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청년예술인이었다.
✍ 신지연이며 신소우주
기획자이며 창작자
지난여름 ‘청년예술을 폐기하라’라는 주제의 연구 릴레이 프로젝트에 필진으로 초대된 나는 첫 미팅에서 성연주 연구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청년예술의 사회적 정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걸 왜 제가 정의해야 하죠? ‘청년’예술이라는 것은 정책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저는 이미 정해진 기준에 따라 관련 지원사업에 참여했을 뿐 현장에서 작업을 수행하면서 ‘청년’예술에 대한 의미를 고민해보지는 않았어요. 그건 정책을 만든 사람들이나 관련 분야의 연구자들이 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나에게 ‘청년’예술은 철 지난 이야기다. 올해로 만 40세가 된 나는 문화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청년이라 이름 붙은 사회 정책들의 연령 기준을 대부분 충족하지 못한다. 내가 ‘청년’예술에 대한 정의를 거부했던 것의 바탕에는 더 이상 속할 수 없는 사회적인 범주에 대한 무관심 내지는 회피의 태도가 깔려 있었다. 예술에 결부된 ‘청년’이라는 단어에서 나는 어떤 박탈감을 느꼈던 것 같다. 또한, 이제 막 청년이 아닌 새로운 범주에 진입하게 된 입장에서 앞으로의 일들이 내게는 더욱 중요한 문제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나는 아직 지나온 시간과 다가올 시간의 사이에 끼인 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코로나로 인해 사회의 여러 기능들이 멈추고 문화예술계에도 그 영향이 크게 미치고 있는 상황에서 다가올 시간을 준비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지나온 시간을 정리해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시간에는 청년예술 정책 아래 시행된 지원사업 수혜자로서의 경험이 포함되어 있다. 이 글은 매우 개인적인 소회의 성격이 강하지만 사회에서 청년이라는 범주에 속했었던 한 예술인의 자기 사례 연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청년’ 그리고 ‘예술인’
내가 ‘청년’과 ‘예술인’이라는 두 가지 함의를 당사자성으로 인식하고 활동하게 된 것은 2011년에서 2013년에 걸친 시기를 근거로 한다. 먼저 2011년부터 몸담았던 ‘가톨릭청년회관’이라는 공간에서 ‘청년’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면서 서울 홍대 부근의 다양한 지역 ‘청년’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러한 교류를 통해 이전에는 나의 삶과 활동에서 크게 방점을 두지 않던 ‘청년’이라는 세대의 구체성을 마주하고 이 문제를 나 자신의 당사자성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었다. 그러다 2013년 한 영화인의 죽음으로부터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태어났고 이곳에서 ‘예술인’의 활동을 증명해준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독립기획자로 활동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었고 불안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서류들을 챙겨 ‘예술인활동증명’을 신청했다. 결과는 반려였다. 반려의 이유는 문화예술 분야에서 ‘기획자’로 활동했던 나의 입장이 자료상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후 몇 가지 서류의 보완 절차를 거쳐 나는 ‘예술인’임이 증명되었다. 그런데 그 결과보다는 어떤 시스템상의 기준에 의해 나의 지나온 시간이 부정될 수도 있다는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예술인’으로서의 당사자성을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나는 ‘청년’과 ‘예술인’이라는 당사자성을 각각의 다른 경로를 통해 내재화(동기화)하였다. 전자가 현장을 기반으로 한 관계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면 후자는 현장을 지원하는 시스템에서 배제된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 한 사람의 ‘청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느 계절을 지나며 그 계절을 알고 있는 누군가에게 보편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반면, 한 사람의 ‘예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느 계절에도 속하지 못하는 없는 계절을 스스로 증명해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 두 가지를 대하는 나의 절박함에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개인에게 내재화된 다중의 당사자성 중 어느 하나가 발현되는 것은 절박함에 기인한다. 나는 ‘예술인’으로 살아남고 싶었다.
