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예술정책과 지역/진정성/불안정성
채태준(문화정책연구모임 ‘행간’)
청년예술은 서울 내에서 정책주도로 등장한 개념이다. 서울에서는 2020년 이후 창작지원 정책으로는 사라졌으며, 그러나 여전히 “지역문화예술특성화지원”이라는 맥락 하에서 서울을 제외한 지역문화재단에서는 창작지원 중 한 꼭지로 살아있다. ‘수도권’이라 불리는 서울경기 외의 서로다른 광역문화재단에서 2020년 운영했던 창작지원사업 중 청년예술인 트랙에 참여한 세 작가를 인터뷰했다. 이들은 모두 서로 다른 광역자치단체의 사업에 참여한 바 있었다. 이들에 관해 살펴보며 예술가의 이행, 지역, 진정성, 불안정성 등에 관한 흔적들을 살펴보길 원한다.
ㄱ. 광역시의 청년예술인 창작지원사업에 참여한 A
ㄴ. 광역시의 청년예술인 창작지원사업에 참여한 B
ㄷ. 광역시의 청년예술인 창작지원사업에 참여한 C
청년‘들‘의 이질성 : 상이한 이주와 정주의 맥락들 속에서 지역
‘지역’이란 가치중립적인 듯 보이지만, 얼마나 굴절된 용례를 지니는가. 한국사회에서 지역은 지리적인 개념임과 동시에, 서울에 대한 ‘결여’로서 ‘지방’의 의미론을 일정부분 포함한다. ‘지방’이란 실재하는 불평등들, 일명 수도권중심주의 하에서 물리적이고 문화적인 불평등의 존재를 지적한다는 점에서 대안성을 지니지만, 한편에서는 수도권과의 대조 속에서 서로다른 지역‘들’의 이질성이나, 지역 내의 주체들의 이질성을 비가시화하기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특히 그 중심에는 ‘지역청년’들에 관한 논의가 있다. 학술담론 속에서는 지역의 청년들을 일종의 젠트리파이어로서 ‘낙후한 지역’의 문화적이고 경제적인 조건을 다시금 ‘부흥’시킬 책무와 가능성의 담지자로 부각시키거나, 생존을 위해 자기계발에 전념하는 서울청년의 반대편에서 ‘뭐든 그냥 적당히’주체성(적당주의)으로 묘사하는 일련의 학술적 기획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이뤄진 바 있다.
정확한 단어로 볼 수는 없겠지만, 이를 청년에 대한 ‘대상화’로 갈음해보자. 이 같은 대상화들은 주로 지역을 일종의 ‘결여의 우울한 공간’으로 구성하고, ‘청년’을 이 같은 공간에 ‘정박된 주체’로 상상하는 측면이 있다. 청년의 ‘이동성’을 부정하는 셈이다. 그러나 인터뷰 참여한 A, B, C작가는 모두 서로 다른 광역시 내에서 ‘청년예술인 창작 지원’을 받았지만 그 정주와 이주의 경험들은 매우 상이했다.
먼저, B작가 경우 지원사업을 ㄴ광역시에서 태어났고, 유년기를 보냈으며, 대학 진학 등 학업이행과 교육 및 수련기간을 거친 뒤 ㄴ광역시에서 작업 활동을 지속해왔다는 점에서 다른 광역시로의 이주의 경험이 없었다. 그러나 A작가의 경우에는 달랐다. A작가는 ‘ㄱ’광역시 내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앞선 두 작가와 달리 서울로 진학했다. 그런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다시 ‘ㄱ’광역시로 돌아오게 된다.
일단 무엇보다 생활의 안정성이 보장된다는 점. 왜냐하면 본가가 이제 ‘ㄱ’에 있기 때문에. 진짜 그것만큼 큰 이유가 없었던 것 같아요. ㅇㅇ에 내려가서 왜냐하면 생활이 불안정하니까 서울에 있으면 계속 사실 작업을 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게 일단 첫 번째로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A작가에겐 경제적 불안정성이 가장 큰 이유였다. 서울에서 그는 생활비를 벌며 함께 작업을 병행해야 했다. 그는 자신이 ‘아주 힘든처지는 아니라’고 덧붙였지만, 동시에 서울의 높은 주거비를 감당하기 ‘언제나 걸림돌’인 경제활동을 멈출 수는 없었다고 구술했다. 이때 그에게 떠오른 것은 ‘ㄱ’광역시로의 이주였다. A작가의 이주는 ‘ㄱ’ 광역시로의 이주이자, 동시에 경제적 불안정성으로 인한 ‘원가족으로의 이주’이기도 했다.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주거비를 걱정하기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ㄷ광역시의 청년예술인 창작지원사업에 참여했던 C의 경우에는 ‘청년예술’지원사업에 참여할 당시에는 ㄷ광역시가 아닌 인접한 도시에 살고 있었다. C가 거주중인 도시의 ‘도’단위 문화재단에서도 청년예술인 대상의 창작지원사업이 있었지만, C는 ‘ㄷ’광역시에서 작업활동을 지속해왔기에 ‘ㄷ’광역시의 문화재단을 택했다고 이야기했다.
