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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숨은참조'/말한다

[말한다] 제작일지|‘청년’으로 청년예술 읽기

by 서울청년예술인회의 2021. 1. 29.

‘청년’으로 청년예술 읽기

 

채태준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연구원

 

청년예술은 분명 역사적 개념이다. 특정한 시기들 속에서 축적된 용례들의 합을 통해 지속적으로 갱신되는 청년예술의 의미는, 그러니까 담론의 무풍지대 속에서 몰역사적으로 청년예술이 만날 때 탄생하지 않았다. 이 개념 속에는 서로 다른 두 단어인 예술청년에 관해 말해온 일련의 역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청년예술은 분명 예술계에서 지난하게 이뤄진 예술()의 불안정성에 관한 논의의 바탕에서 구성된 개념일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김재상의 글이 상세히 논하고 있다. 한편, ‘청년예술은 청년 정책이 보장정책으로 태동하였던 일련의 흐름에서 발생한 구심력으로부터 역시 자유롭지 않다. 이 글은 후자의 차원을 다룬다. ‘청년관한 2010년대 이후 특정한 연구와 정책의 용례들을 검토하며, ‘청년예술의 과거와 현재를 톺아본다.

 

‘청년문화’에 관한 담론 속 청년예술

청년과 관련한 연구 및 정책의 장 내에서 청년예술이라는 개념은 그 상위개념으로서 청년문화로부터 파생된 측면이 있다. 이때 청년문화사이의 결합은, 다음의 세 갈래 중 하나를 따라 왔다. 첫 번째가 청바지-통기타-생맥주로 대표되는 1970년대 청년기를 보낸 이들의 문화적 양식으로서 청년문화라면, 두 번째는 2010년대 청년의 당사자 운동과 청년 정책의 제도화 이후 용례로서 청년문화(정책)’이다. 마지막으로는 청년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사용되거나, 비록 사용되지 않을지라도 연령을 통해 정의된 새로운 집단새로운 문화적 실천을 행하고 있음을 분석하는 담론과 연구들이 있다. 정주와 이주, 음식섭취방식, 미디어수용방식 등의 이질적 실천을 청년 혹은 세대와 연결지어 분석하는 사례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미래를 여는 예술문> 회의에서 보다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두 번째 용례다. 2010년대 이후 유행한 청년담론은 ‘88만원 세대위시한 세대 주체화의 기획들과 당사자들의 말하기 또는 새로운 방식의 사회운동(활동) 기획 간의 변증법을 통해 상호구성적(Co-constructive)으로 형성되었다. ‘청년 활동가로 불리운 주체들은 청년 담론의 홍수가 낳은 기회구조를 활용하거나, 청년 담론에 관한 전유를 시도하며 앞선 세대와는 다른 개입전략을 그들의 상징자원으로 삼았다. ‘거버넌스라 불리는 이 새로운 정책개입 방식과 함께, 2010년대 초반까지 고용정책을 의미했던 청년 정책은 청년으로 불리는 이들이 겪는 일상 전반에 관한 문제에 대응하는 정책으로 재구조화의 과정을 겪으며, 비로소 보장이라는 이름을 한 연령 대상의 종합정책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직업이행과 가족이행 너머로 이행기 주체들의 문화청년문화라는 이름으로 정책의 대상으로 설정된다.

이때 문화정책과 관련한 연구들은 청년과 문화 사이의 서로 다른 두 결합과정에 주목했다. 먼저 청년은 문화를 소비와 생산으로 구분하는 문화의 민주화적 패러다임을 극복하고, 향유자와 예술가, 대중문화와 고급문화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문화 민주주의를 선취할 주체의 이름이었다. 문화와 사회, 저급문화와 고급문화, 비전문가와 전문가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것으로서의 문화정책으로 이행을 요청하는 2000년대 중반 이후의 문화정책연구가 지닌 한 흐름 위에 청년문화가 등장한 것이다. 다른 한편, ‘청년을 대상으로 한 문화정책은 청년 문제를 해결하는 문화정책으로 등장키도 했다. 전통적 차원에서 청년들의 문화향유에 관한 불평등을 해소하는 정책이 아니라, N포 세대를 위시하여 2000년대 이후 청년 문제라는 이름으로 거론된 다차원적 불평등에 문화(정책)’를 통해서 접근해야 함을 강조하는 연구들이었다.