2014년부터 독립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나는 그 ‘절박한 예술인’의 이야기를 밑천 삼아 각종 지원사업을 신청했다. 직접적으로 문화예술분야에 연관된 사업들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타 분야라 할지라도 문화예술 관련성이 있는 사업들을 찾아내 보잘것없는 밑천을 포장하고 때로는 억지로 끼워 맞춰 신청서를 쓰고 또 썼다. 말하자면 마구잡이식이었다. 그러는 사이 흘러가는 시간은 붙잡을 수 없었고 생계는 점점 더 막막해졌다. 지원사업에 선정이 되건 안 되건 그러한 상황은 별로 달라질 게 없었다. 그리고 주변의 동료 예술인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죽거나 다른 일을 찾아 떠났다. 모순적이게도 세상은 ‘예술적인 것들’로 가득했다. ‘예술하는 사람들’은 넘쳐났고 “누구나 예술가”라는 말은 마치 70년대 새마을운동의 “잘살아보세”라는 구호처럼 번져갔다. 그렇지 않다는 반론을 제기하면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자신의 작업 세계에만 몰두하는 사회(예술) 부적응자가 될 것만 같았다. 본질적으로 우리의 삶 자체가 예술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나에게 예술은 절박한 현실의 문제였고 예술의 사회적 가치는 지원사업의 신청서상에서만 유효했다. 추앙받는 예술의 모습과 동떨어져 나는 없는 계절에 살고 있었다.¹⁾
“시대가 거꾸로 흐르고 있다고들 한다. 나는 30대 중반으로 회사에 다니지 않으며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자식을 낳아 기르지 않으며 반지하에서 딱 나 혼자 생존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벌어 산다. 이것은 내 선택이다. 혹은 누군가의 선택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시간에 나를 싣고 나아가려는데 누군가 자꾸 뒤에서 나를 잡아당긴다. 설상가상 누군가는 앞에서 나를 밀어낸다. 그러한 작용과 반작용에 의해 내가 소멸해갈 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아당기고 밀어내는 그 사이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떤 생각을 떠올려야 하는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
- <사계 2016-1989 : 없는 계절>, 신소우주 2016
‘최초예술’과 ‘나’
2017년 여름, 나는 동료 예술인으로부터 ‘최초예술’ 지원사업에 관해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다. 그해 벌써 2차 공모라고 했다. 예전 같으면 훤히 꿰뚫고 있었을 정보지만 나는 많이 지쳐있었고 예술 밖에서의 진로를 고민하기도 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지원사업 전반에 별 관심이 없었다. 무엇보다 ‘최초예술’은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2008년 문화예술단체에서 기획 업무를 시작한 이후로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나의 ‘최초예술’은 이미 지나가 버려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한동안 마음을 비우고 다시 예술인으로 살아갈 용기와 힘이 차오르기를 기다리며 나는 39세의 나이가 되었다. 이제는 정말 막다른 길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그때 불현듯 ‘최초예술’이 떠올랐다. 예술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애써 부여잡고 있던 나이, 경력, 역할 따위가 부질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초’라는 단어가 단순히 맨 처음이라기보다는 ‘전환’ 내지는 ‘재시도’로 읽혔고 그러한 의미에서 나 자신과 ‘최초예술’의 상관관계를 면밀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최초예술’을 지원하는 나의 입장
2018년 서울문화재단에서 발표한 예술지원사업 공모 안내문에서 ‘최초예술지원’은 ‘청년예술지원사업’이라는 별도의 카테고리에 속해²⁾ 있었다. 사실 나는 이때 ‘최초예술’과 청년예술정책의 관련성을 처음 인지하게 되었다. 몇 년 사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청년 관련 사업들이 주최 기관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나이 제한을 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신청 자격 기준을 살펴보았다.
