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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숨은참조'/말한다

[말한다] 제작일지②|사회를 위한 당연한 요소로 인정한다는 것 ✍ 강정아

by 서울청년예술인회의 2020. 11. 29.

 

미래를 여는 예술문: 제작일지 2

사회를 위한 당연한 요소로 인정한다는 것


✍ 강정아

서울청년예술인회의 운영단
독립기획자
hysterian.public@gmail.com

 

 

“예술인이란 예술작품을 창작하거나 독창적으로 표현하고 혹은 이를 재창조하는 사람, 자신의 예술적 창작을 자기 생활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생각하는 사람, 이러한 방법으로 예술과 문화발전에 이바지하는 사람, 고용되어 있거나 어떤 협회에 관계하고 있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예술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거나 인정받기를 요청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¹⁾

 

 

인정받기를 요청하는 사람과 인정을 받는다는 것



제21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된 유네스코 국제규범「예술가의 지위에 관한 권고」에서 예술가에게 역할을 요청하려 할 때 이에 따르는 한 사회의 중요한 기초는 예술가에 대한 존중, 정신적•경제적•사회적 권리를 포함해 예술가가 당연히 누려야 하는 소득과 사회보장과 관계되는 자유와 권리 인정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여전히 예술가의 ‘지위’에 의문을 품는 이유는 사회적 권리와 보장, 존중이 현실적으로 퍽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필자 또한 ‘예술인’인지 자문한다면 그렇지 않다고 말할 가능성이 크다. 필자는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행위자가 아니며, 창작을 자기 생활의 본질로 삼기에는 창작이 아닌 다양한 알바로 생활을 연명하고 있다. 또 나의 행위가 예술과 문화발전에 이바지함이 목적은 아니기에 ‘예술인’이라고 말하기에 머쓱한 면이 있다. 그렇다면 예술인도 아닌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필자는 문화예술이란 넓은 장르 안에서 소위 ‘기획자’라고 부르는 일을 하고 있다. 이 일은 특정한 장르라고 호명하기에 모호하며, 기획자는 저명한 저자/작가 또한 아니다. ‘기획’은 매개와 협업/협력으로 이뤄지며 관객과 사회를 연결하여 양자가 어떤 하나의 상을 함께 만드는 일을 도모한다. ‘예술’이라고 말하는 넓은 개념 안에서 예술작품 생산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주체가 작품 제작을 위해 함께하고 있다. 무형의 것을 상상하는 일과 창작행위 주체의 활동까지 예술 노동을 포함하는 일을 창작, 실연, 기술지원 등으로 넓은 범위로 진행하고 있다. 창작행위 주체이기보다 실연을 위한 매개자의 입장으로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은 ‘예술인’을 특정한 장르와 역할로 국한할 수 없으며 다양한 노동 및 창작환경에 있는 특수한 상황이라는 점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예술가는 예술작품을 창작하거나 독창적으로 표현하고 창작을 자기 생활의 본질로 여긴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예술가의 ‘지위’가 예술가의 삶을 지탱해주진 않는다.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의 연결보다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예술인’이 되어야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가 생겨난다. 하지만,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예술인’은 그 기준과 활동증명이 가능한 대상으로 한정되어 있다. 증명은 ‘생계’라는 문제로 직결되기도 한다. 최근 코로나-19 관련 예술인긴급지원정책의 혜택도 골고루 돌아가지 않았다. ‘지원 및 선정되지 않았다’라고 답한 이들이 53.5%였다. ‘계약서가 없으므로 증명이 되지 않았다’와 ‘소득수준과 소득 감소 증빙의 어려움’, ‘건강보험 연체’, ‘가난을 증명하기 싫다’등 기타 의견이 있었다.²⁾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은 예술인의 사회적 가치 확장을 위해 다양한 
예술직무영역을 개발하고 사회(기업/기관 등)와 협업을 기반한 직무를 제공함으로써 
적극적 예술인 복지를 실현하고자 진행하는 사업입니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실행하는 ‘예술인파견사업’은 해마다 높은 경쟁률을 기록하는 지원사업으로, 선정자들이 한 해의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업이다. 출금 내역만 있는 애탄 통장을 보다가 활동비를 받아 고정적인 수익이 생긴다는 파견지원 사업 소식은 예술가들에게 꽤 높은 비중으로 중요한 소식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높은 경쟁률로 누군 떨어지고 붙는다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지속될 수 없다. 

파견지원 사업은 예술인의 사회적 가치 확장이라는 묘한 의무감과 더불어 기업/기관과의 협업이라는 미션을 수행하는 것이 곧 예술인의 복지를 실현하는 사업이라고 표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기업/기관 간의 협업과 예술인 복지는 어떤 의미일까? 필자 역시 2년 연속 파견지원사업에서 ‘파견’ 예술인이 되어 활동한 적이 있지만, 두 군데 모두 갤러리와 극장이었기에 ‘협업’이라는 것을 지향하는 것에 큰 마찰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운 좋은 일이다. 파견지원 사업에 함께하는 기관이 모두 다 문화예술을 기본으로 둔다는 전제는 없다. 그리고 모두 다 문화예술을 기본으로 둘 필요도 없다. 복지를 실현하기 위한 전제는 ‘노동환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예술인권리보장법」에서 정의한 예술인과 「예술인 복지법」에서의 예술인의 정의는 복지의 한정된 재원을 사용하는 기준이기에 두 법조항에서 정의하는 예술인의 정의는 달리 바라봐야 한다. 