지역 내 ‘청년예술인’ 지원사업에 참여한 참가자들은 다양한 이주와 정주의 맥락들 속에서 지역문화재단이 운영한 ‘청년예술인지원사업’에 참여했다. 각급의 지역문화재단은 청년예술인창작지원사업의 요건으로 제시한 ‘N년 이내 지역 내에서 활동 및 거주 이력’을 요청했고, 사업 참여자들의 경우 지역 내 정주의 유무, 정주 기간의 길고 짧음, 정주 목적 등에서 상이함을 지녔을 게다. ‘정박된 존재’로서 지역청년에 제한된 관한 상상이 실상 다양한 이주와 정주의 맥락을 포착하지 못하는 것처럼, 각급 지역문화재단의 ‘청년예술창작지원’사업의 참여자들 역시 복잡하고 두터운 정주와 이주의 맥락을 보여준다. 이들의 정주와 이주의 경로는 이질적이었다.
‘억압/자유’로 담을 수 없는 지역성(Locality)의 가벼움과 무거움
인터뷰에 참여한 A, B, C 모두 광역문화재단 내에서 청년예술 창작지원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지역성을 발굴하라’거나 ‘지역성을 부각시키라’는 등의 압력을 드러내 놓고 받은 적이 없다고 구술했다. A의 경우에는 ‘ㄱ’광역문화재단의 청년예술창작지원사업 참여 경험을 동기간 참여했던 다른 문화예술기관의 사업과 비교하며, 참여자의 자율성이 충분히 주어졌다고 구술한 바 있다.
그러나 광역문화재단의 청년예술지원사업 외에도 다수의 공공 지원사업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던 B의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보조금 사업을 따르면은 머리를 많이 써야 되는데 국가가 문체부가 원하는 어떤 정책의 흐름이 있으면은 그 주제들 있잖아요 키워드 같은 게. 그러면 그 키워드에 맞춰서 새끼들 치는 것처럼 그거에 맞춰서 뭔가 트렌드를 잡으면서 이 지원서를 쓰면 이게 먹힌다 이거죠,
B는 대학을 졸업한 뒤, 동료들과 함께 ‘딱 2년만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 결심한 뒤, 활동의 자원을 마련키 위해 광역문화재단을 비롯한 공공기관 사이트를 ‘즐겨찾기’에 추가한 뒤 반복해 동향을 살펴보곤 했다고 구술했다. ‘보조금사업’의 지원서를 작성하고, 수차례 탈락과 선정을 거치며 그에게는 ‘보조금 사업이 원하는 지원서’에 대한 감각이 생기게 되었다고 답했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내가 하고 싶고 우리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조금 뭔가 변형을 해서 사업을 따가지고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했다고 하면은 이게 어느 순간에는 내가 원하는 것들을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그 보조금 사업 지원 사업들의 어떤 결들을 보고 거기에 맞춰 가게 되는 거예요.
B는 이때 ‘내가 하고싶은 작업을 위해 참여했던 보조금 사업’으로부터 ‘보조금 사업이 원하는 작업’으로 자신의 관심이 이동함을 느끼게 된다. 이는 청년연구 내에서 직업이행기의 청년들이 반복되는 자기소개서 작성 과정을 지나며 지원서에 맞추어 자신의 정체성, 경험, 일상을 재구성하고 자기소개서가 신자유주의 또는 ‘자기계발주체’를 만들어내는 장치로서 작동한다는 이야기들과 공명한다. 다시 말해, 청년예술인으로서 B가 경험한 일련의 과정은 또 다른 청년들이 직업시장에서 자신을 PR하며 겪게 되는 ‘진정성’의 문제와 연결된다. 열심히 생존을 위해 지원서를 적다 보니 어느새 ‘내가 진짜 하고싶었던 작업이 무엇인지’다시 되뇌게 된다는 게다(“내가 하고 싶은 게 있어서 보조금 사업을 적절하게 이용을 하는 거라 생각을 했는데 뭔가 어느 순간에는 보조금 사업을 하기 위해서 내가 뭔가 만들어야 나라는 약간 그런 아이러니한 게 나타나는 거죠;”).
