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웹진 '숨은참조'/듣는다

[듣는다] 현장인터뷰 ③ ✍ 옥민아

by 서울청년예술인회의 2020. 10. 5.

 

현장 인터뷰 ③


✍ 옥민아

 

 


현장 인터뷰 소개글

글로, 말로 사람을 만나는 일은 오해의 연속입니다. 직접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눈다고 하더라도 상대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키워드를 가지고 ‘당신’을 만나겠노라, 다양한 ‘당신’께 요청을 드렸습니다.

한 사람의 삶과 예술관을 키워드 몇 개에 담겠다는 시도는 무모하고 건방진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수의 ‘당신’에게서 길어낸 다양한 키워드는 어느 한 지점, 한 사람을 가리킬지도 모릅니다. 이 인터뷰 프로젝트는 그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에서 우리가 이제껏 오해하고 있었던 익명의 ‘당신’을 새롭게 만나려는 시도입니다.

신중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당신’은 청년예술가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청년예술가입니까?


 

현장인터뷰 3차 <세부 사항>

장소: 성북구 성북동 
시간: 19:00 ~ 22:00
인터뷰어: 서울청년예술인회의 위원, 작가 옥민아
인터뷰이: 종합예술인 K


 

#피아노에서 사물까지


집에서 없는 돈에 투자를 해서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웠어요. 
초등학교 4학년쯤부터 피아노 연습이 너무 물리고 재미가 없는 거예요. 연습실에서 혼자 울고 그랬어요. 집에서 피아노 연습을 할 때도 아버지께서 자를 들고 제 손등을 때리면서 가르치셨어요. 하루에 6시간씩 연습을 시키시고, 너무 엄하게 대하셨어요. 그러다 초등학교에서 특활부서를 정할 때가 되었는데 제가 다닌 학교에는 요리부 아니면 사물부 두 가지밖에 없었어요. 막연하게 내가 그래도 음악을 하는 사람이니까 요리보다는 사물이 낫지 않을까 하고 사물부에 들어갔어요. 처음으로 장구를 치는데, 그게 너무 재밌었던 거죠.

전 어릴 때부터 사람들 앞에 서는 게 그렇게 신났어요. 나서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니까 선생님께서 “너는 장구 말고 꽹과리를 쳐라, 상쇠를 해라” 이렇게 된 거죠. 상쇠는 말하자면 사물에 있어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은 존재예요.

꽹과리를 잡고부터는 사물에 더 빠져버려서, 부모님 몰래 피아노 학원을 빠지고 사물놀이 연습을 하다가 혼나고 맞기 일쑤였죠. 하지만 절 막을 수 없었어요. 기대도 안 했는데 대회 나가서 상도 타오고 그러니까, 학교에서도 좋아해 주고 아버지도 인정해 주기 시작했어요. 그러니 기분이 좋아서 더 열심히 연습했죠.  

초등학교에 이어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도 사물을 계속하다가 아버지께서, 기왕 사물을 할 거면 차라리 고등학교를 예고로 가라 하셨어요. 그때부터 국립국악고등학교를 준비했어요. 강릉에서 춘천을 왔다 갔다 하면서 입시 준비를 엄청 열심히 했지만 똑 떨어졌어요. 대 충격이었죠. 어쩔 수 없이 사물 동아리가 있는 강릉의 고등학교에 입학했어요. 상업고등학교였어요. 희한하게 사물놀이를 특화해서 교육하는 곳이었죠. 제 사물놀이 선생님께서는 강릉 단오굿에서 굿을 하는 분이었어요. 그 선생님께 굿을 배우고 그것을 입시 실기에 접목해서 대학에서도 계속 연희를 배우게 되었어요. 

 

#사물에서 연극까지

 


대학에 가고 보니 뭘 어떻게 따라가기가 힘든 거예요. 
국악예고 나오고 풍물 전공한 정통파 친구들에게 이상한 박탈감을 가지고 지냈어요. 강릉에는 풍물을 하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앉아서 하는 사물놀이 위주로 배워왔죠. 연희는 풍물하는 친구들의 비율이 높은데 저는 그 친구들과 어우러져서 함께 연주하기가 어려운 거예요. 점점 그저 뒤에 앉아 있거나 춤이나 노래 등 다른 분야로 빠지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연극을 전공하는 친구들이 제게 연희극을 함께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해 왔어요. 그저 재밌을 것 같아서, 참 단순한 이유로 시작하게 되었죠. 처음으로 연극 공연을 접하게 되고 연기를 하게 된 거예요. 

