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웹진 '숨은참조'/듣는다

[듣는다] 현장인터뷰 ④ ✍ 옥민아

by 서울청년예술인회의 2020. 10. 5.

 

현장 인터뷰 ④


✍ 옥민아

 

 


현장 인터뷰 소개글

글로, 말로 사람을 만나는 일은 오해의 연속입니다. 직접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눈다고 하더라도 상대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키워드를 가지고 ‘당신’을 만나겠노라, 다양한 ‘당신’께 요청을 드렸습니다.

한 사람의 삶과 예술관을 키워드 몇 개에 담겠다는 시도는 무모하고 건방진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수의 ‘당신’에게서 길어낸 다양한 키워드는 어느 한 지점, 한 사람을 가리킬지도 모릅니다. 이 인터뷰 프로젝트는 그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에서 우리가 이제껏 오해하고 있었던 익명의 ‘당신’을 새롭게 만나려는 시도입니다.

신중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당신’은 청년예술가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청년예술가입니까?


 

현장인터뷰 4차 <세부 사항>

장소: 마포구 연남동 
시간: 20:00 ~ 23:00
인터뷰어: 서울청년예술인회의 위원, 작가 옥민아
인터뷰이: 무용가 J


 

#춤의 시작
#춤의 끝

 


7살 때부터 엄마에게 미술학원 보내 달라고 졸랐다고 해요. 내가 그림을 좋아한다는 건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8살 때는 춤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요. 
친한 친구가 무용학원에 다녔어요. 친구가 하는 건 다 해 보고 싶잖아요. 친구를 따라 무용학원이라는 데를 처음 가봤는데 굉장히 행복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러고 나서는 항상 춤을 췄네요. 학원의 권유로 한국무용 대회도 나갔었죠.

초등학교 5학년 이후로는 무용학원의 체제도 입시를 준비하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소위 예고 문화라고 하는 것이 그때부터 시작되더라고요.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춤추던 언니들이 갑자기 서열을 잡기 시작하고... ‘이게 뭐지?’ 하는 질문과 함께 넉넉하지 않은 집안 사정에 대한 생각도 놓을 수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춤을 포기하게 됐어요. 

하지만 마음 한쪽에 ‘대학 가서 꼭 다시 시작해야지’ 싶은 게 춤이었어요.

 

#미술의 시작

 


고등학교 1학년 말부터 미대 준비를 시작했어요. 성격이 모범생 스타일이라, 해야 하는 일이면 그 기준에 맞춰서 열심히 하는 편이었죠. 엄마가 힘들게 사시니까, 뭘 하든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었어요. 특출나게 미술을 잘했다기보다 엇나갈 수 없는 상황적인 무언가가 있었고, 스스로를 다그치면서 성실하게 입시 준비에 임했어요.

디자인을 전공했어요. 그런데 사실, 디자인을 배워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뚜렷하게 알지 못한 채로 결정했던 것 같아요. 작가 양성을 목표로 하는 미술 분야에선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 가장 우선인데, 디자인은 자기 고유성이나 개성도 있어야 하지만 그보다 우선하는 것이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파악하고 꿰어 가는 것이었어요. 그 자체가 어렵진 않았지만, 최종작업에서는 상업적인 완성도라든지 의뢰자의 의중 같은 것을 더 따라야 하는 부분이 있어서, 저에게는 조금 맞지 않았죠.

 

#춤의 다시, 시작

 


디자인을 전공하면서 내가 배우는 것, 그리고 나라는 사람에 대한 질문을 끊을 수가 없었어요. 그 질문들은 자연스럽게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던 무용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졌던 것 같아요. 시각 디자인 전공으로 대학 생활을 하면서도 춤을 접할 기회를 찾아다녔어요. 발레 수업도 들어보고 현대무용 공연도 찾아보고, 무용에 대해 계속 더 알고 싶은 것이 많아져서 웬만한 페스티벌 같은 건 다 찾아다녔어요. 한창 공연 시즌일 때는 1주일에 3~4회씩 공연을 보면서, 일반인들을 위한 현대무용 워크숍 등을 알아보고 참가했죠.

