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운드테이블 “예술과 노동” 리뷰
✍ 강정아, 김재상
일시
2020. 6. 29 (월) 14:00 ~ 16:00
참여
서울청년예술인회의 운영단 : 강정아, 김재상
참여자 : 성지수(콜렉티브 뒹굴/화학작용), 오정은(비평가/독립기획자),
안준형(배드뉴데이즈), 채민(독립웹진 인디언밥, 드라마터그)
서울문화재단 : 윤동주
현장기록 : 김민주
서울청년예술인회의 강정아, 김재상은 “예술과 노동”, “예술과 청년”, “예술과 시민”이라는 주제로 격월, 총 세 번의 라운드테이블과 칼럼 기고를 기획하고 있다.
오늘날의 예술인은 특정 예술장르에 국한되지 않으며 다양한 노동 및 창작환경에 놓여있다. 이와 같은 특수성은 일반적인 형태의 고용 환경과 보장체제에서 배제되어 있을 확률이 높으며 기존 고용보장제도로 포섭되기 힘들고 지원제도 아래 이뤄지는 노동의 인정범위는 역으로 예술인의 경제적 허약성을 약화시킨다는 의견도 보인다. 사회에서 호명되는 다양한 합법적 제도(근로기준법, 산업안전보건, 사회보험,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양립지원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가 지니고 있는 권리와도 멀어진다는 지점에도 주목하고 있다. 최근 <예술인권리보장법>, <예술인 고용보험범> 등 예술인의 처우를 개선하고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정책 등이 구체적으로 규정하면서 보장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러나 한 편으로, 제도에서 규정한 개념이 문화예술계 현장과 거리감이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이 들었다.
이번 세 번의 라운드테이블에서 선점한 주제 ‘청년’, ‘예술’, ‘시민’은 제도 안에서 작동되는 청년의 특수성과 동시대 예술의 위치, 기능적으로 작동되는 구조를 파악하고 예술인의 의의, 공공성, 노동과 권리 담론을 당사자의 목소리를 발화하는 도구로 사용하고자 한다. 라운드테이블을 통해 발화된 언어들은 추후 <미래를 여는 예술문> 제작을 위한 단초가 될 예정이며, <미래를 여는 예술문>이 일종의 선언문으로써 행정과 정책으로 규정되는 정의를 재 점유하고 예술현장 언어가 정책에 관여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길 희망한다.
첫 번째 라운드테이블 ‘예술과 노동’ 편은 크게 두 가지 입장의 한 가지 추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두 가지 입장 중 하나는 ‘예술은 노동이다‘이며 또 하나는 ’예술은 노동이 아니다’이다. 조금은 거칠게 정리한 예술과 노동의 관계와 입장은 아직까지도 문화예술인은 물론이거니와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오랜 논쟁거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추측으로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이나 공공일자리 등을 통해 알 수 있듯 ’예술과 노동‘에 관련한 현행 제도에서 노동과 복지는 묘한 경계선에 놓여있음과 ’일자리 사업‘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하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본 라운드테이블에서는 “예술과 노동”에 대한 본원적 질문을 통해 제도에서 바라본 ’노동’과 현장 문화예술인이 말하는 ’예술과 노동’의 상관관계를 파악하고 다른 차이를 발견하고자 한다.
우리는 좀 더 [예술과 노동]의 구체적 논의를 위해 아래와 같은 질문을 준비해보았다.
1. 예술로 돈을 버는 것이 가능한가?
2. 예술은 복지인가 노동인가?
3. 사회적 재난 앞에서 우리는 ‘제도적’으로 안전한가?
진행자 (강정아, 김재상)
첫 번째 질문은 예술로 돈을 번다는 게 가능한가? 생계를 위한 일과 예술을 위한 일을 무엇인가? 자신의 아티스트 피을 측정하는 방식은 어떠한가? 최근 기관에서 예술가의 피가 창작지원금에 삽입되면서 논의가 촉발되었다.
안준형
작가뿐 아니라 비평가나 다른 크리에이터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을 결정할 수 없듯 아티스트 피 또한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티스트 피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는 모두가 대충은 알고 있는 것 같다. 흔히 명성 자본이라고 불리며, 작가들이 갖는 예술가로서의 네임 밸류에 따라서 임의의 책정값으로 정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진행자
제도나 장치에서 결정되어야 예술가 본인이 자신의 아티스트 피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아티스트 피를 책정할 때 명성자본이 없어 애매하다는 의미인가?
