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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숨은참조'/읽는다

[읽는다] 연구스위치|(3차) 예술지원사업 : 경계의 예술인 ✍최서윤

by 서울청년예술인회의 2022. 6. 23.

인터뷰이 간략 소개

홍명교: 사회운동가· 활동가와 예술인 사이의 경계인

오재형: 미술가/영화감독/피아니스트. 장르와 장르를 넘나드는 경계인

여지우: 스스로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보드게임 제작자이지만 아직 보드게임이 예술이라는 인식이 세상에 퍼지지 않았기 때문에 경계인

 

(지난 인터뷰에 이어서)

 

‘사회적 의무’를 부여하는 지원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재형: 예술가 레지던시를 할 때 자꾸 지역주민과 뭔가 하라고 하는 것 또한 일종의 예술가에게 의무를 부여하는 사례로 본다. 문제는 그것이 관례화 되어 예술가들이 억지로 무언가를 하고 지역주민도 억지로 오는 경우다.

각자의 수요가 확실히 만족되는 사업이면 좋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나는 2021년 예술인복지재단의 파견예술인 지원사업으로 리커버리 센터(나들목바하밥집)에서 활동했는데, 만족했다. 2030 고립청년들이 용기내서 밖에 나오는 것을 북돋는 기관이다. 많게는 10년에서 20년 동안 조현병, 우울증, 공황장애를 가지고 지내온 친구들에게 사회성을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내가 잘하는 것을 통해서 같이 놀고, 같이 놀면 그들은 치유가 되고, 나는 돈을 받아서 좋았다. 또한 친구가 생겨서 좋다. 그 친구들도 재능이 많아서 뭐든 던져주면 열심히 논다. 예술가가 지원제도를 통해 사회참여를 할 때에는 동료와 기관과 마음이 잘 맞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지우: 게임을 지원하면서 ‘교육용 게임’을 바라는 경우가 떠오른다. 나는 내 게임이 교육용 게임은 아니었으면 하는 입장이다. ‘교육용 게임’ 혹은 ‘기능성 게임’으로 불리는 게임들은 교육적인 효과는 있지만 재미는 없는, 한 번 하고 나면 또 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 게임인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그런 것 보다 게임으로도 재밌어서 찾아서 하고 싶은, 그러면서도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그런 게임을 만들고 싶은데 ‘’교육용 게임’을 바라는 지원사업의 경우 창작을 제한하는 사례로 느껴진다.

어떤 사업은 지원으로 만든 게임을 팔지 못하게 한다.. 예를 들어 서울시 ‘청년업’의 지원으로 50개의 보드게임 키트를 만들고 무료배포한 경험이 있다. 지원사업에 그런 제한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아쉬운 부분이다.

명교: 조건을 붙이지 않고 지원하는 게 더 건강(?) 혹은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회적인 작품을 창작할 사람은 사회적 의무를 부여하는 지원제도가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만든다고 생각한다. 기획안은 순화해서 써 낸 뒤 사회에 균열을 내는 불온한 작업을 해낸 독립 다큐멘터리의 사례를 알고 있다.

지원제도로 사회적 역할을 하고 싶다면 차라리 (창작지원이 아닌) 커뮤니티 지원이 좋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 서울노동권익센터의 커뮤니티 지원을 받았는데 지원금으로 밥 먹고 모임 진행하는 게 많은 도움이 됐다.

 

예술계가 너무 지원 중심으로 굴러간다는 비판도 있는데, 이에 대해 의견 있으신가요?

재형: 그래도 지원은 없는 것 보다 있는 게 낫지 않을까? 물론 분명 창작 지원제도에 소외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은 문제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설명하기 어렵고, 그런 데에 명민하지 못한 사람도 있을 거고…. 내 경우도 작업하는 것 보다 지원서 쓰는 게 어렵고 품이 든다고 느낀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지원서 쓸 시간에 창작하자는 주의다. 비용이 들지 않게끔 최대한 직접 하고, 그렇게 1인분의 예술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다. 나는 <피아노 프리즘>을 지원 받지 않고 만들었고 색보정이나 사운드믹싱 다 스스로 파이널컷 안에서 약식으로 했다. 질문을 던지고 싶다. 무조건 장편영화는 지원받아야 만들 수 있나? 지원제도로 제작비용이 인플레 되는 측면은 없는가?

영화제 지원 받으면 ‘프리미어’ 조건(해당 영화제 최초 상영 조건)이나 개봉시기 제약이 생기는데 그게 싫어서 지원하지 않기도 한다. 마감에 맞춰 스스로를 갈아 넣기보다 하고 싶을 때만 작업하는 게 더 슬럼프 없는 창작 방식 같다.

명교: 나는 지원은 필요하다는 입장이고, 더 많은 창작자들을 더 많이 더 폭넓게 지원하는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예술가들에게 어떤 기준인지 묻지 않고 창작활동과 생활 활동을 보장한다면 예술이 공공적인 걸로 남지 않을까? 조선시대 화원 제도처럼.