혹자는 ‘어떻게 디자인을 전공하다가 춤을 추겠다고 결심할 수가 있지?’ 싶겠지만 제게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어요. 한 번 어떤 감각이 열리고 난 후에는 그걸 계속하지 않으면 힘들어지는 성향의 사람이라 그랬던 것 같아요. 춤을 만나는 과정에서 사소한 소음들 안에서도 리듬을 발견하곤 했어요. 가령 공사장이나 지하철의 일상적인 소리도 스쳐 지나가지 않고 저에게는 모두 하나의 공연처럼 보였거든요. 사람들의 걸음과 행인의 시선이 오가는 와중에도 리듬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로 인해서 사는 것이 썩 재밌어졌다고 느꼈고요.

 

#미술로 무용을

 


저는 무용을 전공한 사람들과 시야가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무용하는 사람들은 몸 쓰는 사람들이니까 신체의 디테일한 것을 잘 살려요. 갓 무용을 시작했을 당시, 전공자들만큼 몸의 섬세함이 보이진 않았지만 대신 전체적인 그림과 무대 연출이 빠르게 눈에 들어왔어요. 

그리고 또 하나 다른 점은 무용을 대하는 데 있어 나의 감각이나 기분에 충실하기보다는 안무가의 의도와 요구의 핵심을 파악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것 같아요.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학습한 태도가 배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클라이언트가 주는 job을 수행하듯이요. 그래서 저를 찾는 안무가들은 테크니컬한 무용수를 원한다기보다 기존의 무용 언어를 벗어난 새로운 움직임을 요구하는 분들이 많았던 것 같고요.

 

#무용으로 미술을

 


나의 직관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고 할까요? 
무용 경험 이전의 미술 작업들은 좀 더 이성의 지배를 받는 느낌이었거든요. 과목에 따라서 일러스트레이션이나 영상 작업 등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수업이 더러 있었어요. 춤을 추다 보니 내 마음이나 몸이 뭘 원하는지 더 잘 알게 되니까 미술 작품으로 내 얘기를 하기가 더 쉬워졌어요. 머리로써 아는 자신만이 아니라 몸으로 느낀 감각적인 경험에서 오는 확신을 미술 과제로 풀어냈을 때, 보는 사람들이 더 신선하게 받아들이고 호응해줬던 기억이 있어요.

학교 다니면서 한 마지막 작업이 ‘종묘제례악’이었어요. 감각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들어온 소재였죠. 국악 교양과목을 듣다가 종묘제례악이 그냥 사람의 감성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철학적인 계산 안에 고안된 음악이란 걸 알게 됐어요. 그 무렵 공감각 소유자들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을 두고 있었거든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예술가들 중에 소리를 들으면 시각으로 보인다거나 하는 감각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고 해요. 그 맥락에서 종묘제례악의 소리를 시각화해보려는 의도로 수행했던 작업이었고, 100% 검증은 불가능하지만, 자료를 찾아가며 그 음악에 맞는 소리와 형태, 색깔을 찾아 배치하여 모션 그래픽으로 만들었어요.

 

#춤의 다시, 끝

 


졸업할 때쯤엔 현실과 타협해야 했어요. 대학교 3학년 때부터 면역 체계가 망가져서 몸이 좋지 않았고 체력적으로 힘든 일을 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 상태가 계속 지속되다 보니 우울증 같은 것도 오고, 또 졸업하자마자 망막에 문제가 생겨서 눈 수술하느라 한동안 집에 누워만 있었어요.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는데 눈이 망가지니까 굉장히 충격이 오더라고요.

조금씩 눈이 회복될 무렵, 대학 선배가 운영하는 영상 제작 회사 인턴으로 일하다가 운 좋게 대기업에 들어갔어요. 디자인 하청을 주고 관리를 하는 부서였는데 나 자신이 무너져 있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 일을 지시하고,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 누군가를 압박해야 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어요. 그 당시의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때는 나도 내가 이상한 걸 알았거든요. 

 

#춤의 또 다시, 시작

 


회사에 7개월 정도 다녔어요. 그러면서 심리 상담을 다니기 시작했고, 스스로를 들여다보면서 춤을 안 추면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됐어요. 춤을 춰야 내가 멀쩡하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회사를 바로 관두진 못해도, 퇴근하고 밤에 참가 할 수 있는 춤 워크숍들은 기회가 되는대로 다 찾아다녔어요.

