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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숨은참조'/듣는다

[듣는다] 현장인터뷰 ✍ 옥민아

by 서울청년예술인회의 2020. 8. 13.

 

현장 인터뷰


✍ 옥민아

 

 


현장 인터뷰 소개글

글로, 말로 사람을 만나는 일은 오해의 연속입니다. 직접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눈다고 하더라도 상대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키워드를 가지고 ‘당신’을 만나겠노라, 다양한 ‘당신’께 요청을 드렸습니다.

한 사람의 삶과 예술관을 키워드 몇 개에 담겠다는 시도는 무모하고 건방진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수의 ‘당신’에게서 길어낸 다양한 키워드는 어느 한 지점, 한 사람을 가리킬지도 모릅니다. 이 인터뷰 프로젝트는 그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에서 우리가 이제껏 오해하고 있었던 익명의 ‘당신’을 새롭게 만나려는 시도입니다.

신중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당신’은 청년예술가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청년예술가입니까?


 

현장인터뷰 1차 <세부 사항>

장소: 용산구 한남동 
일시: 17:00 ~ 20:00
인터뷰어: 서울청년예술인회의 운영단 옥민아
인터뷰이: 시각예술가 J


 

Part 1.

‘당신’만의 이야기
: 당신에게만 묻는 질문.
당신만이 할 수 있는 대답.

 

#작업실 
#동네

 

 

좀 실용적이지 못 한 이유로 한남동에 작업실을 얻었어요. 
가장 친한 친구 사무실이 여기거든요. 그 친구랑 가까이 있고 싶어서 이곳으로 알아봤어요. 원래는 해방촌이나 5사단 쪽으로 가려고 했었거든요. 거기에 미술 작업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들어서요. 그 동네를 알아보니 여기는 이미 한물갔고 이제는 을지로가 대세래요. 그런데 전 을지로에서는 도저히 생활을 못 하겠더라고요. 친구들 작업실 가보면 화장실이 푸세식인 데도 있고, 월세가 적지 않은데 너무 낙후돼 있고. 여기에 사람을 있게 하는 것 자체가 불법적인 느낌이 드는 환경이었어요. 

전 일단 내 마음이 편해야 좋은 작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마음이 불편하면 부정적인 메시지들이 계속 줄줄 새니까, 어디를 가도 계속 내 동네 같지가 않고, 눈치 보이고 신경 쓰이고, 불편하고 그렇더라고요. 한남동은 사실 주변이 다 식당이고, 쇼핑하는 데여서 첫인상은 좋지 않았어요. 작업실로 쓸 만한 데가 나왔다고 연락이 와서 모르겠다, 일단 가서 보자, 그러고는 계단을 내려갔는데, (지하거든요) 마음이 되게 편하더라고요. 그때는 벽도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었어요. 그 노란 벽이랑 마감이 덜 된 듯한 천장이랑 이런 것들이, 공간의 느낌이 좋았어요. 그리고 지상으로 딱 올라가면 그냥 생활공간이죠. 일상, 식당, 사람들. 커피 마시고 수다 떨고, 맛있는 거 먹고, 너무 멀지 않은 곳에 사람 사는 세상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친구도 있고, 그래서 무리해서 잡았죠.

 

#커뮤니티
#동료
#공간

 


제게는 커뮤니티와 공간이 상당히 중요한 것 같아요. 
동네가 있는 거,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아는 친구들이 한동네에 있는 것도요. 제가 요즘 구청 생활문화조사원 활동을 하고 있는데, 동네 카페를 기점으로 그 주변에 계신 분들의 공동체 형성이 잘 되어 있어요. 각자 자기의 열정과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가끔 그렇게 곁에서 커피 한 잔, 영화 한 편 같이 볼 수 있고 수다 떨 수 있고, “야 너 그때 작업한다는 거 어떻게 됐니?” 물어봐 줄 수 있는 것이 참 좋아 보였어요. 말하자면 다시 혼자만의 시공간으로 넘어갔을 때, 내 작업 속으로 진입할 때, 힘을 주고 편안함을 주는 그런 역할을 공간과 커뮤니티가 하는 것 같아요.