분명한 건 일 받아서 하는 식의 맞춤형 생산은 문제가 있다는 거다. 지자체의 예술가 지원제도에 참여한 또래 예술가들이 동네를 예쁘게 꾸미는 용역이나 업자 취급을 받은 기분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원하는 포맷이 있고 그것에 맞춰주지 않으면 안 됐고, 관료들이 보고 “이게 뭐야”라며 반응할 때 오는 충돌이 있었다고 했다. 관료들에게 예뻤을 때 그건 조경일까 예술일까?

지우: 나는 심지어 어떤 예술이 자위적일지라도 다양성을 위해 존재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영리 예술이 다양하게 있어야 전체 사회가 건강할 수 있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런 데에 돈이 잘 안 흘러가므로 공공부문에서 지원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재형: 제일 좋은 방법은 ‘예술인 복지’를 예술인복지재단을 떠나서 생각하는 것 같다. 유럽에는 비슷한 건 있어도 이런 전담 복지재단은 없다. 왜냐면 시민으로서 기본 복지가 잘 되어있기 때문이다.

예술가에게 시장과 무대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시장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 미술가 개인이 더 노력하면 되는가? 소비자는 어떻게 더 많아지는가? 판이 더 많이 만들어지면 해결될 문제인가? 잘 모르겠지만 막연한 바람이 있다.

요즘 MZ세대가 그림 구매를 하여 미술계의 제2의 붐이 온다고 하는데 투자 목적에서 그러는 부분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좋게 본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미술 호황기(2007~2008년)였다. 갤러리 자체 공모도 있었고, 시장도 형성됐었다. 지금처럼 지원 여부가 곧 발표 기회로 이어지는 시스템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갤러리 입장도 이해된다. 대관비도 못 건질 수 있는, 작품이 팔릴지도 모를 작가와 함께 하는 위험부담을 지기보다 지원금을 끼고 들어오는 작가와 더 함께 하고 싶을 수 있다.

오재형 회화 작품(출처: blog.naver.com/owogud/90051284012)

(지원제도에서 독립적일 수 있다는 면에서) 나는 인플루언서가 부럽다. 자기 팬 층 확보한 사람들. ‘인스타 계정 팔로워가 만 명이면 책 300부는 팔 수 있겠구나’ 각이 서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제 인스타그램(instagram.com/owogud) 팔로우 해주시고 책 <피아노를 치며 생각한 것들> 많이 사 봐주세요.

지우: ‘예술’이라함은 뭔가 ‘격’이 있는 이미지이다. ‘창작자 복지재단’이 아니라 예술인 복지재단인 이유는 그 정도 격이 있는 사람을 복지 대상으로 삼겠다는 이데올로기가 있는 것 아닌가? 예산이 무한하지 않으니까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는 점은 이해한다. 다만 마치 장학금을 공부 잘 하는 학생에게 줄 지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줄 지 고민하듯이, 예술인을 지원할 때도 ‘예술성’을 보고 선별할 건지, 비영리 독립창작물 제작자를 우선 지원할 건지 그 기준이 더 사회적으로 논의돼야 한다고 본다. 어쨌든 나는 궁극적으로 법이 바뀌어서 게임이 예술에 포함 되고, 독립게임 제작자들이 예술인 복지의 수혜자가 되길 바란다.

명교: 그런데 예술활동 안 하는 사람들과 지원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을, 이해를 공유할 수 있을까? 이 이해의 간극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예술가, 비평가들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문준용 씨 작품에 대한 지원을 두고 사회적 논의가 일어났을 때, 나는 사회 저변의 이해를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 씨가 소셜미디어에서 경솔하게 대처함으로써 예술 지원제도를 까는 여론이 형성됐다고 본다. 미술 씬의 폐쇄적인 문화가 이걸 강화하는 것 같다. 화이트큐브 안에서 교양 있는 문화인 것처럼 좁혀져있다. "니들이 예술을 알아?" 식으로 대처하면 안 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회적 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작지원 평가기준에 대해 더 설명하고 논의하고 시민들을 계속 설득시켜야 한다.

또한 비평이 더 살아나야 창작자가 사회적인 것을 고민할 거라 생각하고,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창작이 날카로워지려면 비평의 날카로움이 선행돼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염치없는 ‘쌉소리’ 하는 논객들도 꼴 보기 싫다. 먹고 살기 어려워 타협하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타협하고 나서 "나도 옛날에 해봤는데" 어쩌고 하며 (사회적으로 무뎌지게끔) 말 얹고 지금 뭔가 하고 있는 사람들 힘 빼는 거, 그게 문제다.

아 그리고 도서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aladin.kr/p/J4yYQ) 많이 사주세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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