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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숨은참조'/말한다

[말한다] 포스트예술대학 ②|이제 와 곱씹어보는 예술대학의 철학과 방향

by 서울청년예술인회의 2021. 7. 28.

이제 와 곱씹어보는 예술대학의 철학과 방향

 

포스트예술대학 참여자 이은

 

항상 완성된 예술가를 모델 삼아 예술가가 되기를 희망하던 나는 다른 삶의 방식과, 배움의 방식을 스스로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한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 자리에서, ´마음이 가는 대로 한번 해봐라´라는 누군가의 말이 불씨가 되어, 나의 몸과, 몸의 경험으로 창조된 결과들이 어딘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는 것을 깨았다. 나는 여태껏 내 마음이 가는 대로 무엇인가 만드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그럼 나는 여태껏 무엇을 하고 있던 거지? 이런 고민 끝에 학교에서 배운 익숙한 현대 미술의 문법을 그대로 재현하고, 따라 하려는 나의 위치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와 걸맞 목소리를 스스로 찾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보냈고, 이 과정은 예술 대학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이었다.

창작이라는 것은 누군가 나에게 과제를 내주지 않아도, 요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나서서 해야 하는 일이다. 주체가 된다는 것, 내 생각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매번 연습해야 한다. 질문에 대한 남다른 답을 찾고, 그리고 찾은 답을 다시 무너뜨리는 경험을 여러 번 해야, 어떤 낱말의 의미를 희미하게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예술 대학의 교육이란, 주체가 되기 위한, 그리고 많은 예술 작품들이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개체의 다양성을 위한 철학과 교육 방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입시과정에서의 학원비와 레슨비, 비싼 예술대학의 등록금을 들여 학위를 따지만, 예술대학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까? 그리고 학교 밖을 벗어난 예술 생태계는 또 어떨까? 나는 사적 모임에서, 내가 예술대학을 다닐 때와, 현재 예술 대학생이 겪는 경험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매우 놀랐다. 그리고 오히려 어떤 부분에서는, 라떼보다 더 악화 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여전히 예술대학의 시스템은 담당 교수를 위주로, 비슷하게 그들의 후예를 생산하고, 담당 교수와 비슷한 작업을 하는 몇몇을 ´ 키워주는´ 구조이고, 나머지 키워주는 구조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른 일을 찾거나, 예술대학을 나온 타이틀을 이용하여 곱게 살아가는 삶을 택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예술대학에 가려고 하고, 부모님들은 왜 예체능을 가르쳤을까? 솔직한 표현으로, 부모님이 돈 들여서 예술을 가르쳐 예술대학을 보내는 것은, 예쁘게 악기를 다루거나 이젤 앞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좋은 곳에 시집가서 예쁘게 살기를 바라며 가르친 것이 일반적인 부모님들의 생각인 것 같다. 미대 입학의 성비를 보면, 여전히 미술전공은 여성 비율이 우세하다. 하지만 활동하는 사람들은 여자 작가들보다, 남자 작가들이 더 눈에 많이 띈다. 요즘은 조금 바뀌었을까?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경험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니, 내 말이 틀리더라도, 내 주위에는 이런 사람들뿐이라, 내가 세상을 보는 것이 조금 삐뚤어졌거나, 그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도 공감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막상 예술대학을 다녀보니, 이런 부모님의 생각은 얼마나 자기 자식을 폄하하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

대학마다 추구하는, 그리고 뚜렷이 보이는 어떤 담론이나 스타일이 나쁘다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학 입시 구조에서 어떤 특정 학교와 전임 선생님의 스타일을 미리 알고, 내 흥미에 맞춰 전공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까? 이미 중고등학교 때부터 자신의 스타일과 배우고 싶은 정보가 뚜렷하여 학교와 교수를 선택하는 사람이 몇이 나 될까? 우선은 성적으로 학교를 선정하고, 그 학교가 요구하는 성적과 실기를 맞춘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비슷한 과정을 겪고 예술대학에 진학하고, 그리고 스스로가 어떤 표본에 포함되어, 그 속에서 비슷한 후예들이 양성되는 것 같다.

유행하는 몇몇 작품을 보면, 대충 이 사람이 어디에서 공부를 했겠구나 짐작된다는 것, 그리고 나도 그중 하나라는 것을 생각해보니 뭔가 소름이 끼쳤다.