#갈아 넣는 예술가 
#건강한 예술가 
#적정선

 


어떤 색의 완성도를 위해서 본인을 갈아 넣는 예술가도 있고, 조형물의 마감에서 완벽성을 추구하면서 본인을 갈아 넣으며 작업하는 예술가도 있고, 또 계보를 잇기 위해서 혼신을 다 하는 예술가도 있죠. 저는 물론 그런 분들을 존경하고, 그분들의 작업을 굉장히 즐기면서도 막상 저는 그렇게 못하겠어요. 

예전에 그런 실험도 했었어요. 몇 시간을 딱 정해서 움직이지 않고 이미지 편집을 하는 거예요. 그럼 그게 나한테 좋을까? 그 결과물에 대한 만족도가 더 좋나? 해 봐야 아니까 실험해 본 거죠. 그런데 저는 좋지 않더라고요. 끝나고 나면 항상 공허해요. 결과물에 대해서도 사람들과 소통할 때, 나를 갈아 넣은 고생을 인정받고 싶은 거죠. 누가 나한테 “너 그 시간 낭비한 거 아니야.”라고 꼭 좀 얘기해줬으면 좋겠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들더라고요.

그런 제 모습이 보기 싫었어요. 이 결과물을 내기 위한 과정에서 스스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불평, 불만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요. 나는 이게 너무 재밌고, 이 일을 하는 내 모습이 좋아서 한다는 의미를 흐리는 것 같았어요. 내가 너무 사랑하는 예술에 대해서 너무 잘못하는 느낌이 들었고, 내가 건강하게 즐겁게 즐기는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더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내가 나를 인정받기 위해서 징징거리지 않는 그 선을요. 그런데 그 선은 ‘연대’에 집중되어 있고, 내가 나를 다스리고 즐겁게 잘 할 수 있는 선까지예요.



#연대
#공동체




유학 시절에 자화상 작업을 했었어요. 
‘예술인으로 살고 싶은데 한 발짝 떼기가 왜 그렇게 겁이 나고 무서운 걸까?’ 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싶어서 시작한 프로젝트예요. 작업하고 있는 나를 내가 찍는 과정이었죠. 있는 그대로 혼란스러운 나 자신을 인정해준다는 점에서 그 프로젝트를 인상 깊게 평가해준 기획자가 있었어요. 그가 내 작업을 인정해주고 제 원안을 읽어주면서 이 체험을 다른 분들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저는 금세 수락했어요. 예술가 4~6명이 모여서 자기가 하고 있는 일, 그 일을 내 스타일대로 해야하는데 세상이 정해놓은 어떤 기준에 미치지 못할까 봐 겪는, 겁나거나 쫄아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바탕하고 나서 서로 응원해주고 대화하고, 잔뜩 공감하고, 울다가 웃다가 하는 자리가 생겼어요. 

폴라로이드를 이용해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제가 필름카메라로 그들을 찍어주기도 하고, 서로서로 찍기도 하는 워크숍을 진행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워크숍을 진행하는 호스트 작가를 만나게 되었어요.

저, 기획자, 호스트 작가. 이렇게 셋이 “우린 비슷한 덩어리를 가진 것 같다. 그 덩어리의 실체에 관한 공부를 좀 해볼까?” 해서 예술연구모임이라고 불렸던 스터디를 시작했어요. 서울문화재단에서 돈 받아서 하려고 지원했다가 잘리긴 했지만. 그때 잡았던 계획은 예술 매개자의 역할에 대한 탐구였어요. 저는 전업 예술인이고 호스트 작가는 생활 예술인이고 기획자는 문화기획자니까, 모두 예술을 매개하는 위치에 있는데 그 지점이 조금씩 다른 거죠. 그러면서도 공통적인 키워드가 ‘일상’이었고, ‘일상에 가까운 동시에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 예술’ 에 대해 문헌이나 사례도 연구해보고, 그걸로 워크숍을 기획하기도 했어요. 현재까지 모임을 유지하고 있어요.