안준형
작가들이 성장하는 주기 안에 일련의 과정들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접근하기 쉬운 갤리러에서 전시를 하기 시작하고, 작업이 좋다면 비평가들에게 눈길을 받아가며 조금씩 주목받기 시작하고, 웹진에 이름도 올라가고, 전시하는 환경도 나아지는 식으로 말이다. 아티스트 피 또한 그런 임의의 과정들 속에서 결정되는 것 같다. 물론 이런 과정들에 관해서 도덕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건 아니다. 그저 아티스트 피라는 것이 오늘날 그렇게 결정되는 것처럼 보여진다는 이야기다.
오정은
스스로 인건비를 측정한 경우는 별로 없던 것 같다. 하지만 기관에 재직했을 때는 내부 인건비 규정을 참고했고, 이런 규정이 없을 때는 주변 지인에게 물어 현장에서 통용되는 단가를 파악했다. 가령 행사를 할 때 ‘사진이라면 컷 당 얼마, 영상이라면 얼마인데 학생이면 얼마 있고 경력이 있는 작가의 경우에는 얼마’라는 식으로 조정했다. 몇 년 전만 해도 공모전에서 기획자 인건비 책정이 안 되었는데 요즘에는 공모전 사업에서 자기 인건비를 책정할 수 있기도 하다.
성지수
서울연극센터에서 8명 정도의 소위 연출가를 섭외해 연출가 개인에게 많지 않은 금액을 주고 알아서 제작을 하는 형태의 작업을 제안 받아 진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 동료 창작자들에게 내가 ‘예술 노동 적정 임금 찾기 실험’을 해보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분배를 연출가 본인이 하면서, 참여 창작자 모두가 실제로 얼마나 시간을 쏟았고, 시급으로 계산하여 당시 최저임금과 비교했을 때 어떤 수준인지 확인하는 것이 목표였다. 일단 여덟 명 중 여섯 명이 왔고, 두 명은 '나는 이것을 노동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어렵다'며 빠지셨고, 하다 보니까 자괴감이 들어서 못하겠다고 하는 팀도 생겼다. 실제로 결과물을 산출해보니 저희 팀에서 시간당 4700원 정도가 나왔다. 저희 팀은 사실 연극센터가 한 명을 호명하여 작업을 세우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아 최대한 시간을 덜 들여서 작업한 것이었는데도 최저임금에 전혀 미치지 못한 셈이다. 다른 팀에서는 연출가 혼자 배우를 섭외해 그들에게 인건비를 최대한 주고 모든 스텝 일을 혼자 하는 방식으로 진행했을 때 천 얼마가 나왔다. 실제로 공연예술 현장엔 배우도 스텝도 적정한 임금이라는 것이 논의된 적 없기 때문에 제작비가 모자랄 때 가장 먼저 인건비를 깎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미투 운동 이후 연극계에 페미니즘 물결이 들어와, '내가 하는 활동이 최소한의 보장을 받아야 한다'는 감각이 생겼다. 다만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예술노동인가의 관점에서는 요즘 들어 생각이 바뀌었다. 두 가지 계기가 있다. 하나는 코로나이다. 극장들, 특히 공공극장이 닫혔다. 상업 극단 뮤지컬은 거리두기 없이도 공연을 상연하는 데 반해 공공극장이나 소극장에는 거리두기를 요청하는 지침들을 보면서, '극장은 상품을 판매하는 상점이 아니라 예술 표현의 매체이자 방법론인데 왜 막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런데 동료 창작자들로부터는 ‘그곳이 나의 예술생계노동 현장인데 왜 막느냐'는 반발이 가장 컸다. '노동이라고 주장하다니! 미투 운동 이후의 연극계답다'라고 생각하는 한편, '진짜로 그러한가? 연극을 하는 게 내 생계를 보장해 준 적이 있던가? 행정이 나를 지침을 통해 구박하는 것에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거부 반응하는 것은 나에게 이것이 정말 노동이기 때문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화가 나긴 하는데, 노동을 못 하게 되어서 화가 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편의점 알바를 하면 훨씬 더 많이 벌 것이다. 노동이라는 관점에서 예술을 봐야 할 필요성이 분명 있지만, 팬데믹 시대이고 기후위기 시대에 곧 돌입하리라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이전에 노동이었던 것이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노동이 아니었던 것들이 노동으로 드러날 것이라 본다. 그중에 하나가 문화 예술, 특히 예술인의 창작활동이다.