「예술인권리보장법」은 지난 20대 국회에서 발의해 법안 심사는 통과했지만, 심사과정에서 보류되었고 이에 원안은 21대 국회에서 일부 수정해 다시 발의되었다. 원안에서 예술인 기준은 ‘예술 활동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포함하여 ‘예술 활동을 업으로 하기 위하여 교육•훈련 등을 받은 사람’과 ‘예술 활동을 위하여 스스로 훈련하는 사람으로서 창작물의 발표 또는 실연 활동의 기회를 찾는 사람’까지 아우르는 넓은 의미로 정의했다.³⁾ 하지만 수정안은 예술인 지위 관련한 인정기준에서 예술 활동을 ‘업’으로 하되 구체적인 사항을 대통령령(안 제2조 제2호)에서 그 기준을 정하도록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업’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직업職業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종사하는 일이라면, 우리는 일정 기간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 

<미래를 여는 예술문>에 예술이 한 사회의 시민의 일원으로 가치를 생산하는 생산자이자 노동자로서의 인정 투쟁을 다뤄보고자 하는 원대한 상도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왜 복지가 아닌 ‘노동’으로서 예술을 증명하고자 할 때 ‘예술은 항상 사회적이어야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생겼다.⁴⁾ 이 쟁점은 노동에 따른 ‘활동비’, ‘아티스트 페이’에 대한 쟁점과도 연결되는 맥락이다.⁵⁾ 예술인으로 증명되었지만 예술가의 ‘일’에 대한 대가는 제작 노동에 따른 페이로 지급되기보다 수혜적인 복지 형태로 지급되거나 파견지원 사업이나 공공일자리 사업에 참여함으로써 활동비를 받는 형태로 확대되고 있다. 최근 작품지원기금에서 아티스트/기획자의 인건비 책정이 되고 있지만, 구체적인 기준보다는 전체 사업비의 몇 퍼센트 내외로

프로젝트 참여자 간 합의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예술과 노동은 기존 고용 노동으로 규정되기 어렵고, 예술 ‘일’이란 모호함 속에서도 예술인-당사자가 예술의 사회적 가치/파급효과를 드러내도록 요청받고 있다. 이 공회전의 이야기를 언제까지 지속해야 할까. 

 

 

내가 나를 인정하고 말한다는 것



필자가 주목하는 「예술인권리보장법」수정안은 예술인 증명기준이 예술을 업으로 하되 구체적으로 사항은 대통령령에서 그 기준을 정하도록 함(안 제2조 제2호)을 명시하고 있다. 앞서 예술을 업으로 증명하는 환경에서 가장 취약한 상태는 (신진-청년-예비, 장르와 역할로 국한되기 모호한) 극단적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예술의 지위는 예술가의 삶을 지탱해주진 않는다. 예술이 업으로 증명된 예술인들은 최소한의 복지라는 이름의 장치를 마련할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예술-하는 이들은 이마저도 힘들다. 재난은 낮고 약한 자에게 가까이 찾아온다. 재난 사태에 예술인만 재난 상황에 몰려있진 않기에 ‘예술인’에 대한 권리만 인정하고 처우해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로-한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는 의미로 각기 다른 입장과 위치와 상태로 발화할 장을 요청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권리보장 기구에서 당사자가 결정권자로 함께 논의 테이블의 구성 주체로 설정되어야 한다는 요청은 중요한 맥락이기도 하다. 

2020년 <미래를 여는 예술문> 제작 회의는 좋아서 하는 ‘일’이 노동환경이 되고자 하는 처연한 신세 한탄일 수도 있겠지만, 좀 더 나은 내일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앞으로 제작하고자 할 <미래는 여는 예술문>이 
1. 예술인의 존재와 작업이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당연한 구성요소로 인정된다는 것.
2. 예술인에게 어떤 지지와 안전망을 제공하는 요청과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 
3. 예술인의 성장을 공공 자원과 개인적 성장으로 연결하는 방향이 된다는 것. 
4. 예술과 사회가 유무형 연대를 형성한다는 것. 
5. 목소리의 발화 주체 기구로서의 거버넌스, 현장을 바라볼 수 있는 태도로 사용되길 바라면서, 내가 나를 인정하고 말하는 안정적인 장치로 활용되길 바라본다. 

2020 <미래를 여는 예술문> 제작을 위해 다뤘던 발제글은 서울청년예술인회의를 통해 발행될『청년-예술인』의 책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제 21차 유네스코총회 「예술가의 지위에 관한 권고」에서 예술인 정의이다.

2) 2020 《시사IN 팬데믹 저널리즘》, 제 688호 <팬데믹 저널리즘> 「독립음악인 실태와 대한민국 헌법 제10조」 기사, p64 참고

3) 2020.09.11. 제21대 국회 발의된 ‘예술인의 지위 및 권리보장에 관한 법률’에 관한 온라인 공창회에 따른 기사, 뉴스페이퍼 http://www.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75541

4) 『숨은참조 2호』에 수록된 권수빈 연구자는 「‘청춘’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청년예술가」 글에서 공공 문화예술지원 기관에서 진행한 ‘청년예술가’ 대상 사업을 살펴보며 국가 문화 정책 안에서 어떤 프레임으로 존재하였는지 분석하고 있다. 

5) 『숨은참조 1호』에 ‘예술과 노동’ 주제로 진행한 라운드테이블이 수록되어 있다. 세 가지 질문(예술로 돈을 버는 것이 가능한가, 예술은 복지인가 노동인가, 사회적 재난 앞에 우리는 ‘제도적’으로 안전한가)을 통해 논의를 좁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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