또 다른 공동체는 제가 유아로 돌아가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에요. 
이제 어딜 가더라도 어른이어야 하는 적지 않은 나이가 되었고, 그래서 남들처럼 태연한 척하면서 마음에선 울고 있을 때가 사실 많거든요. 그러다가 이 공동체에서는 다 잊어버리고 열아홉 정도 때의 패기 넘치는 순수함으로 돌아가요. 저, 인테리어 디자인 하는 친구, 영상 하는 친구, 회사 다니는 친구, 박물관에서 일하는 친구, 대학원 다니는 친구, 프리랜서 기획자 2명, 이런 구성이에요.

 

#세상을 변화시키는 예술
#위로하는 예술
#연대를 통한 위로



저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예술, 위로하는 예술에 심취해 있는 사람이고 사회에서 그런 기능을 하고 싶어요. 
그렇다면 변화나 위로를 어떻게 줄 수 있을까 자문했을 때 개념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개인적이고 사소하고 소소한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 소소하고 개인적인 것들의 볼륨을 넓혀서 변화를 만드는 시도를 하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은 공동체, 연대, 지지, 연대를 통한 위로, 이런 것들을 곧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걸 예술이라고 설득을 하려면 나에게 어떠한 것이 더 많아야 할까? 하는 고민을 해요. 나의 활동을 통해서 나온 결과물이 더 많아져야 할까, 아니면 기성의 예술계가 사용하는 언어, 말하자면 미술사 책에 나올 법한 용어들을 내가 더 많이 무장해야 할까, 미술사에 나오는 작업일 수 있는 결과물이 더 많아야 할까. 여기에 대한 숙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어요.

 

#일상 속의 예술
#이게 예술이야?
#이런 게 예술이지



작년 1년 동안 《빨간통 프로젝트》라는 걸 진행했어요.
예술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자꾸 사람들이 “이런 게 예술인이지.”, “예술은 팔리는 거 해야 해.”라는 등의 얘기를 하는 것에 휩쓸리는 게 싫었어요. 그렇게 휩쓸리다 보면 예술인으로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고민을 하고 있었던 때예요. 

작업실을 얻었는데, 월세 때문에 또 돈이 나가고, 그러다 보니 더 불안해지고, 사실 작업실이 있다고 작업이 잘 되는 것도 아니었거든요. 작업실이 있는 동네가 주차도 힘들어서, 하루는 발렛 아저씨들이 놔둔 라바콘을 피해서 주차공간을 찾아 왔다 갔다 하는 스스로가 너무 처량하더라고요. 불현듯 일상 속에서 나는 말 잘 듣는 연습을 알아서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식당에서 자기들 손님의 주차를 위해 길에 라바콘을 놓으면 그게 사실은 불법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번 맞서 싸우질 않았으니까요. 그 라바콘으로 작업 한번 해봐야겠다 싶어서 1년 프로젝트를 짰어요. ‘~해야 한다’고 하는 것들에 “왜요?”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면 성공이라는 목표를 잡았죠.

처음 100일 동안은 라바콘의 이름부터 뺏기로 했어요. 그냥 ‘빨간통’으로 만들고 볼 때마다 사진을 찍고 세는 것을 했는데 총 7140개의 빨간통을 셌더라고요. 하지만 그7140번의 다짐이 있었는데도, 저는 핸드폰 케이스 만들고 굿즈 디자인하고, 티셔츠랑 핀 만들어서 팔아 보려고 하는 나를 발견하면서 “난 아직 덜 됐구나, 예술로 성공하는 소위 매뉴얼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수련을 시작했는데 아직 이렇게 나약하구나.” 느끼기도 했어요.

내가 확고하게 준비한 마인드 없이 예술계로 흘러 들어가서 이 사람 저 사람 따라하다 보면 내가 수습하지 못하는 상황을 안고 괴로워하게 될 것 같았어요. 저도 예술가로 성공하고 싶고, 또 그런 마음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해요. 다만 방법과 순서의 차이랄까요? 아직 휩쓸리는 나약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판단이 들어서 다음 100일은 라바콘에 대한 물리적인 공격을 했어요. 길 가다가 서 있으면 발로 걷어 차보기도 하고, 밀쳐 놓거나 위치를 바꿔 놓고, 돈 주고 라바콘 사다 작업실에 놓고 토치로 녹이고 톱으로 썰고 하면서 형태와 용도를 바꾸는 작업을 했죠. 그 과정이 저에게 뭘 주었냐면, 관계가 바뀌더라고요.

