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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숨은참조'/읽는다

[읽는다] 연구스위치|(2차) 예술과 사회 : 경계의 예술인 ✍최서윤

by 서울청년예술인회의 2022. 3. 15.

인터뷰이 간략 소개

홍명교: 사회운동가· 활동가와 예술인 사이의 경계인

오재형: 미술가/영화감독/피아니스트. 장르와 장르를 넘나드는 경계인

여지우: 스스로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보드게임 제작자이지만 아직 보드게임이 예술이라는 인식이 세상에 퍼지지 않았기 때문에 경계인

 

(지난 인터뷰에 이어서)

 

사회 변화를 위해 힘을 보태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명교: (사회적 맥락의) 비평이 살아나야 창작자가 사회적인 것을 고민하지 않을까? 창작이 날카로워지려면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이건 창작에서부터 시작했을 때의 경우를 말한 거다. 나는 학생운동을 먼저 하다 이렇게 된 거라…. '(사회) 운동하고 와서 창작 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웃음).

(사회운동 하기 전부터) 운동하는 사람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퇴임 뒤 고대에 강의하러 갔을 때 오마이뉴스에서 실시간 보도한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고대생들이 강의를 막고 김 전 대통령도 차에 남아 고집 부리며 대치하는 장면이었다. 그거 보는데 학생들이 멋있고 운동이 재밌어 보였다(웃음). 나도 저기 가서 저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반항하는 청춘에 대한 욕망이랄까?

고려대에 입학했다. 워낙 운동권이 많은 학교였다. 9개 정파가 있었는데 고심하다가 1학년 말 한 곳을 정했다. 이라크 파견 반대 시위, 비정규직 파업 시위 등의 현장에 함께 참여했다. 그런데 (내가 속했던 조직이) 폐쇄적이고 토론도 잘 안 하고 분위기도 파국론과 냉소주의로 흐른다고 느껴 나오기로 했다. 약 30명이 나와 책읽기 모임하다 만든 것이 지금의 ‘플랫폼C(platformc.kr)’이다.

재형: 어릴 적에는 혼자 골방에서 존나 멋있는 걸 해서 세상에 내놓는 게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데미안 허스트처럼 사람들을 놀래키고 센세이션 일으키는 예술가가 되기를 욕망하는 때도 있었다. 미디어에서 접하는 예술가에 영향 받은 것 같다.

투쟁현장에 가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뉴스를 통해 강정마을 해군기지 이전 이슈를 접하고 화가 나 제주로 내려간 적 있는데, 강정마을 활동가를 보며 느낀 것이 많다.

지우: 내가 처음 만들었던 게임은 ‘한강의 기적’이란 게임이다. 출판되진 않고 프로토 타입으로만 있다. 서울을 배경으로 부동산 개발을 하는 게임인데, 주거·상업· 공업 세 가지 영역에서 수요와 공급 관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게임을 통해 전하고자 의도한 메시지는 부동산 개발은 광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웃음). 비슷한 테마의 게임으로 마틴 월러스의 '에이지 오브 스팀'이 있는데 철도를 만들어 도시 사이 상품을 수송하는 게임이다. 게임을 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계속해서 비효율적 개발을 하는 자본주의를 풍자한 건가 싶었다.

보드게임 디자이너가 되는데 영향을 준 작품은 ‘쓰루 디 에이지스’이다. 각자 한 문명을 택해 고대· 중세· 근대까지 계속 발전시키는 게임이다. 식량, 자원, 인구, 행복, 군사, 문화, 과학 같은 요소들이 게임 규칙을 통해 추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규칙 자체는 추상적이지만 게임을 하면 정말 문명을 만드는 것 같이 잘 구현이 돼있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규칙과 테마가 조화롭기 때문이다. 이건 예술이다 싶었고 나도 이런 게임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예술인에게 사회와 연결되어야 할 의무가 있을까요? 혹은 오히려 정치 사회로부터 거리  둬야 할까요? 본인은 어떠한 예술가인가요?

지우: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모든 시민이 사회적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이기 때문에, 지원금을 받기에 더 사회참여적이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민 일반이 그래야 하는 만큼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시민으로서 주변의 부정의를 방관하지 않을 정도의 책임은 있다고 생각하는데, 시민들마다  생각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모두가 직업활동가가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누구는 후원금을 내면서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이고, 각자 할 수 있는 게 다를 것이다. 각자가 선 위치에 따라 할 수 있는 활동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예술가로서 참여하는 방식은 창작인 것이다.

명교: 예술은 순수하고 탈정치적이어야 한다고 믿고 그런 예술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입학한) 한예종에도 있었다. 그래서 더 논쟁을 만들려고 했다.

한예종 재​학 당시 명교가 기획한 문화제

이명박 정권 때 한예종이 정치 이슈로 시끄러워졌다. 그때 교내에서 이에 반대하는 논조가 ‘예술은 예술이고 정치는 정치다’ ‘정치의 잣대를 예술에 들이대지 말라!’였는데, 나는 그 논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예술도 정치적인 것 아닌가? 문제는 ‘어떠한’ 정치인지가 아닌가? 예술과 정치를 분리해서 얘기하고, 예술을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순수한 우리를 지켜줘’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것이 ‘우리는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위와 같은 태도를 가지고 계셨던 분들이 시립예술단이나 국립예술단의 노동자가 되며 바뀌었다는 거다. 국립극단 인원이 줄고 외주 공연이 더 많아지는 등의 문제를 겪으며 노조활동을 조직하고 파업을 하셨다. 결국 (예술가에게도) 구체적인 경험이 중요하다고 본다. 시립 영상단이 있다면 어떨까?(웃음)

재형: 20대 때 투쟁 현장에서 활동가들을 보고 너무 멋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구호 외칠 때마다 너무 어색해 하고, 현장으로 이주해서 활동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하겠고. 결국 ‘화이트 큐브’로 돌아왔다.

하지만 극장이나 갤러리도 ‘현장’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재밌고,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동참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액티비스트라고 당당하게 말은 못 하겠다. 그래도 소심한 액티비스트라고 말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국가폭력 테마의 내 작품을 보고 사람들이 무언가를 느낀다면? 현장활동가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도 나름대로 활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영화관과 극장도 현장이 될 수 있다. 최근에는 장애 관련 이슈에 관심이 많다. 영화하는 사람으로서의 고민이다. 극장에 올 수 없는 사람이 있고, 그곳이 누구나 감상할 수 없는 공간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작품을 통해 ‘배리어프리’를 노력할 수 있지 않을까? 배리어프리로만 가능한 영화의 문법과 실험적인 형식을 창조하는 것이, 결국은 작품성도 높이는 길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노력으로 만든 영화가 <피아노 프리즘>이다.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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