모두 그렇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연희과 사람들은 연기를 한다는 것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이 있거든요. ‘우리는 악기로, 연주자로 대학에 들어왔는데 왜 우리가 연기도 하고 춤도 춰야 하느냐’는 인식이 있는 거겠죠. 전 다른 장르, 다른 영역을 경험하는 것에 대해 이상할 만큼 거부감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연에서 연기를 자주 하게 되었어요.‘ 

 

#연희자에서 배우까지
#배우에서 음악감독까지

 


2~3년 정도 학교에서 연희공연의 연기를 제가 거의 전담하다 보니, 연극연출 전공자의 졸업 공연에도 참여하게 됐어요. 

악기 말고도 직접적으로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즐거웠어요. 신나게 공연을 올리고 보니 저도 졸업할 때가 되었더라고요. 그때는 ‘졸업하면 뭘 하지?’ 하는 생각도 없이 이래저래 놀고 있었는데, 저와 친분이 있는 국악가가 연희극 ․ 연기 방면으로 제 진로에 대한 운을 띄우셨어요. 그분의 제안이 연극극단에 연수 단원으로 들어갈 결심의 동력이 되었어요. 전통극, 연희극의 요소를 녹여내어 연극을 만드는 극단이었거든요. 극단에서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연주자로, 또 배우로 활동했어요. 

이후에는 연극 음악 작업을 주로 했네요. 낭독극에 연희적인 재담이 섞인 형식의 공연에서 타악을 담당하기도 하고요. 

 

#전통
#뿌리

#장인
#이단아

 


돌이켜 보면 저는 대학에서 약간 이단아 같은 존재였어요. 고집을 부릴 만한 전통의 뿌리가 나에게는 없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사물놀이를 오래 했고 즐겁게 지속했지만 더는 내가 승부를 볼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대학에 와서 깨닫게 되었고 굿에도 그렇게까지 흥미가 있지는 않았던 거예요. 그러다가 연극을 공부하는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말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그리고 알고 있는 세계마저 다른, 그 다름이 너무 재밌었어요. 

연희과에서는 “너는 왜 자꾸 외부로 도느냐, 너도 연희를 제대로 깊게 파봐라” 하는데 저는 이미 마음이 떠난 거죠. 연희과에선 나를 인정해주지 않았어요. 게다가 선생님들도 주로 남자들에게 악기를 시키고 여자들에게는 춤이나 무용을 시키셨는데 그마저도 난 시켜주지 않고. 연희공연에서 늘 연기를 담당하곤 했으니까요. 

전 제가 장인이 될 수 없다는 걸 일찌감치 알았어요. 
제 꿈이 무형문화재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한테 사사를 하여서 우리의 것을 잘 지켜나가야겠다는 사명감도 없었어요. 강릉에서 배우고 익혔던 단체에 대한 소속감도 지나고 보니 크지 않았고요. 지방에서 온 친구들은 자기 지방의 단체에 단단하게 소속돼있고 선생님들의 챙김도 지속해서 받곤 하는데 저는 그런 것들에서 멀어지면서 마음이 더 떠난 것 같아요. 

 

#자격지심을 홀가분함으로
#불안을 욕심으로

 


배우로서 나의 가장 큰 장점은 연기 전공자가 아니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배우로 작업할 때 그 때문에 더 마음 놓고 할 수 있었어요. 연희과 안에서는 자격지심이 내 안에 계속 있었던 것 같아요. ‘너는 무속 전공인데, 악기를 뚜렷하게 잘하는 것 같지도 않고 소리나 굿에 능한 것 같지도 않아’ 이런 시선을 이겨내기 위해서 나 스스로 ‘난 다양한 것들을 할 수 있어, 잘 흡수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라고 세뇌해야 했어요. 

연희판에의 나는 유달리 잘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연극계 사람들은 내가 북 하나를 쳐도 너무 좋다 잘한다고 해주고 나의 퍼포먼스를 존중해 주었어요. 아이처럼 응원에 목말랐나 봐요. 칭찬에 신이 나고 더 씩씩해지는 거죠. 그 다른 창작 방식에서 오는 힘에 매료가 됐어요.

 

#기다리는 사람에서 만드는 사람으로
#B급 국악
#'웃고 끝'이 뭐 어때서?