업무가 많은 회사였던지라 7개월 정도 되니 낮과 밤의 이중생활이 서서히 버겁더라고요. 그래서 출퇴근 시간이 안정적인 다른 회사로 옮겼고, 거기서는 3년 정도 일하면서 낮에 일하고 밤에 춤 워크숍 다니는 생활을 지속했어요. ‘언젠가 디자이너에서 무용수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시점이 오면 바로 갈아타야지’ 하는 나만 알고 있는 마음을 품고서요. 

회사 마치면 춤 워크숍에 가는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유럽에서 공부를 마친 안무가 한 분이 춤 워크숍에 오셨어요. 당시 그분 작업이 기존의 한국 무용 씬과 너무 다른 스타일이어서 본인도 한국에서 당장 뭘 해나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그분과의 인연으로 참여하게 된 무용단에서 워크숍을 지속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어요. 그 무용단이 작업하거나 아이디어를 내는 방식들이 저와 맞는 부분이 많았거든요. 그 안무가 분이 제게 함께 작품을 해보자고 제안했고 그 작품은《서울공연예술제》(SPAF; Seoul Performing Arts Festival)에 출품됐어요.

그때가 스물여덟이네요. 기회가 좋아서 그때 그 작품은 대상을 받게 됐어요. 그런데 부상이 독일 페스티벌에서 공연하고 그곳의 유명한 안무 학교에서 다 같이 2주간 워크숍을 하는 거였어요. 거기다 그 안무가 분이 포르투갈에서도 공연을 계획한 것이 있어서 총 일정을 다 소화하려면 한 달은 꼬박 유럽에 체류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회사에서 한 달씩이나 휴가를 줄 리 없으니 ‘앗싸 이때다’ 하고, 퇴직을 결정했어요.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니까요.

유럽에서 너무너무 좋았어요. 외국에 여행을 가도 그저 관광으로 가고 싶지는 않다고 늘 생각해 왔거든요. 일하러나 공부를 하러 가는 게 아니라면 굳이 외국에 나가지 않겠다는 이상한 고집이 있었는데 마침 공연으로 가게 된 거죠. 
포르투갈에서 머문 곳들은 모두 관광객이 알 만한 도시가 아니었어요. 검색해도 자료가 별로 없고 길에 아시안이 걸어 다니면 다들 신기해하면서 쳐다보는 그런 곳이었어요. 완전한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신선했어요.
 

 

#안 하면 죽을 것 같아서 하는 예술

 


저는 춤이 가진 명상성을 좋아해요. 그걸 통해서 내 안을 들여다봐야 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정말 춤에 몰입했을 때 오는 정화의 감각도 중요해요. 나는 이렇게 춤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그 사실을 부정하는 시간을 오래 가졌어요. 춤은 내겐 사치스러운 꿈이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도 내면의 어떤 문제들은 해결이 안 되고 있었고요.

회사 다닐 때 몸이 아프고 마음도 힘들던 와중, 즉흥 춤 워크숍을 들으면서 꽤 충격적인 경험을 했어요. 춤판 안에서 다른 즉흥 춤 무용수들과 움직임을 하는데 그때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문득 목격하게 된 거예요. 사회와 대인관계 속에서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자기방어를 못 하는지를요. 예를 들어 접촉, 연결을 주제로 즉흥을 할 때 무용수 중 누구라도 내게 다가오면 나는 끊임없이 그것을 수용만 하고 있었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나 관계는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때 비로소 나의 상태와 마음의 문제를 대면할 수 있었고 아픔을 풀어갈 길을 보게 된 것 같아요. 몸을 움직이지 않고 머리로만 이해하려 했다면 알 수 없었던 모습을 깨닫게 되면서, 머리가 모르는 것은 사실 몸이 알고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때부터 춤은 사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내 삶에 너무나 필요한 일이 되었고, 스스로 무용수로서의 정당성을 마련한 것 같아요.

