서 나의 작업을 위한 질문과 전제는 사회적으로 중대한 문제로 지목받는 사건당사자성을 느낄 수 없는 사건을 이을 수 있는 연결고리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에서 출발하려고 했다. 내가 찾은 연결고리는 자기 검열이였다.

&lt; 계원예술대학교 블랙리스트 총장 비상대책위원회 활동 &gt;

예술 활동의 길목마다 내재한 검열로서 자기 검열

사전적인 검열의 정의는 공권력이 주체가 되어 어떤 내용의 표현이나 공개를 통제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런데 사실 나와 비슷한 세대들은 제도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의 시기를 살고 있기 때문에 이전 세대들처럼 직접 자신에게 피해가 돌아오는 공권력의 검열을 겪은 경험들은 별로 없었다.¹⁾ 최근의 블랙리스트 역시 직접 겪은 일이 아니다. 우리보다 이전 세대는 국가보안법, 출판물허가제, 금지곡 등 자신의 예술 활동과 관련된 직접적인 검열을 겪어왔지만, 우리 세대는 이런 수준의 검열은 겪어본 적이 없으며 이 정도의 표현의 자유는 보편적인 전제조건으로 합의하고 있다. 어찌 보면 그만큼 사회의 인식이 높아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²⁾ 하지만 개인이 성장하며 예술가가 되고 활동하는 과정의 길목에서 검열이 온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검열은 공권력에 의한 직접적인 방식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고찰로는 검열이 작동하는 기제 중, 가장 근본에 개인이 부과받게 되는 책임이라는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임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타자로부터 부과받는 것이기도 하지만, 삶을 꾸려나가는 주체로서 자신에게 스스로 부과하는 것이기도 한, 양면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활동을 통해 스스로 삶을 영위하여야 하는 존재다. 과거 검열이 무서웠던 것은 공권력이 가하는 물리적 폭력도 있겠지만, 검열이라는 낙인 이후에 발생하는 부수적인 피해들로 자신의 삶과 관계된 사람들의 삶까지 책임을 질 수 없는 상황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책임을 지기 위한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가 상실되는 것이 큰 공포였으리라 추측한다. 삶의 영위와 관련된 책임은 인간사가 끝나지 않는 한 지속될 수밖에 없는 영원한 숙제다. 한편, 오늘날에는 혐오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하여야 하는가?“로 대두되는 윤리적 책임과 매체의 검열에 대한 문제까지 더해지며 논쟁을 발생시킨다. 혐오에 대한 표현의 자유 문제와 검열은 쟁점들이 있어 단선적 대안들을 찾기 어렵고 개개인이나 공동체의 성숙한 책임을 요구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특징이 있다. 이를 통해 고찰할 수 있는 것이 책임과 검열의 관계다. 책임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요구받는 주요한 덕목이며, 개인의 삶에서 행동을 조정하는 가치 체계라는 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검열의 작동 기제 중 하나이자 딜레마이다. 우리의 일상이 검열과 그리 멀지 않다는 표지석이기도 할 것이다.

자기 검열의 사전적 정의는 아무도 강제하지 않지만, 위협을 피할 목적 또는 타인의 감정이 상하지 않게 할 목적으로 자기 자신의 표현을 스스로 검열하는 행위를 말한다. 과거에는 권력의 공포통치 때문에 검열이 일상화되고 내면화되어 자기 검열을 발생시켰다. 한편, 오늘날은 제도적 민주화를 이루었기에 과거처럼 직접적인 통제수단을 통해 검열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검열의 기저에 있는 책임은 인간사가 발전하더라도 사라질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에 자기 검열로부터 이어진 검열은 늘 상 작동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사회에서 한 개인이 성장하고 예술가로 활동하며,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하는 것 즉,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한 과정들을 고찰해보자. 교육과정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려 주제나 표현 방식을 바꾸지는 않는가?, 관계 때문에 옳지 못한 것을 알면서도 이에 대해 말하지 않고 삼키지는 않는가?, 예술계의 위계 속에서 개인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는 않는가? 예술 활동을 위한 지원사업을 작성하면서 선정을 위해 내 생각과는 다른 것들을 쓰지는 않는가?

