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하기: 나를 마주보고 두드리기
*(칠) 격: 치다, 부딪히다, 마주보다, 보다, 두드리다, 지탱하다.
글쓴이: 곽혜은
이 글을 읽는 이가 얼마나 공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닌 부모로부터 태어남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 순간에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다만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해주시는 부모님 아래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인생 목표였으리라.
건강하게 태어난 나는 그런 점에서 꽤 괜찮은 딸내미가 아니었나 싶다. 여기서 최고의 딸래미가 아닌 이유는 자라면서 눈이 많이 안 좋았기 때문에 성인이 될 때까지 안경을 썼을 뿐 아니라 약간의 난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난시, 근시 외에도 기억 안 나는 눈병이 무언가도 있었기 때문에 초등학생 때에는 건물 2층에 위치하던 안과에 자주 들렀는데, 엄마는 그때마다 내가 무서워하니까 1층에 있는 피자몰로 데려가서 피자를 사주시곤 했다. 덕분에 안과를 생각하면 그렇게 덜덜 떨릴만한 곳은 아니게 되었다.
학교에 다니게 되니 건강 외에 새로운 퀘스트가 생겼다. 더 이상 건강한 것 만이 목표가 아니게 된 셈이다. 같은 나이의 친구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으면서 자연스레 나와 맞는 아이들과 함께 놀고, 놀고, 놀았던 기억.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집도 그렇고 초/중/고등학교 전체적인 분위기도 그렇고, 그렇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는 큰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운이 좋았지.. 만약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환경 속에서 내가 살았더라면, 그래서 1등을 하기 위해 나를 갉아먹어야만 하는 환경 속에서 살았다면 나는 지금의 나로 살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 누구나 그렇겠지만 특히 나는 주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내 삶을 채웠던 것은 주로 운동이었다. 초등학교 땐 피구, 중학교 땐 축구, 고등학교 때는 농구와 음악줄넘기였다. 특히 중학교에서 했던 축구가 너무 재밌어서 고등학교는 함께 놀던 친구 따라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생 첫 ‘좋아서 선택한’ 것은 고등학교 진학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도 운동 쪽으로 진로를 결정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운동이었지만 취미는 취미일 뿐이라는 것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대학진학의 목표를 결정하는 데 있어 내게 중요했던 것은 돈이었다. 돈. 나는 왜 그리 돈을 많이 벌고 싶었는지, 그것은 내 환경이 나빴다기보다는 TV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었다. 특히 드라마 속에서 보이는 삶은 목적 없이 하루를 사는 나에게 거시적인 목표를 심어주었다. 어쩌면 그때는 꽤 구체적인 목표였으리라 생각한다. 대학을 어디로 가고, 이때쯤이면 돈을 이만큼 벌어서 한강 근처에 있는 아파트 15층 정도 되는 곳에서 살면서 저녁에는 한강뷰를 보며 와인을 까는 것. 생각해보면 이것은 삶에 대한 목표라기보다는 이상향에 가까워 보이지만 삶에서 처음으로 인생의 목표라는 것이 생겼기에 대학에 대한 불씨를 지피게 되었다.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경제학을 통해 배운 점이 있다면 세상은 숫자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수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삶은 흥미롭긴 했지만 자칫 내 인생이 수로 매몰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숫자와 함께 하는 삶은 기존의 삶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거스르는 일이기도 했다. 나의 눈이 숫자 필터로 갈아 끼워질 때면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 중의 하나인 ‘직관’이 사라지고 이에 따라 사유될 수 있었던 것이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다른 것을 떠나서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르는 삶을 숫자로 채우는 것이 끔찍하기도 했다.
나는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지금의 예술작업을 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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