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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숨은참조'/말한다

[말한다] 칼럼|예술노동에 관한 어떤 생각 ✍ 성지수

by 서울청년예술인회의 2020. 8. 14.

 


미투운동, 노동으로서의 창작 활동을 요청하다


✍ 성지수



2018년 한국사회를 강타한 #미투운동은 문화예술계, 특히 연극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랫동안 도제식-가부장적 질서 아래 놓여 있던 예술 활동은 ‘돈이 되지 않아도 지속하려는 열정’이 필수적인 무언가로 일컬어지며 각종 폭력을 비가시화시켜왔다. 한 줌의 자원과 기회를 독점한 극단 대표-연출가-선생님-교수-지원사업 심사위원은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여기에 “연극은 원래 배가 고픈 것”이라는 오래된 명제가 달라붙으니 나와 내 동료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당연한 것이 되어왔다. 광장에 나가 “‘Show must go on(쇼는 계속돼야 한다)!’ 공연예술계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술가들의 끝없는 열정을 칭송하는 말인 동시에 공연을 위해서는 최저 시급, 성적 자기결정권, 인권 등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라 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던, ‘침묵의 카르텔’에서 모두가 방조자였다. 폭력의 굴레를 버티지 못하면 연극을 사랑하지 않는, 연극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 정도로 치부되곤 했다. 

‘원래 그런 것은 없다’ 는 선언으로 예술대학과 연극 동아리를 탈주하면서 시작된 청년 창작팀 콜렉티브 뒹굴(이하 뒹굴)¹⁾은 미투운동 이후에는 창작 활동을 노동으로 보기 위한 예술계 담론 형성 작업을 이어왔다. 왜냐하면 “작품에 대한 창작자의 ‘열정(이라는 말로 가려지던 폭력과 착취의 구조)’이 연극 산업을 지탱하는 거의 전부였던 시대가 이제는 막을 내려야 한다고, 관객들도 그렇게 ‘사람을 갈아 넣어’ 만든 작품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고”²⁾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요한 활동은 연극 창작 과정에 방법론을 도입하는 시도로 시작되었다. 뒹굴이 작업할 때 지키기 위해 만들었던 내부 자치규약을 SNS를 통해 연극계에 공유하였고,³⁾ 〈가부장 없이 연극하기(2019)〉 프로젝트라던가 〈카피레프트 프로젝트(2019)〉 등을 통해 연출가나 배우처럼 이미 관습적인 질서가 녹아들어 있는 역할 구분을 대신할 창작자 크레딧을 구상하기도 했다.또한 〈예술노동 적정임금 찾기〉 실험을 동료 창작자들에게 제안하여 수행하기도 했는데,⁴⁾ 이런 예술 실험들은 신화화되고 낭만화되어 있던 창작 활동을 ‘땅으로 끌어내려 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일을 하고 얼마를 버는가, 우리는 얼마나 구체적인 방법론과 언어로 작업 내에서 소통하고 있는가, 이러한 지점들을 포착할 수 있다면 창작 활동을 예술노동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가려져 있던 것들을 정확한 수치로, 명확한 호명으로 발화하는 예술 실험이 창작자 간 불공정을 직시하고 타파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 동시에 공연예술계 전반의 노동환경 현실을 조명할 때 기초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같은 문제의식 하에 진행된 [화학작용4: 우리의 연극은 그렇지 않다]에서는 다른 창작 집단의 창작 언어를 포착하여 번역하고 해석하는 작업도 했다.⁵⁾

현장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행해진 예술노동에 대한 예술 실험(artistic research)의 근간에는 “예술노동이 마치 가사노동이나 돌봄 노동처럼 (의도적으로) 비가시화된 노동이다”라는 전제가 있었다. 페미니즘 리부트 물결을 따라 출발한 활동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자연스러운 지점이었다. 이에 따라 이 실험은 “예술의 공공성”이라든지 “예술의 사회적 역할” 같은 것을 입증하려는, 혹은 관련 담론을 연극계 내에 만들어내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실은 인간 공동체를 지탱하고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예술노동이다, 라고 말하기 위함이었다. 그리던 와중 코로나19가 한국 공연예술계를 강타했다. 




팬데믹 정국, 기후 위기 고민은 이제 역할론에서 존재론으로



코로나19는 감염 위험성을 필두로 한 한국 사회의 파시즘적 면모와, 예술 및 예술가에 대한 낮은 가치 평가를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공공극장과 공공 미술관, 박물관은 자본이 운용하는 공간들과 달리 그 어떤 현장 논의 없이, 위험성이 입증되기도 전에 빠르게 임시 폐쇄되었다. 예술인 재난지원금이라던 지원금은 제작비 및 인건비 지급이 가능한, 심사와 선정을 거치는 지원사업 형태로 구현되었다. 돈이 되거나 ‘국위선양’을 할 문화산업이 아닌, 문화산업이 될 수 없는, 아니 문화‘산업’이 되기를 거부하는 예술 장르 및 예술가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어떠한가, 너무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조치였다.