물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지만, 내 머릿속에는 ´예술´ 이란 거대한 포용력을 발산하는 순수한 의미라는 것이 유효하고, 그런 의미에서 개개인의 다양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개개인의 다양성과 고유한 시선, 본인만의 방식을 창조하는 방법을 예술 대학 과정에서 가르치지 않는다면, 예술 대학의 교육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무엇이 예술을 만들고, 사회에서 작용하는 예술가의 역할과 가능성은 무엇일까? 예술대학은 어떤 예술가를 교육하는 곳인가? 매년 한 무리 안에 뭉텅이로 포함되어 비슷한 교육과 감수성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더 작고, 흐릿한 감정에 어떻게 집중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예술대학을 벗어나기 이전, 충분한 질문을 가지고 사회 밖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포스트 예술대학 스터디 모임을 시작하였다.

 

예술 대학만의 문제일까?

예술대학 졸업 후 사회로 나가는 설렘과 함께 막연한 불안감이 온몸을 감던 시기가 있었다. 대학 이후 생활을 위해, 커리어로 쌓을만한 일을 하기보다는 당장 돈이 되는 일을 하다 보니, 또 그런 삶에 금방 익숙해졌고, 내가 멈추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비슷한 삶이 반복될 것이었고, 또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내가 작가가 되기를 꿈꾼다는 것은, 피해의식 속에서 게으르게 살기를 원하는 어떤 루저를 말하기도 하고, 4년제를 졸업하고도 한 달에 200만원도 벌지 못하는 빛 좋은 개살구가 되기도 하고,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개천의 용을 꿈꾸는 그런 불쌍하고 현실감각 없는 나이 많은 중고신인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런 타인의 판단은 불안한 감정 안에서 당장 급하게 무언가를 선택하게 했고, 또 그저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게만 하는 불편한 원동력 같은 것이었다. 어느 정도 생활의 기반을 다져놓고, 창작을 시작해야겠다는 계획은 서른 중반이 다 되어서야 나를 좌절하게 했다. 경제적 독립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안전한 기반을 다진다는 것, 그리고 그 위에서 창작을 시작하려는 일이 지나고 보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가? 왜 나는 타인의 판단을 원동력으로 삼았고, 안정적 기반 안에서 창작을 하려고 했을까? 과연 이것이 누구의 생각이고 누구의 판단인가?

무언가 시작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감을 많이 잃었고, 다시 그만큼의 시간을 들여 리듬을 찾아야 하는 것을 알았다. 옛날의 자료를 다시 꺼내어 위에 덧칠을 하고 자르고 이어 붙이고, 삭제하고 덧붙임을 반복하였다.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듯 하다, 또다시 불안감이 찾아왔다. 그렇게 매번 반복하다 보니 나는 나를 위해 무언가를 창작하고 싶은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런 활동으로 나 스스로를 치유하고 다시 힘을 얻고, 다시 또 일어서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예술 대학에서 배우는 거대한 담론은 어쩌면 나도 모르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나를 알아가는 작은 것, 나의 흐릿하고 애매한 감정을 뚜렷이 만들거나, 뚜렷한 감정을 다시 애매하게 만들어 보는 과정에 집중하였다. 그래, 나는 나를 위해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다.

포스트예술대학 스터디 모임을 가지면서, 매번 다양하고 세분화된 부정적 감정이 일어나는 경험을 하였다. 하지만 그 부정적 감정의 원인이 예술대학의 고질적 문제에서 오는 것일까? 실제로 나의 예술대학 생활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농어촌 출신 학생으로 등록금 할인도 받고 다녔고, 학부 과정에서 교수님들의 주최로 몇몇 전시회 경험도 했다. 선배들에게 술도 밥도 많이 얻어먹고, 좋은 친구들도 만났다. 교수와 학생 간의 허물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졸업하고도 찾아뵙고 싶은 교수님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좋은 기억이 많다. 하지만 왜 자꾸 누군가에게 속았다는 느낌이 들까?

학교 밖을 벗어난 예술 생태계는 예술을 배울 때처럼 아름답고 이상적이지 않다. 많은 등록금을 들여 학위를 따지만, 예술대학의 밖에서 무엇을 할까? 내 주위의 영리한 친구들은 이미 학사 과정을 밟으며 교수의 줄을 타서 동대 학원에 진학하고, 학과 조교가 되고, 강사가 되고, 그리고 전임교수가 되는 단계를 밟아가는 준비를 했었다. 모두가 예술대학 교수가 되려고 하는 이러한 현상은 작품만을 팔아서 먹고살 수 없거나, 혹은 대학교수라는 지위가 플러스로 가져다주는 작품값의 영향을 하기 때문일까?