이때 예술장 내의 ‘포트폴리오 경제’가 야기하는 불안정성이란 공통적일 테지만, 지역의 청년예술인들이 이행단계에서 혹시 공공의 지원사업에 더욱 몰두하게 만드는 취약한 구조가 있지는 않은지, 예컨대 예술씬 내에서 통용되는 상징자본의 분배체계가 지역에 따라 어떻게 상이하며 이것이 공공정책에 대한 어떤 인식을 만드는지 고민이 필요하다. 실제로 서울에서는 ‘청년예술’ 지원사업이 일종의 ‘복지’로서 삶의 연장에 주목했을 뿐 예술장 내에서 통용되는 상징자본, 일종의 분배가 아닌 ‘인정’의 측면을 제공치 못했다는 담론이 주를 이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인터뷰에 참여한 참여자들은 모두 서울의 담론과는 달리 ‘지역예술인 되기-’가 일종의 인정을 제공했다고 구술했다. ‘지역에서 인정한 예술인이 된 것 같은 기분’, ‘작가로 인정받는 듯한 느낌’ 등을 제공했다고 말이다.
‘지역예술가 되기-(Locality)’의 복잡한 진정성
‘자기소개서’로서 지원서를 작성하며 B를 비롯한 서울 외부에서 활동중인 청년예술인들은 ‘지역(성)’Locality을 자원으로 활용하며, 지원서 내로 적극 인용하게 된다.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B가 덧붙인 문장들이었다. 그는 공공의 지원사업‘들’에 반복해 참여하며 그때마다 자주 자신이 정주하는 지역의 지역성을 자원삼아 작업을 전개했지만, ‘지역예술인-되기’ 경험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외려 포트폴리오 경제 내에서 반복해 ‘지역예술인-되기’를 수행하며 지원사업에 참여하다보니, ‘지역’Locality에 관해 보다 진지하게 성찰할 수 없게 될 것 같아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 ㅇㅇㅇ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할 때도 한계가 있거든요, 제 지금 나이에서. 그래서 이것도 내가 평생 가는 게 아니라 나중에 또 뭔가 내가 어떤 기회가 됐을 때 내가 또 풀어내고 싶은 어떤 방식이 있을 때 하고 싶은데 내가 지금 이걸로 고착화가 돼버리면 어떡하지라는 게 있죠
그의 이야기는 ‘공공적인 예술’과 ‘순수한 예술’, 또는 ‘지역성을 드러낸 예술’과 ‘동시대성을 드러낸 예술’이라는 일련의 이항대립에 한 편에 속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과는 달랐다. ‘사회적’ 대 ‘순수’라는 이항대립 속에서 자신이 취하고 싶은 예술작업의 진정성을 택하는 일이 아니었다. 외려 그는 잠시간 수련의 과정을 거친 뒤에, 그리고 상이한 경험들을 쌓은 뒤에 다시금 내가 전에 작업했던 지역성의 테마로 돌아오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지역예술인-되기’ 그 자체는 진정성을 상실하게 되는 일련의 경험이 아니었다. 외려 포트폴리오 경제 내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상징자본이 지역성Locality이다’는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 외려 진정한 의미로서 ‘지역예술인-되기’를 가로막는 장벽처럼 작동하는 듯 보였다. 지역이나 지역성은 등은 그 자체로 이들에게 억압적이거나 동시대적이지 않은 요소가 아니었던 셈이다. ‘지역과 관련된 주제를 그만하고 싶다’보다는 ‘지역(성)을 보다 진정성 있게 다루기 위해서’ 이 지원사업에 대한 의존과 포트폴리오 경제를 멈추고 싶다는 측면에 가까웠다.
한편, C 또한 ‘ㄷ’광역시의 청년예술인 사업이 드러내놓고 특정한 ‘지역성을 발굴하라’던가 하는 압력을 강제하지 않았다고 구술했으며 이미 노정된 ‘사회성/공공성’ 등을 규준으로 설정하여 작업을 제약치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헌데, C가 청년예술인 창작지원 사업을 경험한 뒤, 이후 ‘청년문화’사업에 지원하며 겪은 경험은 이와 상반되었다. C 뿐만 아니라, 다수의 청년기의 예술인들은 청년예술창작지원이 ‘최초지원’ 등의 제한을 두고 있기에 해당 사업을 경험한 뒤 ‘지역문화’와 관련한 청년예술인 및 기획자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이동키도 한다. 이때 C는 지역문화 사업이 ‘공공성’을 물화되어 이해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사업의 심사 과정에서 ‘이게 지역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노는 것을 지원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가 오갔다며, C는 ‘혼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공공성, 특정한 활동의 사회적 효과 등을 엄밀히 검토하고 정책의 목적에 입각해 참여자를 선정해야하는 것은 틀림 없지만, C의 이야기는 (기우일 수 있지만) ‘청년예술’ 대 ‘청년문화’라는 다수의 지역문화재단에서 취하고 있는 정책의 이항대립이 은연중 ‘구태한 이분법을 상정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의구심으로 이어진다. 순수/사회, 창작/참여, 작가/시민 등의 이항대립을 강화하며 작동할 위험과 함께 전자와 후자 모두를 물화해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고민이 필요하다. C의 경험은 ‘청년예술’에서는 아닐지라도 참여자들이 해당 정책을 경험한 뒤 ‘청년문화’ 정책으로 이행하며, 자신의 작업이 이미 노정해둔 ‘사회/공동체/공공성’을 위해 재단되는 듯한 경험을 함을 알려준다.