처음에는 행정의 결정에 따르던 공연예술인들은 사태가 장기화하고 일방적인 지시만 계속되자 반발했다. 감정적인 반응도 많았지만 “훨씬 감염 위험이 높은 요식업계에는 적용되지 않는 조치가 공연예술계에는 쉽게 취해지는 것은 나의 노동현장을 노동현장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아닌가”라는 구체적인 주장들도 이어졌다. 다른 업계 종사자들이 하듯 예술인들도 각자의 현장에서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고 있으니 이를 보장하라는 취지였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 일면 동의하는 한편 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는 어려웠다. 이런 처분을 받은 것이 예술계만은 아니었기도 하거니와 나의 예술노동이 나의 생계를 보장해준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코로나19 이전에야 공연예술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으니 (비가시화된) 노동이라 주장하는 것이 타당하게 느껴졌을지언정 물리적 거리두기를 사회적 수칙으로 정한 현시점에 ‘모이는 것’, ‘직접 만나는 행위’ 자체를 기반으로 하는 공연예술 활동에 도대체 무슨 사회적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혼란스러웠다. 역시, 창작활동은 노동이 아닌 값비싼 취미활동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 와중에도 창작 활동은 계속되었다. 방역을 위해 이전보다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고 객석 간 거리두기를 위해 관객 수(=티켓 수익)도 현저히 줄여야 하는 와중에도 많은 공연이 무대에 올랐다. 올해 초 〈작업 멈춤 선언〉으로 작업을 시작한 나는 의아했다. “그렇게 모욕적인 방식으로 ‘하지 말라’고 하는데 왜들 그렇게 하고 싶어 난리일까?” 한편으로는 내 안에서도 비슷한 욕망? 간절한 마음 같은 것이 느껴져 신기하기도 했다. “공연하고 싶다. 연습하고 싶다.” 나의 동료들과 관객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잠재적 바이러스’ 취급을 받으면서도, 실제로 그렇게 될까봐 두려우면서도 우리는 왜 공연이 하고 싶을까. 그리고 왜 관객들은 답답한 마스크를 낀 채 관람하는 수고를 하면서도, 얼마 되지도 않아 ‘피케팅’을 해야만 갈 수 있어진 공연을 굳이 보러 오는 걸까. 무언가를 표현하고 소통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다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즘은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론 대신 존재론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기본적 욕구에는 생존 자체에 대한 것도 있지만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 역시 필수적이며, 이 성장절대주의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그 가치를 존재 그 자체로서 고수하며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 예술가라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돈이 되지 않는 짓을 하는 사람, 노동이 아닌 노동을 하는 사람, 그리고 노동을 하지 않는 (혹은 할 수 없는) 사람도 있는 그대로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딘가로 쉽게 내몰려서는 안 된다. 기후위기를 말하는 많은 과학자들의 데이터를 신뢰하며 피부로 폭염과 팬데믹을 실감하는 예술가로서 지금부터라도 그렇게 주장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내가 하루에 20시간 이상 바치고 있는 예술 활동은 노동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최악의 불평등 사회로 갈 기후위기 시대에 끊임없이 인간의 가치를 상기하는 나 자신 그 자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할 공간을 애초에 가져본 적 없는, 노동 현장을 가질 수 없는 이들과 함께 있는 존재이고 싶다.

역할론을 강조하며 예술 활동이 노동이라 생각했을 땐 적정한 임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면, 존재론을 고민하는 지금은 적은 금액이라도 예술인 기본소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 인간의 생산성과 관계없이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정기적으로, 일정한 금액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은 모든 이를 가치 있는 존재로 대우하는 가장 명료하고 효과 있는 제도다. 우리는 모두 표현 욕구를 지닌 인간이자 예술가이니, 예술인 기본소득을 지급하기 시작해서 전 국민 기본소득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곧 일상적 재난이 닥쳐올 기후위기 시대이니, 일시적인 데다 가구 단위로, 또는 고용 형태 등을 기준으로 심사하여 지급하는 재난소득만으론 예견된 재난을 정의롭게 헤쳐나갈 수 없을 것 아닌가.

 

성지수
연극 기반 다원예술을 하는 페미니스트 창작자. 콜렉티브 뒹굴 대표, 화학작용 예술감독

 


1) 2012년 뒹굴은 네 개의 약속문을 만들며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 첫 문장이 “연극은 종교가 아니다.”였다.
http://www.drama-in.kr/2019/04/doingle-standards.html 참고.

2) 성지수, 「연극이라는 욕망의 전차는 멈춘 적이 없다」, <GAP> 
전문은 https://clingzine.wixsite.com/clingcling/01-04 

3) 2019년 뒹굴 자치규약 전문 참고.
https://drive.google.com/file/d/1FaQaq6H-4Dg7k0gmevp5EcEU57befd4C/view

4) 강보름, 「코로나19 공황 속에서 여성 연극인들의 안부를 묻다」, 일다. 

http://ildaro.com/8680https://drive.google.com/file/d/1FaQaq6H-4Dg7k0gmevp5EcEU57befd4C/view

5) http://www.drama-in.kr/p/blog-page_20.html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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