그마저 그런 뒷줄을 타지 못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 경쟁에 밀려 네오룩을 뒤지다가 갤러리 인턴이라는 명목하에 60-70만원을 받으며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예술가가 되지 못했다는 창피함에 어디론가 숨어지낸다. 그나마 조금 이름있는 예술대학을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마 조금 다를까? 네임밸류가 가져다주는 혜택을 죽을 때까지 보는 것이 현실이니, 우선은 내가 어디 나왔다 하면, 그래도 다른 지방 예술대학을 다닌 사람보다 혜택을 본다. 입시 미술 강사를 하더라도, 어느 대학을 나온 지에 따라 선호도가 바뀌고, 가만히 앉아서 여러 가지 생각에 문제를 파고들다 보면 조금 더 어릴 적, 더 어릴 적, 생각이 과거로만 흘러 들어간다. 이것이 내가 예술 대학을 졸업할 때 즈음 10년 전 이야기이고, 지금은 무엇이 달라졌을까?

학교에서는 몇몇 성공한 소수의 예술가와 이슈화되는 작품 값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예술가의 삶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며, 예술과 관련되지 않은 투잡 혹은 쓰리잡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어쩌면 영원히 작가로서 데뷔하지 못할 것이라는 현실적 조언을 해준다. 그것이 실패가 아니고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왜 학교에서 이야기할 수 없었을까. 예술 뿐 만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것은 선택의 배열이고 그 선택과 나의 감정을 대입시켜 집중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조금 더 평범하고, 현실적인 것을 배우지 못했을까. 예술은 어떤 것이 더 낫고 우월한지에 관한 경쟁이 아니라고 배웠지만, 돌아가는 예술계는 여전히 경쟁 사회를 대변한다. 누가 더 많은 인맥을 알고 있느냐, 얼만큼의 경력이 있느냐에 따라서 기회를 얻는다. 그렇다고 공정한 실력으로만 예술가를 평가한다면? 하지만 여전히 예술가는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것에 자신의 감각을 발휘해 존재의 긍정에 대해 끊임없이 숨을 불어 넣는 존재가 아닌가? 그렇다면 예술가가 가져야 할 공정한 실력이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왜 예술대학에서 배운 예술과, 그 울타리 밖을 벗어난 예술계의 현실은 다르게만 느껴질까? 그래서 해가 갈수록, 버티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것일까? 예술과 예술계 그 사이, 누구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임을 마무리하며 


창작을 하며 자신의 귀를 자른 반고흐의 이야기, 더 좋은 소리를 위해 자신의 딸을 눈먼 장님으로 만들어 버린 영화의 줄거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자신과 타인의 학대를 통해서 창작의 과정을 극복해내고, 또 그 결과를 걸작으로 생각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 일까? 한없이 외로운 존재여야만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여전히 배고픈 예술가, 생활고에 시달리다 굶어 죽은 청년 예술가들의 소식을 뉴스를 통해서 접한다. 남은 밥과 김치가 있으면 조금 달라는 어느 예술가의 쪽지는 현 사회와 예술계가 직면한 여러 가지 문제를 상징한다. 일련의 착잡한 소식들은 나를 슬프게 하기도, 화나게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현실적인 질문을 생각하게 한다. 왜 생활고에 시달리다 죽는 선택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세상은 왜 예술가의 고통을 당연시할까?
왜 예술대학, 예체능 계열 대학에서는 예술가로서 살아남는 현실적인 방법을 알려주지 않을까.
왜 돈을 주고 배우는 것이 가난한 삶에 관한 것일까? 어떻게 해서든지 직업이 되게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예술은 내 목숨을 내놓을 만큼 중요하지도 않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안타까운 현실을 급하게라도 막을 수 있는 것은 내 주위의 동료에게 오늘이라도 당장 관심을 두는 일이다.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주위에 동료를 찾아서 같이 해내면 된다. 힘들어 보이는 동료가 있다면 더운 여름날 냉면 한 그릇 대접하자. 그리고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자. 그렇게 의지하면서 서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 된다. 

예술가들이 학위가 높은 이유는 학위를 떠나 예술가들에게 커뮤니티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속적으로 관심사에 관해 토론하고, 영감을 얻는 과정이 혼자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혼자서 해내야만 하는 일이 있더라도,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리고 비빌 언덕과 울타리가 필요하다.
예술대학은 비빌 언덕과 울타리가 되어 돈을 버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자신이 충분한 예산이 있다면 비싼 돈을 주고서라도 석사 박사 하면 된다. 하지만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서로가 비빌 언덕과 울타리가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도시와 국가기관이 그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예술가들도 나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내가 혜택을 받았으면 나도 타인에게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태도를 습득하고, 행동하면 한 곳으로만 비대해 지는 불균형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선생님이 되고 서로 학생이 되어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면 가난해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여러 예술 기관이 예술대학을 대체할 수 있는 다양한 사업을 제공한다면 예술대학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포스트 예술대학 스터디를 마치며 모든 가능성과 상상을 위한 오지라퍼가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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