 

#나의 예술

 


무용이냐 미술이냐 하는 식의 구분은 수단의 차이에 불과한 것 같아요. 
미술관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일도 점점 많아지고요. 다만 미술관과 극장이 퍼포먼스를 다루는 태도에는 차이가 있죠. 퍼포먼스 작업으로 미술 작가와 협업할 때 알게 됐어요. 극장에서 하는 퍼포먼스 공연은 관객을 어두운 공간에 한 시간씩 묶어 놓잖아요. 시간성 안에 켜켜이 쌓이는 임팩트를 줄 수가 있죠. 하지만 미술관에서는 관객의 이동이 자유로운지라 오가면서 보는 퍼포먼스 작품의 찰나적 이미지가 관객에게 닿게 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걸 발견하는 건 재밌는 일이었어요.

근원에 관해 이야기 해주는 것들을 예술작업을 통해 표현하고 싶어요. 세상을 이루고 있는 근원적인 힘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요. 졸업 작품으로 종묘제례악을 했던 것도 보이는 물질이나 현상은 다양하지만 그것들을 하나로 설명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어요. 춤을 추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인 것 같아요. 춤을 춤으로써 내가 어떤 대상이 되어볼 수 있으니까요.

 

#정체기

 


장르 자체가 나를 규정한다는 생각은 안 하는 편이에요. 
‘난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계속 열려 있었던 것 같거든요. 하지만 무용 작업에도 한계가 올 때가 있었어요. 한 안무가나 연출가와 오래 작업을 하고 극장 작업 위주로 작품을 하게 된 후로는 창작과정에서 얻는 성장이 조금씩 사라지고 재미도 덜해졌어요. 

기술이 다듬어지고 신체를 단련하는 차원의 발전 말고, 내가 원하는 성장은 좀 다른 것이었나 봐요. 새로운 것이 탐구되거나 발견되지 않는 채로 계속 한 안무가와 일하면서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너무 잘 알게 되어서 그냥 그의 입맛을 따라 작품에 임하는 일들이 반복되었어요.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던 때의 나와 지금 내가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고민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춤에서 자연으로

 


요즘의 관심사는 밭일이에요. 작년부터 텃밭 농사를 시작했으니 올해 2년 차네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추나 고수 같은 식물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있잖아요? 단박에 떠오르는 식물의 모양이요. 인간이 맛있게 먹기 좋은 딱 그 찰나의 형태만을 우리는 알고 있는 거더라고요. 그것들의 씨앗도 너무 새로웠고, 싹을 틔울 때의 모습도 혁명적이었어요. 어떤 한 식물의 생육 전체 과정은 다양한 모습들로 이루어지는데 우리는 그들의 ‘청년기’만을 알면서 전체를 다 안다고 생각하고 사는 거죠. 상추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상태가 한참 지날 때 까지 계속 자라면 정말 거대하게 크고, 고수의 씨앗은 핫 핑크색이에요. 밭일을 하기 전에는 저도 전혀 몰랐어요. 그들의 유아기와 노년기를요.

아이를 키우면서 저의 관점이 변한 것 같아요. 지구에 사는 우리는 단편적인 것을 보고서 그것에 대해 다 안다고 착각하는 것 같아요. 환경 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그런 것 같고요. 어떤 물건이 나에게 오기까지의 과정을 다 알기 힘들어지기 때문에 물건을 쉽게 취하고 쉽게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식물을 키우면서 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사물이든 생물이든 이것이 나에게 오기까지의 과정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된다면 인류 전체가 무언가 변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죠. 

예술이 그런 질문을 해줬으면 하고 바라요. 새로운 것들, 새로운 현상들에 집중하기보다 지금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지만 그 익숙한 것들의 진짜 모습을 다시 찾아주는 역할을 예술이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림 그리는 것과 춤추는 것 말고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일은 자연 관찰이었어요. 요즘 원형을 돌아보는 리서치 작업을 하다 보니 지금의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 대부분이 어린 시절 속에 다 있었다는 것을 계속 느끼게 돼요. 

 

#나와 나 사이

 


지금은 아이를 키우다 보니 예술가로서의 나보다 생활인으로서의 내가 더 강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자연인으로서의 나는 다시 예술가인 내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중일 거에요. 굳이 표현하자면 떨어져 지내는 약혼자 같은 거랄까요? 언젠가 다시 만날 건데 지금은 곁에 없는... 사랑은 하는데 자주 만나진 못하고, 그건가 봐요, 롱 디스턴스. 예술가로서의 나와, 자연인으로서의 나는 서로 롱디 중이에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