개인이 태어나 성장하여 예술가가 되고 활동하는 과정의 길목마다 검열은 자기 검열이라는 형태로 내재되어 있다. <예술적 프레임워크 #1>는 책임이라는 전제 아래서 예술가들이 겪게 되는 다양한 자기 검열을 포함한 검열의 순간들을 표현하고 있다.

&lt;예술적 프레임워크#1&gt;, 65*65*30cm, Iron plate&middot;bulb, 2021

자기 검열과 블랙리스트의 관계

그렇다면, 책임이라는 기제로부터 발생하여 일상에서 떼놓을 수 없는 자기 검열블랙리스트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기 검열은 공권력이 수행하는 블랙리스트의 결과이자 원인이기도 하며, 명확한 실행 주체가 없는 블랙리스트를 가능하게 만든다.

앞서 논한 것처럼 예술가의 삶의 자율성과 존엄을 침해하는 블랙리스트는 그 자체가 자기 검열의 기제로 작동한다. 이전 정부의 블랙리스트는 과거 유신 정권의 직접적인 규제나 탄압과는 다를지라도³⁾ 오늘날 예술가의 활동과 생계에 영향을 미치는 지원사업을 볼모로 작동했고 이 때문에 블랙리스트가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을 때, 예술가들은 하고 싶은 말들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검열에 의해 자기 검열이 작동한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자기 검열은 블랙리스트의 결과이자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미셸 푸코의 권력에 대한 고찰은 특정한 정권과 관련되지 않은 블랙리스트를 통찰할 수 있게 해준다. 푸코는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국가 통치방식이 변화해온 변천을 논했는데, 이에 따르면 오늘날의 현대 국가 권력은 과거의 <주권적 권력>에서 <규율적 권력> 그리고 <관리적 권력>으로 이동해왔다. <주권적 권력>은 권력에 대한 복종이 최대 관심이자 목표로 법 제도를 근간에 두고 사법적, 행정적 수단을 행사하며 이는 국민에게 강제적으로 부과된다. 반면 <규율적 권력>은 강제적 동원이나 맹목적 복종을 요구하기보다는 국민을 통치하고 이들을 관리하며 질서와 규율에 맞게 훈련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관리적 권력>은 앞선 두 권력과 다르게 강제적으로 통치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주체 자체에 관심을 갖고 이들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제시해주며 개개인의 가치 체계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이들이 수행해야 할 역할과 책임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든다.

유형 시기 내용
<주권적 권력>
행사 유형
군주제
국가
- ‘주권에 대한 복종이 최대 관심이자 목표
- 권력 행사 수단 : 제도를 통한 공권력 즉, 사법 및 행정력
<규율적 권력>
행사 유형
근대국가 - 권력의 그 자체의 행사보다 개인을 통한권력 행사에 더 큰 관심
- 권력에 대해 강제적 동원이나 맹목적 복종을 요구하기보다 국민을 통치하기 위해 이들을 훈련시키고 신체를 단련하는데 초점
- 규율 권력을 위한 주요 수단 : 학교, 병원, 공장, 작업장
<관리적 권력>
행사 유형
현대국가 - 다른 권력보다 주체즉 개인에게 보다 큰 관심을 가짐
- 현대 사회가 국가나 자본에 의해 수동적으로 조작되거나 동원되는 국민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개개인들의 활동으로 움직인다는 인식 기반
- 국민 개개인의 가치관과 행위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스스로 수행해야 할 역할과 책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전략 구사