이때 연구의 장에서 생산된 결과물들은 주로 왜 청년을 한 문화정책이 필요한지에 관한 당위를 보론하는 성격을 지녔다. 어떤 연구는 청년들이 문화예술 활동에 참여함으로 긍정적 자기인식을 획득한다고 말했고, 또 다른 연구는 예술장의 신규 진입자들이 겪는 불안정성의 조건을 청년 예술가라는 -정책을 통해 미리 설정된- 이름을 통해 표현했다. 청년 예술인 내부의 하위집단에 따라 상이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불안정성을 살피는 교차성을 수반한연구 역시 등장했다. 이 일련의 흐름을 청년예술에 관한 개념적 진척으로 부를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청년문화 혹은 청년예술에 관한 연구들은 대중문화와 예술에 위계화된 가치를 부여하여 후자에 본질주의적으로 대안적인 성격 부여하거나, 문화정책 내의 창조도시 등의 개념의 유행과 함께 청년 예술가 지원을 지역의 경제적 도약을 위한 수단으로 언급하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었다. 청년 예술가로 호출되는 주체들, 그리고 젊은 문화정책 연구자들이 무크지나 웹진을 통해 2010년 이후 청년예술 연구를 성찰적으로 재독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에 이르러서다.

구체적으로 정책의 차원을 살펴보자면, 2015년 발표된 서울시의 2020 서울형 청년보장이 하나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 이는 고용정책이 전부였던 청년 정책을 총 4개의 자리를 지원하는 사회보장 정책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였다. 해당 프레임워크 내에서 4개의 자리는 각각 일자리/살자리/설자리/놀자리로 나뉘는데, 일자리가 고용 및 노동 정책이었다면, 살자리는 주거정책, 설자리는 복지안전망과 관련한 정책을 가리킨다. 문제는 놀자리였다, ‘놀자리의 소관 사업으로 설정된 것은 청년허브 운영(출범 이후에는 청년청’)/청년정책네트워크 운영/무중력지대 운영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뉘며, 이때 청년의 문화/활동/활력이라는 세 단위를 지원의 목표로 설정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야심찬 기획이 현시되는 과정에서 청년과 관련한 문화정책은 무중력지대를 통한 문화 프로그램 운영등 청년공간 내에서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프로그램 수준으로 국한된 면이 있었다. 이것이 청년 대상의 문화정책이 지닌 조건이었다면, 이 글에서 문제시되는 청년예술은 어떠하였을까. 2020 서울형 청년보장내에서 청년예술에 관한 내용은 신진 유망 예술가 지원문화예술매개자 양성과정 추진이라는 이름으로 일자리내부의 한 사업의 분야로서 존재한다.

 

‘청년예술’을 새로 쓰겠다는 사람들

그렇게 5년이 지난다. 동기간 내에 청년 예술인이라는 정책적 언표가 가리키는 대상도, ‘청년 예술인 정책이 정책 대상을 지원하는 내용도 바뀌었다. 2019년 서울문화재단 주최로 청년예술’() 정책에 관한 당사자 주도의 공론장이 열렸고 청년예술 태조사가 시행되었다. 여러 이해관계 속에서 우발적으로 현상한 새로운 공간이자 기관으로서 청년 예술청의 설립 이후, 청년 예술인의 정체성은 연령이 아니라 예술계 내의 대안적 관점의 유무로 결정되고, 청년 예술인 정책은 이 같은 관점과 목소리를 행정과 문화정책 내로 발신할 수 있는 참여 정책으로 변모한다.

