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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숨은참조'/말한다

[말한다] 미래를 여는 예술문 ⑦ 너 뭐하는 사람이냐? / 힘든 것 같아요 / 못 해 먹겠네 / 쓸모 있는 넋두리

by 서울청년예술인회의 2021. 7. 28.

너 뭐하는 사람이냐? / 힘든 것 같아요 / 못 해 먹겠네 / 쓸모 있는 넋두리

 

전보람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고 이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그동안의 활동을 돌아본다. 남은 문서나 기록으로 보면 나는 프리랜서라는 분류에 퉁 쳐지기도 무용수 혹은 안무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기도 가끔은 기타소득군에 속하는 계약서를 받기도 한다. 나는 지난 15년간 소정의 페이를 감사히 받기도 하고 혹은 재능기부가 내 활동의 훈장이라 여기던 때도 있었다. 돌아보면 그래도 괜찮다고 스스로 정신 승리하는 이 분야 대표 호갱이다.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원만하게 일을 진행하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했고 불편함이나 부당함에 대해 티 내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무엇이 잘못인지 제대로 알고 설명할 수 없으니 내가 지적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여겼다.

이제는 이곳 일의 관례가 익숙해 태도도 조절할 수 있고 일 처리가 어렵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갑을관계 문서에 도장을 찍으면서 얻는 것 때문에 잃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종이가 내 일을 증명하고 보호하는 것 너머의 것을 담고 있음을 깨닫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단 내 일의 가치가 중하고 종이의 내용은 내가 하는 일의 반의 반도 대변할 수 없지’라는 나이브한 태도로 오래 지냈다. 코로나 이슈를 거치며 내 업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전혀 상관없는 일이고 누구나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내 활동이 지금 세상 어디에 자리하는 게 민폐인지 살피는 잉여로 지내기도 한다. 나는 세상 어디에 어떻게 서 있을 수 있을지 고민한다.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고 내가 무엇이 필요한 사람인지 아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과 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스스로 몸을 지탱하는 힘이라 여기고 그 힘을 찾으려 한다.

‘예술문’ 회의를 하며 곱씹게 되는 것. 내가 하는 일을 계약서로 규정하고 내 노동의 가치를 금액으로 환산한다는 것으로 노동과 예술 사이를 어떻게 연결해 생각해야 하는가. 예술하는 이의 일, 그 가치를 어떻게 생각하고 규정하지? 이를 수치로 타협해 조율하는 것, 혹은 그래야 할 필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 의지를 가지는 것이 얼만큼의 정의와 선의로 얘기할 수 있는지 고민한다. 예술노동을 규격화 혹은 수치화하는 것이 정당한지 혹은 그것이 최소권리에 대한 시초가 되는지 질문과 대답의 여지를 마주한다. 이전에 정당한 대가가 없어도 괜찮다고 여기며 이 일을 그냥 하는 힘은 어디서 생겼는지. 적은 돈으로 일할 때 외부에 내가 건당 얼마의 사람인지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 내 노동 가치의 적당한 수치화를 주저하는 이유 등을 계속 들여다본다. 예술에서의 내 일을 일정 금액으로 타협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가지는 것인가. 돈에 관대하고 관심 없는 것이 예술을 업으로 하는 사람의 덕목이라 여기나. ‘난 돈 많이 없어도 괜찮지’라는 생각이 언제부터 언제까지 괜찮은 것이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예술하는 삶이 계속 그렇진 않을 거라는 기대와 믿음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예술이란 가치로 삶을 산다는 말은 딱 희망 고문이다.