[] 푸코의 권력 행사 유형 정리

이를 바탕으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고찰해본다면 <주권적 권력>의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권에 비판적인 예술인들을 통제 및 억압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블랙리스트를 시행한 관료들이 블랙리스트를 블랙리스트라고 부르지 않고 실무를 수행하기 위한 조직을 <건전 콘텐츠 활성화 TF>라고 이름 붙였다는 점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지만, 공공기금 지원에서는 사회적 논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는 예술 작품은 배제할 수 있다고 주장한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블랙리스트가 밝혀졌을 때, 이들의 논리는 공공성을 이유로 정당한 배제를 했다는 것인데 이 가치는 예술 지원 정책과 관련하여 보편적으로 등장하는 논의나 예술의 지원 근거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앞선 주장은 오늘날의 검열이 <주권적 권력>을 넘어 <규율적 권력><관리적 권력>의 속성을 통해 가동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표다. 두 가지 권력은 권력자체가 주체가 되어 행사되기보다는 개인을 통해 행사되며, 이를 위한 개인에 대한 교육이나 정책 등의 사회제도가 마련된다. 제도에는 권력이 지향하는 가치가 내재하여 있다. 관련 자료들을 읽어보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시행자들은 이를 일종의 정책으로 사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블랙리스트에 대해서 공공성의 가치를 내세웠다. ‘공공성은 분명 긍정적 가치이며, 공공정책이 지향하는 주요 가치이지만, 면밀하게 살펴보면 실체적 가치를 가지고 있기보다는 때로는 텅 빈 기표와 같아서 그 자체로서 어떠한 방향을 제시하기 어려운 특징을 난점으로 가지고 있다. 빈 기표에는 다양한 가치들을 채워 넣을 수 있다. 이전 정부의 공공성은 국가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건전성을 의미하였기에 이를 공공정책에 채워 넣은 것이다.

이처럼 제도에는 언제나 권력이 지향하는 가치들이 내재될 수 있다. 이 권력이 지향하는 가치들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강력한 무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경제적 효과 창출’, ‘사회적 가치 창출⁴⁾, ‘지역재생등의 가치와 같은 것들이 그 예이다. 그리고 이 제도가 <규율적 권력>, <관리적 권력>으로 작동한다. 결국, ‘국가 이데올로기에 부합 여부를 준거로 예술 활동을 선정·배제하는 것은 언제든, ‘다른 가치 기준을 준거로 하여 예술가 개개인에 대한 선정· 배제로 바꾸어 나타날 수 있다. 이 때문에 권력에 의한 검열은 물리적인 공권력이 아니더라도, 자기 검열이라는 형태로 예술가의 일상에서 존재할 수 있다. 활동에서 공적 지원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예술가들에게 늘 자기를 검열할 수 있는 상황이 사회 구조 속에 내재한다고 할 수 있겠다. 선별이 그 주요 속성인 예술지원 사업에서 <규율적·관리적 권력>은 언제나 자기 검열이라는 형태로 예술가의 주체성을 침해하는 검열을 수행할 것이다. 이는 선별을 전제로 한 지원 사업의 딜레마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본다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역시, ‘사건을 넘어 블랙리스트가 작동할 수 있는 현 예술정책의 한계가 문제점으로 지목된다.

예술계의 검열을 말하는 <예술적 프레임워크 #1> 작업이, 사건으로서 블랙리스트 외에도 지원 사업을 주요한 소재로 하여 이와 관련된 고민들이나 질문들을 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회와 제도 속, 고민하는 존재로서 예술가

장황한 이야기들을 했지만, 나 역시 제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나도 예술 교육을 받고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숨긴 적이 많고, 지원사업을 작성하고 선정을 위해 자기 검열을 하고 지원서를 그럴듯하게 작성하고자 노력한다.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지원사업의 목록을 공유해주는 사이트나 커뮤니티를 자주 뒤적거린다. 지원 사업에 떨어지면 슬퍼하고 선정되면 기쁨을 느낀다.

그럼에도 지원사업이 정답은 아니라는 생각이 계속 든다. 앞서 말한 예술정책으로서 지원사업의 선별이 가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선별을 조금 더 개인적인 차원에서 바라보자면, 지원 사업이 내포할 수밖에 없는 이 요소는 나에게 개인을 평가한다는 감각으로 이어진다. 평소에는 생각을 남들 앞에서 곧잘 이야기하는 편이지만, 지원사업 앞에서는 나를 적나라하게 평가한다는 감각이 서류부터 면접까지 계속 느껴져서 문장에 잘 써지지 않아 위축되고 심사가 있는 날은 속이 너무 쓰려서 밥도 잘 먹지 못한다. 지원서를 잘 작성하는 법과 선정되기 위한 노하우를 알려주는 강연들에 대해서 일정 부분 필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기술적인 접근만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서 불편한 마음이 한편에 남는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은 이게 지속가능한 삶일까?“를 계속 고민하게 만든다.

