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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숨은참조'/말한다

[말한다] 미래를 여는 예술문|반짝이지 않는 돌에게 들려주는 세 번째 이야기: 통찰

by 서울청년예술인회의 2023. 3. 3.

반짝이지 않는 돌에게 들려주는 세 번째 이야기: 통찰

 

터키석 (유은순)

 

<미래를 여는 예술문>(이하 예술문)은 ‘예술노동’, 우리의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근로기준법에 부합하지 않는 예술노동’이라는 단조로운 논의를 재구성하고, 예술노동 내부의 사이와 틈새를 구성하는 모호한 지점을 검토하여, 협소한 범주의 ‘예술노동’을 넘어서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창작자/창작자 범주에 속하지 않은 예술계 노동자/근로자 등으로 중첩되는 정체성과 모호한 경계를 비춰주는 5인의 인터뷰를 구성하였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예술노동’을 수집하면서, 혼자서는 이뤄낼 수 없는 결과와, 협력과 협업으로 이루어진 생산 과정에서 작은 범주의 예술노동을 비껴가는 실제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5인이 들려주는 어긋남과 모호함을 팟캐스트로 담아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이야기를 통해 예술문은 당신 안의 반짝이지 않는 돌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나만의 돌찾기’는 잠들어 있는, 당신 안의 반짝이지 않는 돌을 (다시) 반짝이도록 도와주는 웹 기반의 가이드이자 또 다른 원석들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입니다. 연결된 원석들은 당신 안의 반짝이는 돌을 설명해주는 또 다른 가이드이자, 예술노동의 울타리 안에서 함께하는 동료이자 친구입니다. 우리의 일은 결코 혼자 할 수 없기에 서로가 서로의 현장이 되어줍니다.

 

https://artgatefrom.me/

 

터키석은 자신의 자리를 되돌아보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 속에는 터키석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당신과 같은 터키석의 통찰을 지닌 이야기의 주인공은 유은순 큐레이터입니다. 유은순 큐레이터는 스스로를 조망하고 분석하여, 목표에 집중하고 선택과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통찰력을 지녔어요. 유은순 큐레이터는 2022년 5월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코디네이터로서  근무하였어요. 이 시기는, 자신의 노동과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코디네이터의 전문성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 코디네이터의 예술노동이란 무엇인지, 국내 미술계에서 코디네이터의 자리는 어떻게 발생했는지 ··· 이 과정에서 자신을 둘러싼 제도와 사회구조 안에서 코디네이터의 위치를 고민하기도 하였지요. 서울시립미술관을 퇴사한 이후엔 이러한 고민을 동료와 함께 나누고자 YPC(Yellow Pen Club)에서 ‘코디네이터 전문성 연구모임’라는 작은 모임을 조직했어요. 2022년에는 창원조각비엔날레에서 큐레이터로 재직하며, 기획자로서 자신의 길을 가기 시작했답니다. 창작가가 아닌, 그러나 예술노동의 자장을 형성하고 있는, 그리고 코디네이터로서 근무해온 유은순 큐레이터가 바라보는 예술노동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진행자: 코디네이터 전문성 연구 모임을 조직하셨어요. 

유은순: 2013년을 시작으로, 2014년에는 뉴딜일자리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근무하였고, 이후 2015년부터 2022년 5월까지 코디네이터(실무관)로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재직하였습니다. 계약의 형태는 바뀌었고, 무기계약직일 경우 제가 그만두지 않는 이상 평생 근무할 수 있지만, 다음 단계로 이행하는 데 한계를 느꼈어요. 그러면서 2018년부터 외부 전시 기획을 병행했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2022년 5월에 퇴사를 하고, 현재는* 창원조각비엔날레에서 큐레이터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코디네이터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지금이 아니면 코디네이터 직무에 대한 고민을 풀어낼 수 없을 것 같아 YPC(Yellow Pen Club)에 협조를 구해 ‘코디네이터 전문성 연구 모임’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아홉분 정도가 모임 구성원으로 참가하여, 『밀레니얼 선언』, 『커밍 업 쇼트』와 같은 책을 읽으며 코디네이터로서의 경험을 공유하였습니다.

*인터뷰가 진행된 2022년 9월 기준입니다.

진행자: (코디네이터의) 전문성에 대해서 꼭 이야기 해보고 싶은 계기가 있으셨나요?

유은순: 코디네이터는 끼어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결정권이나 자기 사업이 있는 직책은 아니지만,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업무 단계마다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실행시키는 일을 하죠. 하지만 인식은 그렇지 않고, 연차가 쌓여도 항상 제자리인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그러면 나는 전문성이 없는가, 아니면 항상 어떤 사업을 보조하는 역할에만 계속 머물러야 되는가라고 했을 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제도적인 그리고 어떤 직급의 한계가 분명히 있던 거죠. 사실 외부적으로 봤을 때도 코디네이터를 하나의 전문성있는 인력으로 바라보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제도적으로 차이가 있어요. 예컨대 학예사 자격증 신청 시 전시 코디네이터 근무경험은 공공기관이나 경력 인정 대상 기관에서 근무를 했다는 게 증명이 되면 학예사 자격증 취득을 위한 경력에 포함이 돼요. 그런데 예술인복지재단으로 가면 전시 코디네이터의 경력이 예술 활동 증명의 카테고리에 포함되지 않더라고요. 그러면 이것은 이미 제도적인 측면에서도 두 가지의 다른 시선이 있는 거죠. 사실 코디네이터는 미술계 진입을 위해 거쳐야 하는 단계로 인식이 되기 때문에, 코디네이터로서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찰나이고, 그렇기 때문에 코디네이터 스스로 말하지 않으면 코디네이터의 권리를 찾기 어렵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도안이나 바깥이나, 저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아니면 친구들의 경험을 봤을 때 코디네이터의 전문성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 될 것 같은 지점이 있었어요.