그럼 나는 도대체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기준 어디쯤에 부합하는 사람인가. 주변에서는 급여를 책정하는 단위인 근로는 이미 재화로써 가치가 떨어졌다고 입 아프게 이야기한다. 클릭 몇 번에 누군가의 연봉이 되는 돈을 거래하고, 찰나의 정보로 돈이 돈을 버는 세상에서 내 노동의 가치는 예술이라는 부가세를 떼며 책정된다. 그리고 그 노동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기본권이라는 이야기를 시작하면 결국 최저시급으로 울타리를 지어낸다. 이 기준으로 내 일을 환산하는 과정은 내 마음이 힘들고. 이도 저도 싫으니 역시 숭고한 예술 부가세를 떼며 물질에 관심 없는 쿨한 예술가를 자처해야 하는가. 생각이 여기저기 널을 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노동으로의 정당한 가치를 요구할 수 있는 일인가.

다시 내 상황을 돌아본다. 생활에 보탬이 되는 ‘예술장려금’을 지급해주는 제도나 재단의 기금을 열심히 찾는다. 그리고 내가 그 자격에 되는지 확인하고 되면 안도한다. 기금을 주는 곳에서 ‘가 일반평균에 못 미치는 돈을 벌고 있음을 증명하면 네게 돈을 줄게’ 하면 거기에 내가 매우 적합함을 쉽게 증명해낸다. 내 노동의 가치는 여전히 사회기준에서 정하는 급여 평균에 미치지 못하고 기본생활권이 보장되지 않은 삶을 산다는 것을 서류로 확인해낼 수 있어 다행이라 여기며.

그러면서도 이 일을 꾸준히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라는 일침에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난 절이 싫은 것이 아니라 절이 바뀌기를 바라고 있답니다. 절이 바뀔 거라 기다렸지만 쉽게 바뀌지 않으니 좀 변하면 안 되나 중얼거리는 중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라는 문구를 보며 내 일을 하며 충분한 재화를 만들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아 스스로를 또 다독인다. 자본의 논리로 구성된 여기서 돈을 제대로 벌어 축적하지 않는 내가 소외되었기보다 대다수의 삶의 태도가 효율과 쓸모에 넘치게 치중하고 삶을 건조하게 하는 것이니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고. 삶을 소모해 틈새에서 착취된 대가를 나눠 가지는 악순환의 부품으로 사는 것보다 나은 것 같다고. 그러면서 나는 더 이상 무엇을 위한 쓸모로서 있어야 할지 쓸모가 없음이 어떻게 괜찮은지 또 이것들을 확인하고 고민하는 것은 무엇을 위하는지 다시 질문한다.

여러 갈래의 생각을 이리저리 해보니 지금 나는 세상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지 알 수 없는 혹은 어디에 위치하고 싶은지 잘 모르는, 아니 조금 알려는 상태 인 것 같다. 기본급이 보장되지 않는 일을 직업으로 택하며, 하는 일의 가치를 운운하기도 혹은 체념하기도 한다. 내 일을 따박따박 최저시급으로 계산해 보장받는 과정은 또 직접 마주하긴 두려운 것 같다. 그냥 한군데 속해 일관적인 입장으로 지내는 생활방식에 고정해 두긴 어려운 삶을 산다. 근로가 재화로의 가치 발생이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다고 목청 높이는 세상에서 내 예술 활동이 근로로써 얼마나 가치를 가지는지 증명하고 그 가치를 높게 책정해 달라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것인가 여전히 의문이다.

일단,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이 아는 데까지 그리고 이를 이야기해내는 데까지 걸린 시간에 비해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다. 나는 예술을 업으로 세상에 내 쓸모를 증명할 수 있는 경로를 찾아야 할지 세상의 속도와 상관없이 내 시계만 천천히 가는 것을 유지하는 데에 힘을 쓸지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다. 여긴 어떤 세상인지 들여다보고 나는 그 어디 즈음에 있는지 파악하기까지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고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여전히 숫자로 결론짓는 것이 불편하지만 해야 하는지 고민하며 최저임금으로 타협하는 데에서 납득과 체화의 과정이 두렵기에 결정하지 못하고 모르는 듯이 지내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이 넋두리의 결론이다.

 

필자소개

전보람은 몸이 하는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들여다봅니다. 내 몸 그리고 타인의 몸이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관찰하며 어떻게 다시 춤이 되는지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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