현재 청년예술청 등 제도 내에서 우발적으로 열린 공간을 자원 삼아 청년 예술가로 호출된- 그리고 개체의 차원에서 이 의미를 나름대로 재사유한 - 주체들은 청년 예술인이라는 개념을 재구성하기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있다. 지원사업으로서 청년예술이 사라진 뒤, 역설적으로 청년예술이 무엇이며 어떠한 이름이 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논의의 장이 열린 셈이다. 대표적으로 <서울청년예술인회의> 운영단이 주축이 되어 발행한 웹진 숨은참조청년예술이라는 개념을 성찰적으로 재독하는 당사자들의 작업이다. 웹진의 여는 글 성격이기도 한 최선영의 글에 언급되었듯 이 기획은 공공담론 안에서 청년 세대의 등장을 환대하고 있지 않다고 느껴지는기민한 감각을 언어로 벼려내고, 질문을 받는 자에서 질문을 하는 자로 청년 예술인을 재정초함을 목적한다. 이런 점에서 숨은참조내의 다양한 꼭지 중에서도 개념으로서의 청년예술이 낳은 일련의 변화와 효과들에 관해 톺아보는 [읽는다] 연재는 눈에 띈다. 성연주의 글은 예술장의 신규 진입자에게 필요한 공공의 지원이 경제적 생존과 관련한 지원과 등치되어 이해될 때 발생하는 사업과 현장의 미스매치에 관해 지적했고, 정진세의 글은 청년예술의 탄생 뒤편에 감춰져 있던 사건들을 성찰적으로 재독했다. 신소우주의 글은 범박한 정책의 개념을 어떻게 수용자가 재독하는지를 -예컨대 최초예술인지원사업 내의 최초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책 대상자가 재의미화 했는지- 보여줬다.

특히 청년 정책을 연구하거나 청년 활동을 지속해 온 입장에서 성연주의 문제제기는 흥미로웠다. 그는 예술 장에 신규로 진입한 예술가에게는 물질적 생존뿐만 아니라, 장 내에 안착을 위한 상징자본을 획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청년예술과 관련한 정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겠지만, 정책이 대상자에게 예술장 내에서 통용되는 상징자본을 만들어주지 않는다고 말이다. 이를 예술장 내의 특수성을 고려치 못한 정책설계로 인한 결과라 평할 수 있겠지만, 유사한 문제가 청년 정책 내에서도 발생한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대표적으로 청년에게 공공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뉴딜일자리사업과 관련하여, 해당 사업을 통해 청년 세대가 급여를 통해 생계를 보장할 수는 있으나 해당 사업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차후 이직이나 노동시장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일 경험이 생성되기 어렵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된 바 있다. 심지어 뉴딜일자리와 관련해서는 이 정책의 경험 자체가 낙인화 되어, 해당 이력이 노동시장 내에서 정책 참여자의 능력없음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비판까지 제기되기도 한다.

예술인의 이행 과정에서 유의미한 이력이 될 수 있도록, 또는 청년의 이행 과정에서 유의미한 경험이 될 수 있도록 각각의 지원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디테일이 보완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또한 지원사업 내에서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주체를 지원하는 당위를 그가 처한 취약함너머로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이런 점에서 지원사업역시도 기존의 청년 예술인 및 예술인과 관련한 생태계와 담론의 반영이 아니라 특정 담론과 프레임을 생산하는 장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성연주가 해당 글 속에서 이미 지적하고 있듯 문제는 지원사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변화가 요원한 것은 이미 강고하게 작동 중인 상징자본의 분배 체계와 그 효과들,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혹은 어디서 유학을 했는지 - 또한 미국유학이냐, 유럽유학이냐, ‘그 외의 지역이냐 -, 어떠한 매체를 통해 선정 혹은 등단했는지, 어떠한 공간에서 공연을 올렸는지에 따라 장의 신규 진입자에게 서로 다른 상징자본이 부여되고, 초기의 진입 경로에 따라 예술장 내의 안착하게 될 가능성이 양극화되는 현상이다. 장들 사이의 상대적 자율성보다 상동성이 높은 -이놈이 요것도 저것도 다 해먹는- 한국사회에서 이는 예술장 내의 특수한조건의 효과가 아니다. 또한 청년예술 지원생계지원차원으로만 간주된 이유는 일면 정책의 수립 및 설계 과정에서 지니게 되는 관습적 사유도 책임이 있지만, 경제적 취약함을 벗어난 지원의 의미론을 아직 들을 준비가 안 된문제 역시도 크다.