진행자: 전시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코디네이터 직군은 대부분 근로자 자격으로 근무하기에*) 스스로의 노동을 예술노동이라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했어요.

유은순: 예술노동이라고 했을 때 우선은 구분을 해야 될 필요가 있다고 느꼈어요. 예술 분야의 노동인가 아니면 창작의 의미가 곁들여진 예술노동인가. 기능적인 측면에서 근무하시는 분들 있잖아요. 무대를 만드는 분들이라든가 아니면 미술관에서는 온습도를 조절하는 분들. 아니면 입장객을 관리하고 안내하는 서비스 하시는 분들. 그럼 예술노동이라고 했을 때, 예술 분야에서의 노동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창작이 들어간 노동인가라고 했을 때 그거는 아닌 거잖아요. 근데 예술인복지재단에서 보는 건 창작이라는 의미가 들어간 노동인 건데 여기에서 코디네이터는 안 된다는 거죠. 그렇지만 분명 코디네이터는 어떻게 보면 원활한 창작을 위해서 윤활유같은 역할을 분명히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중략) 회색 지대 어딘가에 코디네이터라는 것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요. 그래서 전시를 만들어 가는 업무가 예술노동인가라고 했을 때, 큐레이터라든가 아니면 공연에서 감독의 영역은 이미 예술 노동의 영역으로, 창작의 영역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죠. 그렇지만 거기서 어떤 보조랄까 그런 역할을 하는 직군은 여전히 애매하게 남아 있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팟캐스트 인터뷰에는 반영되지 않아 웹진에 덧붙입니다. 

진행자: 그렇다면 창작과 노동에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어디에서 차이점을 느끼셨을까 혹은 차이점이 없다면, 어떻게 차이점을 논할 수 있을까도 여쭤보고 싶었어요.

유은순: 저는 사실 근로자와 창작자 노동을 구분한다고 했을 때, 조금 다른 시선에서 보고 싶은데요. 자본을 창출하는 업계에 있는 근로자와 자본이 아닌 다른 가치를 창출하는 업계라는 근로자를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자본을 창출하는 업계에서의 기준은 엄청 단순하잖아요. 돈을 창출하면 되는 거니까. 그래서 어떻게 보면 투자하고 그 다음에 그만큼 회수할 수 있는 그런 산술법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래서  경제적인 가치들로 빠르게 환원이 될 수 있는 건데, 여기에서 가장 효율적인, 자본주의의 최고봉은 역시 주식 혹은 증권 회사 같은 것이겠죠. 오로지 돈을 투자해서 돈을 벌어들일 수 있기 때문에. 그거에 대척점에 있는 게 어떻게 보면 예술이고. 예술은 엄청 인풋을 많이 해도 아웃풋은 정말 미미하잖아요. 그렇지만 전체 사회의 어떤 감성적인 혹은 어떤 전반적인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예술인데 분명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경제적인 가치로 환산이 안 되기 때문에 항상 뭔가 가장 복지적인 차원이랄까 아무튼 어떤 사회적인 체제적인 차원에서는 늘 가장 뒷전에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진행자: 예술을 처음부터 노동으로 인정하고, 그에 대한 가치를 부여한다면 상황은 좀 더 나아질까요?

유은순: 노동으로 규정을 하게 된다면 그것이 어떤 가치를 생산하고 있는 건데 경제적 가치를 생산하느냐라고 했을 때는 그건 정말 굉장히 소수고 미술시장에 잘 편입된 경우이죠.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경우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미술 전시에 참여하시고요. 노동이라고 했을 때, 여기에 정당한 대가들이 주려면, 환산할 수 없는 창작의 가치 이런 것들이 정말 가치가 있다고 인정이 돼야 되는데, 그게 사회 전반적으로 가능한가라고 했을 때 어려운 거예요. 저는 돌봄 노동도 같이 생각을 하게 되는데 (중략) 그 사회에서 분명히 누군가를 돌보는 것은 정말 필수적인 것인데 그게 여전히 자본을 창출하냐라고 했을 때는 아니기 때문에 평가가 절하가 되고 있는데, 창작도 저는 동일하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생략)

“창작자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지만, 전시와 공연을 생산하는 데 기여하는 예술계 노동자의 노동은 어떠한 예술노동으로 말해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의 시작으로 유은순 큐레이터를 예술문의 세번째 인터뷰이로 초대하였습니다. 유은순 큐레이터는 현재의 제도 내에서 창작의 경계, 예술노동의 경계와 같은 경계 지대에 위치하는 ‘코디네이터’의 노동성을 이야기함으로써, 예술노동의 제도와 개념을 반추하도록 돕습니다. 그녀와 대화하면서 예술노동의 재구성을 시도해 볼 수 있었을 뿐만아니라, 예술노동을 둘러싼 어긋나는 제도들까지도 다가갈 수 있었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와 함께한 시간은 반짝였습니다. 본 글에는 다 실리지 못한, 예리한 분석과 미래를 향한 열린 마음을 가진 유은순 큐레이터와 예술문의 자세한 대화가 궁금하다면 - 링크 접속해주세요!

팟캐스트로 듣기

 

미래를 여는 예술문(2022)

인터뷰이: 유은순

인터뷰어 및 글: 강정아, 최은영

웹 기획: 박선영, 우희서, 전보람

웹 개발: 우희서, 최진저(최진저 오피스)

녹음 편집: 이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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