제도 속에서 고민하는 존재로서의 삶은 나의 예술적 시리즈에서 계속 고민해왔던 모티프이기도 하다. 예술적 시리즈는 일종의 말장난으로, 전혀 예술적이지 않은 알고리즘이나 프레임워크를 차용하여 정책이나 대중이 잘 주목하지 않는 예술 작품, 이면에 있는 예술의 과정과 예술가의 고민을 드러내는 작업들이다. 작업에 담긴 구체적인 질문들은 내가 예술가로서 고민했던 것이고 활동가로서 정책을 마주하면서 계속 고심했던 문제들이다. 이 작업은 활동가이자 예술가인 동시적 정체성이 담겨 있다.

전시를 위해 새로 제작한 <예술적 프레임워크 #1>도 예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회와 제도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조건 속에서, 검열이 얼마나 우리의 가까이에 있는지를 밝힐 수 있게 이와 관련된 다양한 예술가의 상황들을 담고 있다. 예술적 시리즈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 루프적 성격을 가지도록 구성되어 있는데, 제도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고 개인의 고민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lt;&ldquo; 예술적 &rdquo;&nbsp; 시리즈 &gt;

한편, 이 작업은 스스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동시대 예술의 테제이기도 한 공론을 이끌 수 있는 예술에 대한 고민의 결과 값이기도 하다는 점을 이야기해야겠다. 비판철학에서는 공론()이 일상과 제도를 연결하고 매개함으로써, 사회를 바꿀 가능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⁵⁾ 나는 작업을 통해 예술가로서 개인의 고민이자 타인들도 공감할 수 있는 질문들을 던짐으로써 우리를 감싸는 구조들을 고찰해보자고 말을 건네는 셈이다. 이 시리즈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관람자가 계속 고민하는 상황에 놓이게끔 유도한다는 것인데,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고민이 우리가 더 나은 삶과 사회로 향해가는 과정에 위치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냉소가 아닌 고민은 변화를 위한 전초다.

예술가로서 활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의와 타의의 검열의 순간들은 개인에게 고민이 들게 하지만, 그 고민들을 멀리 떨어져서 다시 한 번 사회적 조건 속에 입체적으로 사유함으로써 더 나은 방향들을 고찰할 수 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고민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많은 예술가들에게 블랙리스트가 과거의 정치적 사건으로만 인식되지 않고, 작업이 이야기하는 바처럼, 검열이 예술과 제도의 관계 속 본질적 딜레마라고 인식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고민이 공론으로 이어지고, 공론이 다중의 지성으로 이어져, 제도의 본질적 한계로서 선별과 배제에 대한 대안들을 과정 속에서 찾았으면 한다. 어찌 됐든 완벽한 제도는 만들어질 수 없기에 더 나은 것들은 고민과 실천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글의 출발점이었던 <프린지 블랙리스트를 말하다 2 : 친애하는 자유에게>가 예술계를 넘어 사회 전반에서 가질 수 있는 의미를 고찰해보며 글을 마무리해보려 한다. 전시를 보러와 준 예술가가 아닌 친구들에게 전시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현장에서 나오는 대로 한 말이기도 하지만, 이후에 스스로 곱씹고 있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 역시 블랙리스트를 재고찰해볼 수 있는 시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의 의미는 그 자체가 가진 고유한 가치도 있지만, 인류적으로 보았을 때는 인간의 자유로운 표현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블랙리스트는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기도 하지만, 블랙리스트가 지칭하는 핵심 텍스트 중 하나는 권력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억압이다. 오늘날의 권력은 정치권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 위계, 젠더 등의 다양한 권력을 포괄하므로, 블랙리스트에 대한 고찰은 궁극적으로 억압 즉, 타자의 권력에 의해 소외당하지 않고 내가 고유성을 가진 존재로서 얼마나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지, 얼마나 존재 자체로 긍정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사회의 인식 및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사유를 확장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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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로서의 보론 : 청년예술과 블랙리스트