-공공지원금 수혜경험이 없고, 서울에서 예술 창작활동을 계획하고 있으며, 아래➊ 또는 ➋중 하나의 요건에 해당하는 자
➊39세 이하(1980.1.1. 이후 출생) 예술인
➋데뷔 10년(2009.1.1. 이후 데뷔) 이하의 예술인
39세였던 나는 ➊의 기준에 해당했기 때문에 신청 자격에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아도 될 ➋의 기준에 신경이 더 쓰였다. 애초에 ‘최초예술’과 나의 관계를 부정했던 것은 ‘데뷔 10년 이하의 예술인’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이라는 기준에 가까스로 포함된 것은 다행이라 생각되었지만 10년을 꽉 채운 경력을 가진 내가 이 지원사업을 신청한다는 것은 솔직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마치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유급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더구나 ‘최초’라는 단어가 주는 다소 과장된 느낌은 이 사업을 접한 현장의 예술인들 사이에서 냉소적인 비웃음거리가 되기도 했기에 나 역시 그런 이유로 선택을 주저했던 것이다.³⁾
지원사업의 작명이라는 것은 대상자가 개입할 여지가 딱히 없는 정책이나 사업의 탄생 과정으로부터 나온 지향점을 그나마 압축적이고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런 측면에서 청년예술정책 이전에 사용된 ‘신진’이나 ‘유망’은 가난하거나 기회가 부족하여 딱히 여겨지는 예술인의 현실에 어떤 희망과 기대의 가능성을 부여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정책에서 예술인으로의 일방향적인 요구를 담고 있는 듯했고 그 가능성은 다분히 추상적이었다. 어쨌든 자신의 작업 계획에 대한 심사를 받아야 하는 예술인의 입장에서 무엇이 ‘신진예술’이고 ‘유망예술’이냐는 것은 대상화된 개념일 수밖에 없다.⁴⁾
그에 비해 ‘최초’는 보다 당사자적인 관점에서의 접근과 점검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헛된 희망과 기대보다는 현재 나 자신이 처한 입장과 지금 여기에 다다르게 된 과거의 시간을 복기하게 하는 구체성이 있었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정리된 나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① 예술대학의 예술경영 전공자.
② 졸업 후 2008~2013년까지 몇몇 문화예술 관련 단체에서 기획자로 근무.
③ 2014년부터 프리랜서 형태의 독립기획자로 활동.
④ 2015년 동료 예술인과 협업으로 진행한 프로젝트를 통해 ‘신소우주’라는 활동명을 공개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며 창작자로의 전환을 시도.
⑤ 나는 기획자인가? 창작자인가?를 수없이 자문하는 39세 예술인.
나는 ①~④를 거쳐 현재 ⑤라는 입장에 처해 있었다. 해당 분야 전공자이면서 기획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일을 시작한 입장에서 왜 나는 지금 기획자인가 창작자인가를 따지고 있는 것일까. 기획이나 창작의 영역은 물론 장르를 넘나드는 융복합의 세상에서 나는 왜 이런 촌스러운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사실 개인적으로 작업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기획과 창작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는 명확히 ‘기획자’라는 역할로 계약된 업무를 진행할 때에도 스스로 그것을 하나의 창작으로 간주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태도는 매우 강박적인 것이었다. 기획이라는 것에 나 자신이라도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위기의식을 느끼곤 했다.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하는 ‘기획자’라는 타이틀이 허울 좋게만 느껴졌다. 적어도 내가 속해있던 문화예술 현장에서 ‘기획자’는 그 고유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주변인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예산 부족 등의 열악한 상황에서 ‘기획’은 어떤 기준도 없이 온갖 잡다한 영역들을 포괄한다. 비전문적인 것들을 적당히 두루두루 해내는 것이 기획자의 역량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나이가 어리거나 경력이 적을 때 그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을 나는 경험하고 목격했다. 그렇게 디자이너가 아니지만 포토샵을 잡고 영상 작업자가 아니지만 프리미어를 잡고 기획서도 쓰고 섭외도 하고 다과도 준비하고 사진도 찍고 보도자료도 발송하고 매표도 하고 객석 안내도 하고 정산도 하며 밤을 지새우던 수많은 날이 있었다. 그 사이사이 나도 내 얘기를 꺼내놓고 싶다는 바람을 조금씩 쌓아갔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바람에 대해 점차 확신하게 되면서 나의 입장을 전환하기 위한 몇 가지 시도를 감행했다. 그 중 주요한 한 가지는 졸업 후 짧게는 반년에서 길게는 3년까지 이어오던 조직 생활을 벗어나 독립기획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본격적으로 창작을 시도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아 자신에게 창작자의 정체성을 ‘신소우주’라는 이름으로 부여한 것이다. 이는 매우 상징적인 제스처이기도 했지만, 실질적으로 지금까지 활동해오던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 이름으로 증명되었던 나의 포트폴리오를 새롭게 다시 만들어가야 한다는 문제에 대한 직면이기도 했다.