나한테 라바콘은 금지, 금기, 명령, 위계, 이런 것들을 상징하는 오브제였는데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 얘네가 그냥 딱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눈 떠보니 나는 빨간통인데 길바닥에 있으라 해서 있어야 하고. 차에 치이고 밟히고, 그런 얘네를 보면서 나는 연민이 또 들었어요. 얘네는 나에게 명령을 내리는 수직적인 관계였다가 이제는 같이 많은 시간을 보낸 친구처럼 되었다가, 또 내가 돌봐줘야 하는 어떤 존재로 관계의 변화가 생기면서 내가 하는 다른 작업들도 이런 메커니즘을 가지고 진행하면 좋겠다고 느끼게 되었어요.

이런 메커니즘이란,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어떤 오브제가 상징하는 바에 대해 가치를 평가하고, 그 가치를 대체하는 다른 가치를 제안하는 것이에요. 다음 100일 동안은 노끈 뜨개질을 했어요. 하찮은 소재를 부러 선택하고 거기에 쏟은 시간과 정성 그 자체를 갤러리 벽에 걸 수 있는 작업물의 형태로 만들었어요.

 

 

Part 2.

‘당신들’만의 이야기:
‘청년예술가’에게 묻는 질문.
‘청년예술가’라서 할 수 있는 대답.

 

#나의 연대기



27살부터 작업을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저는 신학대학교를 나왔어요. 원래 신학대학교에 가려고 준비했던 건 아니었어요. 고3 수능 성적표 받은 날, 수능 성적표를 들고 성당에 숨어들었거든요. 성적이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요. 

재수하긴 너무 싫고, 쪽팔리고. 제가 패기 넘치고 나대는 아이여서 12년 동안 반장을 했어요. 엄청나게 설치고 다닌 거죠. 그래서 나 어느 대학 갈 거라고 기세등등하게 사방에 공표하고 다니다가 성적표를 딱 받았는데, 원래는 Y대 경영학과를 가고 싶었지만 이건 Y대가 문제가 아니라 말도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성당으로 숨어들었어요. 

그때 마침, 중년의 여자분께서 제일 앞자리에 앉아 양팔 묵주기도를 하고 계셨어요. 양팔 묵주가 정말 힘들거든요. 묵주 알도 크고, 묵주 기도는 팔을 들어서 고행을 하는 거예요.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왜 저분이 저러고 계시는지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기도해도 들어주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기도한다는 게 뭐고, 종교가 뭐지? 신이 뭔데 그러지? 조금은 자책이었던 것 같기도 해요. 반발심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성적이 잘 나오고 공부를 잘하길 바란다면 독서실에 있었어야지, 성당에서 기도를 할 게 아니라. 그런 자책을 했어요. 대체 종교가 뭔지 모르겠는데 종교는 유지가 되고 사람들이 기도하고, 나도 종교를 통해 어떤 포근함을 느끼는 것 같은데 그 실체가 궁금했어요. 그날, 신학대학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막상 학교에 들어가니 신학이란 것은 너무 어렵더라고요. 어느 선까지는 논리적으로 접근이 가능한데 어느 선부터는 믿음의 도약이 필요한 부분이 있었어요. 난 고작 스무여 해를 살았을 뿐이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생애의 미묘한, 옳고 그른 것을 넘어선, 접근 방식에 따라서 달라지는 가치들을 만나면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어요. 동시에 저는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다른 학생들에 비해 외부인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내가 여자라는 부분도 작용했겠죠.