본론은 끝났지만, 보론을 통해 다소 층위가 다른 논의가 될지라도 활동가의 관점에서 블랙리스트에 더 집중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겠다. 발생한 블랙리스트는 고민을 넘어서서 해결이 필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청년(예술) 정책이 가진 가장 큰 의미는 청년을 대상으로 한 지원사업의 가짓수를 늘리는 것보다 결정권을 가진 주체로서 청년들을 전제하고 적극 호출 하는 데 있다. 기존에는 정책의 수혜 대상에 불과했던 사람들에게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발언권과 결정권을 주는 것이자, 자신의 삶의 조건을 타자가 결정하게 두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이후, 문화예술계 전반에 거버넌스가 급증한 이유도 청년(예술) 정책 거버넌스를 형성한 이유와 다르지 않다. 기존의 관료적 정책 추진체계에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정치적 사건을 넘어 기존 문화정책의 한계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사례로 보아야 한다. 이 지점에서 청년예술 정책은 블랙리스트가 명확하게 보여준 예술정책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동일한 시도로서 독해할 수도 있다.

한편, 이러한 흐름은 정치와 행정 즉, 정책의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시민을 복원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주권이 모든 시민에게 존재한다는 인식을 전제로 하지만, 대의민주주의에서는 의회나 행정부가 권력을 위임받은 기관임에도 오히려 이들을 중심으로 권력이 전유되고, 시민이 소외당하는 것이 한계점으로 지적받는다. 결국 청년(예술) 정책을 포함한 거버넌스는 직접 참여를 통해 민주주의를 복원하려는 기획이기도 하다.

블랙리스트 이후의 과제들과 청년예술이 지향하는 바가 동일한 것이라면 청년예술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블랙리스트에 대해 재고찰하고 당사자성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특정한 사람들과 관련된 사건으로만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한국사회가 만들어온 근현대의 질곡과 이 때문인 정치혐오와도 관련이 있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블랙리스트는 본질적으로 우리의 삶과 관련이 있는 현 예술정책의 한계가 원인이다. 그렇기에 양당정치 속에서 정권에 따라 달라질 뿐이라는 냉소적인 화이트 리스트”·“블랙리스트로서 인식을 넘어 중대한 국가 범죄로서, 독일의 나치와 홀로코스트 사례처럼 어두운 역사이자 과오로서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기억하고, 블랙리스트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도록 보편적인 사회적 합의와 인식을 도출해야 한다. 가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처벌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채 국가적 범죄를 정쟁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며 현장으로 복귀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다.

&lt;2021&nbsp;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책임자 처벌 릴레이 시위&gt;⁶⁾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방지와 성폭력 방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예술인권리보장법>2017년부터 논의되었으나, 2021년 이번 정부 임기 말에서야 겨우 통과되었고, 최근에는 국회에서 2022년 문화 예산을 편성하는 과정에서 야당의 반대로 <블랙리스트 사회적 기억 사업> 예산이 전액 삭감되었다. 독일이라면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사업에 대한 예산을 전액 삭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독일 사회에 흐르는 보편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앞선 두 사례는 아직 우리 사회가 예술에 대한 인식이 낮고, 보편적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대의제 정치는 우리를 소외시키고 냉소하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더 나은 삶을 상상하고 공론하고,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청년예술 기획의 가장 핵심은 타자이자 소비자로서 존재했던 이들에게 결정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는데, 결정권은 이와 함께 성숙한 시민으로서의 의식과 책무를 동시에 요청한다.

예술인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이지만, 그 지위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정의되고 형성된다.

 


1) 그런데 역으로 이 때문에 2010년대에 발생한 블랙리스트가 얼마나 상식을 초월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2) 하지만, 검열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검열은 권력 유지를 위한 검열보다, 청소년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를 명분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검열의 예시로 대표적인 것은 청소년보호법<게임 셧다운제>가 있다.

3) 물론, 직접적인 규제나 탄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나 정부를 풍자한 작품에 대해 명예훼손과 같은 대응이 있었다.

4) 이는 예술의 사회적 활동을 부정하여 예술이 독립적이어야만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보다는 사회적 문제로 나타나는 여러 문제에 대해, 본질적 문제 해결이 선행되지 않은 체로 예술을 통한 대안적 해결만을 요구하는 상황에 대한 비판에 가깝다.

5) 위르겐 하버마스 공론장의 구조 변동

6) 관련기사 : 노지민, “대통령 죄책감 든다고 했던 블랙리스트 사건 실종’“, 2020.12.18.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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