 


최근 몇 년은 극 음악을 많이 했어요. 
극 음악 작업을 하다 보면 그날의 연습이 끝난 후, 연출이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코멘트를 줄 때 극을 밖에서 바라봐야 하는 시간이 많아져요. 그러다 보니 ‘저 배우가 이렇게 하면 더 재밌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나, 연출이 노트를 줄 때 ‘아, 나도 이런 방향이 맞다고 느꼈어’ 하는 식으로 공감하고 상상하게 되는 것이 흥미로웠어요. ‘나라면 이렇게 할 텐데’라며 혼자 아쉬워하기도 하고요. 그러다 문득 ‘언제까지 누가 불러줘야만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싶어졌죠. 나는 예술밖에 못 하는데, 나이 마흔이 넘어서 누가 날 불러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고민이 생겼어요. 그러다가 내가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연출도 해보고 창작과정을 주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2018년도에 덜컥 사업자를 만들었고, 마침 운 좋게 서촌의 예술공간에서 기획 일을 하는 지인이 “공간을 1주일 내줄 수 있으니 그 안에서 네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보라”는 제안을 한 거죠. 정말 좋은 기회였고, 또 좋은 사람들이 함께 해줬어요. 

그냥 웃긴 거, 재밌는 걸 하고 싶었어요. 국악을 자꾸 신성시하고, 숭고하고 지켜야 하는 어떤 것으로만 보려 하니 대중들이 지루해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죠. 편하게 보고, 웃고 끝나는 <개그 콘서트>처럼 국악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국악으로 <개그 콘서트>를 만들어 보자, ‘B급’ 국악을 만들어 보자는 결심을 했어요. ‘B급 국악’이라는 황당할지도 모를 제안으로 친구들을 모았는데 보수가 없는데도 다들 와 줬어요.

연극 음악을 할 때 어떤 작곡가 친구를 도와준 적이 있어요. 국악으로 창작 음악을 하는 대회였는데, 갑자기 퍼커션 연주자가 참가를 못 하게 돼서 급하게 합류하게 되었어요. 

“내가 이번에 널 도와줄 테니 다음에 나를 도와라” 하는 으름장 같은 조건으로 참여한 거였죠. 그런데 덜컥 대상을 받은 거예요. 보통 그런 대회에서 입상하게 되면 그 작품과 팀이 활동을 이어가게 돼요. 그래서 그때의 팀과는 2015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활동하고 있어요. 

‘B급 국악’을 만들려다 보니 국악이 필요하고 음악도 필요했어요. 대회에 함께 나갔던 가야금  친구 한 명, 베이스 기타 한 명, 건반 겸 작곡가 한 명을 섭외했고, 대학 동기 중에 저랑 죽이 잘 맞고 연기와 타악을 동시에 소화할 수 있는 언니 하나, 같이 작업했던 배우 중 재밌는 기억이 있는 사람 하나를 또 불러서 총 6명이 함께 공연을 만들게 되었어요. 

 

#내 작품
#자존감
#창작 근력

 


제게는 그 공연의 의미가 정말 커요. 
스스로 작품을 만들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무언가 이뤄낸 거죠. 공연이 좋든 말든, 평이 어떻든 다 필요 없고 이걸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자존감이 단단해지는 계기가 되었어요.

공간을 줄 테니까 마음대로 해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부른다고 달려와서 함께 해주는 동료들이 있었던 것도 정말 대단한 일이었던 것 같아요. 그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기쁨은 ‘나는 내 공연이 있는 사람이야’ 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에요. 

스스로 창작한 공연이 있는 사람. 
이전에는 프로필을 써야 하면 어디 동이, 어디 공연 타악 주자, 배우 이런 거 쓰다가 프로젝트팀 대표, 국악 공연 연출. 이걸 스스로 쓸 수 있게 된 거죠. 힘이 생기는 느낌이었어요. 항상 어딜 가도 그걸 제일 먼저 내밀게 되고요. ‘누가 날 부르지 않으면 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두려움도 없어졌어요. 물론 그 공연은 이후에 지원사업에 선정되지 않아 지속하지 못했지만요. 