 

<미래를 여는 예술문>을 함께 기다리며

(당연한 말이지만) 장의 상징자본을 분배하는 일, 예술계 내에서 특정 주체를 지원해야 하는 전제 재구성하는 일은 지원사업을 교정하는 일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청년예술을 새로운 관점으로 정의한 숨은참조는 이미 예술의 안과 밖, 때론 청년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노동, 복지, 대학, 창작, 공동체에 관한 새롭지 않은 모든 것에 반하는 사유를 풀어놓는 중이다. 그러니 이 하반기 동안 <미래를 여는 예술문>의 토대를 준비해보자 모인 우리의 고민 역시도 무엇에 반할 것인가를 정초하는 일로 의미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창작, 예술기획, 예술비평, 문화예술운동 등의 영역에서 활동 중인 주체들이 모여서 다음과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공공에서 예술인을 지원할 때 지니는 당위의 제한됨 -취약함의 구제-, 예술계 내에서 강하게 하지만 결코 선순환이라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상징자본의 분배체계 -불투명한 선정의 시스템과 학력 및 유학 등의 출신성분에 따라 분배되는 상징자본들 -, 도시재생, 지역문화 등 사회적인 것과 예술을 제한된 방식으로 -때론 반동적으로- 상상하는 과정에서 도구화되는 청년 예술가들의 문제, 거버넌스의 부흥회속에서 전달체계의 마지막 단위에서만 보장되는 참여가 진짜 참여일지에 관한 고민. 때론 산발적이었지만, 이 모든 것에 반하고 싶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다른 누군가 이에 응답할 때면 묘한 열기가 함께 자리했다.

선취 되어야 할 것으로서의 미래와 대척을 이루는 것은 과거겠지만, 이때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니라 작금의 지배적인 패러다임 그 자체라는 점에서 현재적이다. 때문에 우리가 열게 될 미래를 보는 일이, 우리가 반하고 싶은 오늘’-그리하여 과거라 언명될 오늘의 어떤 지점-을 정치하게 살피는 일에서 출발할 것이라 믿는다. 예술인과 시민 사이의 경계를 허물겠다는 정책들은, 기실 본질주의적으로 두 주체에게 상이한 역할을 요청하지 않는지. 이때 일종의 시민(공동체) 만들기기획 내에서 예술인들이 겪는 도구화되는 경험을 진술하는 것 외에, 오늘날 가능한 그리고 대안적인 사회적인 것과 예술 사이의 관계는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예술장 내의 상징자본 분배 체계에 공공이 지닌 자원을 활용하여 개입하는 가능한 혹은 불가능한 전략은 무엇인지, 공공에게 말걸기와 공공의 자원을 통하여 말걸기를 어떻게 잘 병행할 수 있을지. 그러면서도 문화정책 내의 좋은 참여의 선례들 외의 강한 참여의 선례들 필요한 것은 아닌지. 이들은 현재 <미래를 여는 예술문> 회의 앞에 산적한, 그리고 청년 예술청 내의 다양한 주체들이 하고 있는 고민이다. 또한 예술청년으로 바꾸면, 같은 고민을 청년 정책 내의 활동가들 역시 마주하고 있다.

 

예술문을 작성함에 앞서 주어진 고민들을 벼려내고, 또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청년과 관련한 연구 장, 담론의 ’, 정책의 장의 조건을 활용하는 것, 청년과 관련한 내러티브, 담론, 정책 등을 자원으로 활용하거나 이에 개입하는 일을 바란다. 나는 청년예술(이미) 그저 억압적이기만 정책범주를 초과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작 단계일 뿐이지만, <미래를 여는 예술문> 회의 내에서 청년 예술인으로 문화예술 정책 내에서 대상화된 존재라는 자기 인식이 역설적으로 문화정책 내의 자연화 된 모든 체계를 하나하나 대상화’-혹은 역사화, 회억- 해 볼 수 있는 계기로 작동하는, 호명(Interpellation)의 역설을 나는 보았던 것 같다.

 

필자소개

채태준은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에서 활동하고 있다. 학교 안에서는 영상서사와 퀴어서사를 공부하고, 학교 밖에서는 청년과 관련한 활동, 정책, 문화 등을 연구한다. 정책주도로 형성된 개념인 '청년예술'은 '청년'과 '예술'이라는 두 단어가 각각 포함하는 역사적 조건들이 절합되며 탄생했다고 생각하며, 전자인 '청년'과 관련한 연구 및 정책의 장을 통해서 '청년예술' 개념을 살피는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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