민주주의 사회이고, 지금은 재난시대다. 이럴 때 예술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왜 사회적 합의도 없이, 마치 상품을 막듯 상점을 막듯 막는지 물어야 한다. 노동이라는 관점에서는 임금의 문제가 있다면, 예술 표현의 자유 관점에서는 예술인의 존재론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예술인과 전국민 기본소득보장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를 해치는 일에 돈을 줬던 노동의 관점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에게 기본소득을 주고 사회를 유지하도록 만드는 사회정책이 필요하다.
진행자
중요한 이야기이다. 노동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생산과 비생산에 관한 사회적 가치문제에 역으로 다다르게 된다. 오히려 지수는 대전제가 필요하다는 지점을 짚어주었다.
채민
성지수의 말을 받아 이야기 하자면, 이번 코로나 이후 (공공)극장이 오히려 무엇을 판매하지 않는 곳이라 문을 닫는구나 싶었다. 누군가의 소유권에 들어가 있는 곳은 여전히 문을 열고 있다. 제가 작업하는 곳은 공공 극장이나 공공장소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그곳이 어떤 의미의 공공장소가 되는데, 맥도날드나 힙한 카페가 그런 곳이겠지. 그러나 거기에 들어가서 거리 공연을 할 수는 없다. 사유 재산 침해가 되겠지. 의미적인 공공장소가 이런식으로 숨어들고, 기존의 공공장소는 셧다운 되는, 이런 현상들이 재미있다.
지금 제기되고 있는 예술노동 논의에 아쉬움이 있다. 코로나 이후로 다른 산업군에서는 파업이 많았다. 힘들고 돈도 안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업을 하는 것은 생명에 위협이 닥쳤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파업을 하면 사회의 이목을 끌 수 있다. 그로인해 생활에 불편을 느끼기도 하고... 아마도 필수 직종이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만약 예술이 노동이고, 그래서 우리가 파업을 하면, 어떤 여파가 있을까?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미 제도권 밖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은 노동이고, 노동할 권리를 침해당했다는 논리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지수 연출이 문화예술이 현재 비가시화되어 있는 직군이고, 앞으로 일자리로 가시화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우리의 희망이기도 하고. 우리는 지금 공적 기금의 비대화도 경계해야 하는 상황이다. 예술가가 파업한다고 누군가가 불편해지지 않는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 예술의 가치를 설득시키지 못한 채, 노동할 권리로만 밀어붙이면 결국 제도권 안에 포섭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어떤 식의 열등감과 한계를 가진 채 편입될 것 같다. 다른 담론을 찾았으면 좋겠다.
진행자
공공성에 대한 고민이 많아진다. 예술의 가치가 시민과 합의되지 않은 경우가 많기에, 근로 개념의 노동을 어떻게 전환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정부에서 실행하는 예술인파견사업, 생활예술매개자, 공공예술 등의 경우에도 노동 가치를 일자리로 전환해서 예술가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있다. 팬데믹 시대에 노동과 공공성이 어떻게 읽히는지도 궁금하다. 본인은 시각 예술을 하다보니 생활예술, 공공예술, 예술인파견사업 등을 통해 생계를 해결하고 있다. 현업 작가는 어떠한지?
안준형
알바를 통해 생계를 해결한다. 시각 미술 신에서는 2014년부터 예술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다. 이후에 비평가 홍태림이 정리한 바에 의하면 예술은 노동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과, 예술은 노동 밖에서 비판적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 예술과 노동이 같은 것이 아니지만 예술의 최소 조건은 노동이어야 한다는 세 가지 입장이 있었다. 아티스트 피 이야기를 계속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앞으로도 작가들이 아티스트 피를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또 여전히 작가들은 열악한 환경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블루칩 작가, 경매가가 억대를 호가하는 전혀 다른 예술계의 모습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양자는 유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상관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공장미술제 사태 때 미술생산자모임이 설문한 바에 따르면 참여 작가들이 제대로 된 피를 받지 못하면서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이유는 그것을 예술가로서의 명성자본을 쌓는 성장 과정의 일부로 생각하기 때문에, 바로 호황을 누리는 예술씬으로 갈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전혀 달라 보이는 양쪽의 예술계를 동시에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예술가들의 자기를 파괴하면서 자기를 관리하게 되는 욕망을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것도 그다지 건설적인 일도 아닌 것 같고 말이다.