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알게 되니까 또 새로운 작업을 하게 되고, 새로운 구상을 하게 되는 거죠. 그 새로운 구상으로 두 번째 공연을 만들게 되었어요. 기획 겸 배우인 친구가 지원사업을 같이 내보자고 해서 시작된 작품이었고, 일인극처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혼자서는 힘들 것 같아 악사 두 분 그리고 첫 공연을 같이 했던 건반 ․ 작곡 친구를 부르고, 장구와 연희를 하는 연희자가 저와 댓거리를 주고받는 재담연기를 하는 식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대본을 제가 쭉 썼어요. 정말 맥락 없는 공연이었는데, 제가 방자 했다가 이도령 했다가, 전라도 얘기 다 한 거니까 경상도 얘기는 뭐가 있지? 논개 하자 해서 갑자기 뮤지컬 노래 부르다가, 시간이 이제 없네 하고 아리랑으로 퉁칩시다! 하면서 강원도 아리랑을 막 부르는 식이에요. 노인 분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이었는데 너무들 좋아하셨어요. 중간에 관객을 모셔서 치마 입고 춘향이 좀 해달라고 춘향을 시키는데. 그것도 너무 재밌어하시고.

 

#종합예술인
#무계획이라는 계획


배우를 했던 경험 때문에 그렇게 용감했을 수 있었죠. 엄청나게 좋아하고 우시는 분들도 있고, 다 같이 일어나서 춤도 추고요. 정정하신 분들과도 함께 했지만 진짜 몸이 불편하신 분들이 많은 양로원 ․ 실버센터도 갔었어요. 그런데 한껏 쳐져 계셨던 분이 나중에 일어나서 손뼉을 치고 어깨춤도 추시는데 그 모습이 너무 힘이 되는 거예요. 감동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그렇죠. 어떻게 보면, 저 스스로 종합예술인이라고 말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계기이기도 해요. 예전엔 우스갯소리처럼 말하던 타이틀인데 지금은 진심으로 얘기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저 종합예술인이고, 어제는 이거 했고 오늘은 이거 합니다. 그리고 전 이게 즐겁습니다.

종합예술인이라는 말이 오그라들 수도 있어요, 누군가에게는요. 
저로서는 무엇이든 가능한 거라는 생각이에요. 제가 무언가를 하면 관객들이 봐주잖아요. 그렇게 하고 보는 관계가 예술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같아요. 일상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하고 보고 듣는 것들과는 다르게요.

최근에 대회를 하나 나갔는데, 전통 어법을 최대한 사용해야 한다는 취지가 있었어요. 좀 웃기지만 제가 그렇게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더라고요. 창작 음악만 했지, 소속돼있는 팀에서도 퍼커션이니까 전통악기보다 되려 서양악기를 많이 다루고요. 나갈까 말까 하다가 도전하기로 했는데 준비과정에서 내가 못할 게 전혀 아니라는 것을 느꼈어요. 처음으로 장단을 해체하고 파괴해보는 시간을 가졌다는 걸 스스로 인지할 수 있었죠. 그래서 요즘 저의 이슈는 다시 전통, 국악 음악인 것 같아요. 더 만들어보고 싶고요.

그전까진 자신이 없었거든요. 저보다 더 전문가들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대회에서 수상하면서 자신감이 붙은 거예요. 그래서 대학교 때 배운 것들을 상기하면서, 음악을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어요.

오히려 저에게 새로운 분야예요. 맞아요. 신선한 느낌이에요. 저는, ‘앞으로 이걸 하면서 살겠어’ 하고 계획한 적은 별로 없어요. 그저 운이 좋고 복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특별히 헤매고 다니지 않아도 계속 새로운 공연과 창작이 주어져 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그때 그날그날 살고, 다음에 잡힌 공연을 준비하고, 지금은 또 할 일 하고, 이런 식이에요. ‘앞으로 10년 뒤에는 나의 무엇을 더 발전시켜서 어떤 일들을 하자’ 같은 생각은 별로 없어요.

 

#나와 나 사이


이 사람(자연인으로서의 나)을 계속 궁금해 하는 사이일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사람은 마음을 확 크게 열지 않고 저(예술인으로서의 나)는 계속 대시를 하고요. 연인 관계 같은 느낌 말고, 이 사람이 궁금하고 알고 싶다는 느낌으로. 

맥락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전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다가도 혼자 있는 시간을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거든요. 예술을 할 때는 저를 계속 드러내야 하고, 그러려고 애쓰며 살았어요. 그런데 자연인으로서의 나는 굳이 그런 노력을 하지 않을 것 같아서예요. 그런 노력 없이 그냥 이렇게 있을 것 같은 사람이라서. 그런 느낌이 드네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