지금은 가톨릭 신학대학교가 교황청립으로 넘어가면서 여학생들을 많이 받기도 하고 한다는데 그 당시에 제 학년에는 여자가 저밖에 없었어요. 수녀님들 수사님들 동기 학사님들이 엄청나게 잘 챙겨주고 배려해주고 하는데도 비뚤어지더라고요. 어차피 이건 내 공동체가 아니다, 싶은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대학의 시스템은 너무 아름답더라고요. 서로의 고유성을 읽어주고 일탈하거나 비뚤어질 때가 있으면 선배들이나 신부님들이 잡아주고, 동기들이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고 하는 것들이 너무 질투가 났어요. 그들의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고, 너무 행복할 것 같은 거예요. 그때부터 연대와 연결에 대한 결핍이 있었어요.

학교에 다니면서 그럼 나는 어떤 쓰임을 가지는 사람인가 고민을 하다가, 그때 한창 영화 많이 보고, 주변에 배우를 지망하는 친구들도 있고, 늘 극적인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하다 보니 영화를 쓰는 것을 해보자, 내 길은 이건가보다 싶어서 유학을 떠났어요. 영화를 공부하러요.

유학이 고민을 잠식시켜 주지는 못했어요. 나의 쓰임에 대한 고민이요. 그때의 수많은 고민을 진정시켜줬던 게 암실에서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암실에서의 시간이 곧 고민의 시간이었던 거죠. 그 순간이 너무 좋더라고요. 내가 세상을 읽어내고 있구나, 거기에 내가 어떻게 속할 건지 고민하고 있다는 지점 자체가 소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 지점을 이미지화한 프로젝트가 자화상 프로젝트였어요. 시스템에 속하기 전의 두려움과 불안감에 대한 기록. 그 기록을 하는 프로젝트를 저희 사진과 교수님이 흥미롭게 보시고, 네가 하는 이 모든 고민과 불안감을 가시게 할 수 있는 곳이 있다, 그러셔서 거기가 어디냐 물었더니 현대미술이라 하시더라고요. 

“그곳에서는 네가 하는 고민들이 소재로 계속 쓰일 거고, 표현해내는 방식들도 거기가 맞다. 너는 그 언어를 쓰고 있기 때문에 이곳에 속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 거고. 네가 사용하는 언어들이 현대미술의 언어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이렇게 방향을 잡아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제 작업의 시작을 그때부터라고 상정하고 있어요. 27살이요.

 

#나의 서울



예술가를 위한 제도에서 뭔가 시선의 위계가 느껴져요. 취약계층으로 보고 있구나. 이거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연구소에서 공식이나 장치를 개발할 때는 개발지원금을 주잖아요. 그게 의미가 있고 도움이 될 거란 인식이 있어서 그런 거고, 예술가한테 주는 지원금도 마찬가지의 결이라고 생각해요. 예술가의 개발금을 주는 거죠. 우리가 하고 있는 게 의미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시선이 아니라, 우리가 아픈 손가락인 것 같은 분위기를 자꾸 느끼게 돼요. 나 아픈 손가락 맞나봐, 나 거지로 지내는 게 맞나봐, 점점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뭐든 기회만 주면 덥석덥석 가서 용역을 하다보면 “이게 예술인이야?” 싶다가도 “이게 맞나봐.”하기도 하고요. 이 같은 사회적 시선을 감지하고 열심히 피하려고도 했다가, 또 맞추려고도 했다가. 여전히 혼란스러운 것 같아요.

 

#나와 나 사이



전 요즘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중인 듯해요. 
한때, 굉장히 부정적인 자아 인식이 있었거든요. 나를 되게 낮게 보고, 이것밖에 못 해? 항상 나를 다그치고 불만족스러웠어요. 요즘에는 자신에게 ‘아이고 그래, 애썼다.’ 이 정도의 단계로 넘어가는 중인데, 또 이 관계는 영원할까? 언젠가는 또 다그치기도 하고 그러지 않을까? 생각해요.

애증 관계인 것 같아요. 난 나를 너무 사랑하는데 너무 끔찍하고. 쟤는 왜 저럴까, 진짜 안 그랬음 좋겠네, 그러면서도 열심히 도와주고 있어요. 얘 힘든 거 아니까, 그러니까 또 도와주게 되고. 얘기하고 보니 나는 나의 아픈 손가락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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