오정은
예술가가 노동자로 인식되지 않다 보니, 최저임금이 적용되지 않는다. 청년기본소득에 관해 논란이 많고, 청년예술인에게 최저임금도 적용되지 않은 상태에서, 특정 세대가 아니라 특정 직업군에게 기본소득을 준다면 반발이 많을 것이라 본다. 최저임금이나 아티스트 피 문제 논의가 선행 하는게 절차적으로 현실적이리라 생각한다.
글쓰는 직업을 가진 비평가나 작가들의 경우 최저임금이 더욱 적용되지 않는다. 페이지 수에 따라 분량으로 계산되니 시간 기준을 적용받지도 못하거니와 그러한 기준마저도 보장받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예술가들이 많이 나누는 자리가 많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글과 말로 표현하는 사람들에의 처우가 열악하기에 그런 자리에 참여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예술가, 비예술가적 시민, 노동자를 오가는 하는 경험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기관에서 일하면서 '말하고 듣는 자리'라는 행사를 기획한 적이 있다. 말 그대로 예술인이 말을 하고 듣는 자리였다. 기존의 포럼, 컨퍼런스가 강단에 선 저명한 명사가 말하는 자리고 예술인들은 객석을 채우는 데 동원되는 방식이라면 이 행사는 수평적인 자리에 둘러앉아 모더레이터만 있고 서로 간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다. 하나의 행사가 즉각 좋은 담론을 도출하는 것은 아니지만, 경험을 공유하며 만들어가는 접점이 지속적으로 쌓여야 할 것이다. 덧붙여, 개인의 내밀한 작업을 나누는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복지 성격에 가까운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는 것이 개인의 내밀한 작업을 하는 작가들에게는 폭력적인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노동자 예술가로서의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사용자가 원하는 노동자 상이 되기 위해 자격증을 따고, 기술을 배움에도 불구하고, 정작 노동자로서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발상조차 제시되지 않는 교육만 들어왔다는 것을 얼마 전 사내 노조 (이전까지 노조도 없었고, 늦게나마 노조를 경험했는데) 강의에서 깨달았다. 노동법이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생존 생계가 어렵다는 생각은 보편화되었고 작업으로도 많이 하지만,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 교육 수준에서는 없었다. 이런 교육이 없이 라운드테이블만 공회전했다는 생각이 든다.
진행자
현재 제도적으로 지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렇지 않다면 작동시키고 싶은 구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안준형
최근에는 어쩌면 지금 같은 공모, 지원 제도가 없어지지는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솔직히 토로하자면 심지어는 작품창작을 위한 제도적 장치들이 현재 예술에 관한 사회적 합의에 비해 과분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때가 있다. 왜냐하면 근 몇 년 동안 한국 미술계 안에서 전례 없는 규모의 지원사업이 확보되었다. 공모전, 레지던시 프로그램 등도 엄청나게 많아졌다. 이런 규모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전시 레지던스 사업 등. 이런 규모의 예산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예산이 없어지면 공모에 관한 지금의 논의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진행자
공모사업이 없어진 상태에서 예술 창작 환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 때에는 다른 고민이 있다는 것인가?
안준형
기본소득보다는 아티스트 피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결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오정은의 말에 공감했다. 미술계에서 제도를 이야기할 때 그것이 하나의 단일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국가차원의 공공 제도와 예술계 내 독립적인 제도가 따로 이야기 된다. 아마도 오정은이 이야기 한 아티스트 피 문제는 후자의 예술계 내의 제도문제를 건드리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공적 차원의 지원 없이도 예술계가 스스로 작동할 수 있게 하는 문제에 전력하는 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현재와 같은 공적 차원의 지원은 곧 없어질 것 같은 비관이 요즘 들기 때문에 최근에는 예술계 내 자립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채민
지금 공적자금이 엄청나게 풀리고 있는데, 이건 한시적인 것이 아닐까, 혹은 미리 끌어다 쓰는 것일수도. 제도 자체 내에서 자립한다는 말은 모순인 것 같다. 청년예술인을 호명하면서 두려운 것은 중장년층 예술가들에게는 예술생태계가 아예 없다는 점이다. 미래를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것이 우리가 제도를 떠나면, (지원 대상에서 벗어나면) 마주해야 할 미래다. 공적 지원 밖에서 존재할 수 있는 생태계를 상상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계속 사회와 지역과 연결되어야 하지 않을까.