‘이행단계’로서 지금
이들은 모두 청년예술인 지원을 ‘이행단계’의 예술인들을 지원하는 정책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거나 예술교육기관을 수료한 이후 ‘진짜’ 씬에 들어가기 위한 첫 단계처럼 말이다. 서울의 임대료로 인해 원가족이 거주하고 있는 ‘ㄱ’광역시로 돌아와 작업하던 A작가가 다시 ‘ㄱ’광역시를 떠나 서울로 향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A작가는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 원가족의 집으로 들어가 주거비를 비롯한 생활비를 벌기 위한 노동시가간을 줄이길 기대했으며, 그 과정에서 ‘ㄱ’광역시의 청년예술인 지원정책에 참여키도 했다. 그러나 A작가는 결국 일정 기간이 지난 뒤 다시 서울로 되돌아가게 된다. 주거의 ‘안정’을 위해 원가족을 찾았지만, 현재 자신이 이행단계이기에 필요한 것은 ‘성장’임을 다시 확인했다는 것이었다. 지역에서 경제적 안정을 획득할 수 있었지만, A는 자신이 수행하는 작업이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에 대한 재교육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기술 교육’을 위해서는 서울로 다시 향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현재 서울에서 ‘풀타임 잡’과 동시에 작업 및 교육을 병행하며 분투중이다. 청년세대가 직업이행과 직업훈련과정을 계속해 진동하는 현상을 ‘요요이행(직업/훈련/직업)’으로 탐색한 학술적 시도가 있는데, A 또한 일종의 요요이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A 뿐만 아니라 다수의 청년예술인들이 작업/안정을 오가기 위해 원가족으로의 회귀와 원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을, 지역과 서울을 오가고 있지 않을까.
C작가의 경우에는 이행단계에서 보다 ‘나’에게 주도권을 맞춘 작업을 준비하며, 잠시간 보조금 사업을 지원하는 일을 멈추려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지원금을 받기 위한 작업’에 회의하며, 자신의 작업 내에서 스스로의 ‘주도권’을 지키고자 한다고 답했다. 그는 ‘포트폴리오 경제’나 이행기의 압력 등에서 상대적으로 초연했으며, ‘진짜 내 작업’을 찾는 과정을 오롯히 혼자 감내하길 원하는 듯 보였다. 물론 이 같은 ‘선택’을 가능케하는데 그가 가진 어떠한 경험이나 경제적, 문화적 자원들이 작동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거꾸로 그가 이 ‘평안함’을 유지하기위해 어떤 지난한 고민들을 지나왔는지도 역시 모른다.
마지막으로 B작가는 C작가와 마찬가지로 보조금사업‘들’ 속에서 ‘지역-예술인’에 대한 진정성을 상실하게 되는 상황을 회의하지만, 한편에서 ‘지역-예술인’으로 어떻게 안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중이다. 그에게 요즘 눈에 들어오는 현상은 지역 내 30대 중후반의 ‘선배아티스트’의 부재다. 그는 대다수의 선배 예술인들이 지역의 대학이나 예술교육기관을 이수한 뒤, ‘유학’을 떠나 지역으로 돌아와 안착하고 있으며, 이게 ‘지역예술인이 되는 국룰’처럼 여겨진다고 구술했다. 그는 동시에 지역 내에서 꾸준히 단절의 기간 없이 활동한 이들이 부재한 것이 아니라 헤게모니를 쥐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알아주는 건’ 역시 외부로부터 부여된 ‘상징자본’이라고, 밀어주는 건 ‘갑작스레 유학을 마친 뒤 돌아온 선배’라는 게다. C작가는 다른 두 작가보다 지역문화생태계의 ‘구조’라던가 ‘네트워크’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목소리를 내는 중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따금 ‘유학’이라던가 예술장 내에서 통용되는 상징자본들, 그가 문제시하는 그 구조로 들어가야만 생존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라는 고민이 찾아든다. 이에 온전히 초연치 않다고 답한 그는, 씬의 법칙과 장의 규율의 영향 안에 있는 ‘나’를 확인하면서도, 결국 이 체계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 나도 이 세 청년예술인들을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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