성지수
실제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왜 우리는 공적 제도에 이렇게 목을 매는가. 목을 맨 다음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의 대부분 영역에서 가치의 판단 기준이 상품성, 돈이 되는 가치 뿐이기 때문에 예술인 존재론에 대한 논의 역시 매우 납작한 상태다. 모든 사회가 '그래서 이게 돈이 되는가, 산업화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으니까 발생하는 문제이다. 여기에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문화적 예술적 관점에서 어떻게 사회를 풍요롭게 할 수 있는지를 말할 지표가 있어야 한다고 말해야 하고, 이를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은 예술가 집단이다. 단순한 꿈이 아니라, 실제로 하는 국가들이 있고, 그런 국가들은 재난이 왔을 때 당연하게 ‘우리는 예술가들의 가치를 알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절에도 창조성을 발휘해서 상상력을 통해 희망을 잃지 않게 해주는 것이 예술가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가장 먼저 지원금을 풀었다. 예술가 개개인의 힘이라기보다는, 그것을 같이 상상하고 발화하고 논의하는 사회도 필요하다.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예술과 노동의 관계> 김재상
이번 라운드테이블의 주제는 ‘예술노동’이 아니라 ‘예술과 노동’이다. ‘예술노동’이라 했을 때는 이미 예술=노동이라는 공식이 성립됨을 전제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정말 예술이 노동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에 의한 노동의 결과물로 판매 가능한 상품이 만들어지고, 노동자는 그 과정에서 보수를 받는다는 관점에서 예술을 바라보게 될 것 같다. 다시 말해, 만약 예술이 노동이라면 예술품 또한 상품의 개념으로 화폐 가치를 통해 교환이 가능한 무엇으로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예술가는 그에 따라 보수를 받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나는 이러한 경우가 철저히 자본주의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예술을 경제의 도구로 보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싶어서 개념들을 다시 되짚어보고 점검하는 중이다. 그래서 이번 라운드테이블의 주제가 ‘예술’과 ‘노동’인 이유는 예술 다음에 오는 짝이 되는 낱말 간에 서로가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 살펴보자는 의미이다. 노동을 경제나 자본주의로 바로 등치시킬 수는 없지만, 앞서 얘기한대로 지금 사회에서는 노동을 보수, 임금 등의 경제적 측면으로 보는 면이 많지 않나 싶다. 그래서 예술은 노동의 반대편에서 자본주의의 노동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혹은 자본주의적 노동의 개념을 재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한다. 물론, 장르나 예술에 내재된 다층적인 성격 등에 따라 노동이 될 수 있고 노동이어야 한다. 이에 대해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보고 싶었다.
<예술이 내 생계를 보장해 준적이 있었던가요?> 강정아
이번 라운드테이블에서는 ‘노동’이라는 담론을 끄집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좀 더 노골적인 ‘돈’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지점도 있다. 작업 활동하면서 아티스트 피, 인건비를 요청할 때 어물쩍하게 넘어간 적도 없지 않아 많았고 노골적인 돈 이야기는 왠지 모르게 불편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는 이러한 문제를 의도적으로 의식함으로써 인건비를 요청하기도 하지만, 기금으로 운영된 작업이 아니면 상대 예술인을 배려한다는 입장으로 타협하기도 한다. 일에 대한 값어치를 요청하는 일이 기존의 근로 기준/고용노동으로 규정되기도 어렵고, 예술 ‘일’이라는 자체에 대한 모호성과 예술의 사회적 가치가 무엇이냐의 질문에 대한 답변 또한, 사회적 합의를 ‘함께’ 얻지 못한 부분도 있다. 이번 주제 예술=노동을 등치한 이유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여전히 생산성/수요도의 입장으로 대변되는 예술 ‘일’에 대한 생각을 현장에서 활동하는 연출, 시각예술가, 드라마터그, 비평가이자 기획자의 입장에서 듣고자 했다. 예술은 노동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 예술은 노동-제도권 밖에서 비판적 자세를 유지해야함으로, 예술노동에 대한 새로운 전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주고받았다.
결국 이 자리에서 우리가 밝히고자 했던 부분 또한 예술의 숭고성이 아닌, 한 사람의 시민으로 존중받기를, 예술이 ‘일’이 되는 사회적 위치를 인정받는 인정투쟁의 영역이기도 했다. 예술과 노동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하나의 결론을 도출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상관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어긋난 어떤 지점과 합을 찾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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