앞서도 서술했듯이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시도는 나를 압박하고 위축시켰다. 어쭙잖게 새로운 이름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전시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고유한 기획과 창작을 흔들림 없이 이어온 예술인들을 마주할 때면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입장일 뿐이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냥 하던 거나 할 걸 그랬나 라는 후회와 함께 이제는 정말 미련 없이 예술인으로 살아남는 것을 포기해야 할 때가 온 듯했다. 그 와중에 나는 ‘최초예술’을 마지막 시도로서 바라본 것이다. 누군가 정해놓은 청년의 끝자락에서 설령 그것이 나의 ‘최후예술’이 될지언정, 지금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나의 방식으로 드러내고 이것이 나의 ‘최초예술’임을 스스로 선언할 수 있길 바라며 그 서두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최초예술’을 수행하는 나의 입장
나의 ‘최초예술’은 펭귄어패럴이라는 소규모 봉제 공장을 배경으로 한다. 묵직한 공업용 미싱 앞에 초보 미싱사 신소우주가 앉아있다. 펭귄어패럴은 여느 다른 봉제 공장처럼 하청으로 일감을 받거나 자체적으로 옷이나 가방 같은 상품을 제작하여 판매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녀가 출근해서 하는 일이라곤 봉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기술인 일자박기를 연습하는 것뿐이다. 사람들은 이런 그녀를 의아하게 여기며 걱정한다. 일자박기를 연습했으면 곡선박기를 하든 무엇을 만들어 팔든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생산성도 없는 일을 계속해서 뭐하냐고 한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값이 싼 흰색 안감 원단에 티도 나지 않는 흰 실로 일자박기를 한 줄 한 줄 쌓아가다 보면 힘없이 후들거리던 천은 어느샌가 단단해져 있더라는 한 가지 사실. 어쩌면 너무 당연해서 간과하기 쉬운 이 사실을 그녀 자신의 목소리로 꺼내놓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초보 미싱사인 ‘신소우주’의 목소리를 통해 예술인으로서 살아가는 나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펭귄어패럴의 초보 미싱사 신소우주는 어제-오늘-내일도 일자박기를 연습한다. 그녀에게 있어 ‘일자박기 연습시간’은 미싱이라는 기계의 단단한 힘과 낯선 속도에 적응해가는 과정이다. 또는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힘과 속도로 삶을 밟아 나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 <펭귄어패럴 컬렉션 「노동의 철학1: 일자박기 연습시간」>, 신소우주, 2019
운이 좋게도 나는 올해까지 3회 연속으로 ‘최초예술지원사업’의 선정자가 되었다. 2018년 첫 프로젝트를 진행한데 이어 2019년 청년예술지원사업 내 신설된 다년(2년)간 지원유형에 선정되면서 2020년 기준으로 서울문화재단에서 폐기되어버린 ‘청년예술’의 뒤안길에 남겨져 유예된 청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이 시간은 조금 더 연장될 것 같다. 코로나로 인해 프로젝트 진행이 어려운 경우 내년 6월까지 발표일정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서울문화재단의 대응지침에 따른 것이다. 사회적인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이 한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구체적으로 실감하고 있는 요즘이다. 그렇게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다. 내 의지로는 불가능했던 상황이 외부의 작용에 의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뜻밖에 주어진 이 시간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생각을 떠올려야 하는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해 예전처럼 조바심이 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최초예술’을 수행하는 지난 2년여의 시간 동안 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속도를 인정하고 그러한 리듬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예술인으로서의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길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적어도 외부의 작용과 반작용 사이에서 소멸하지 않을 수 있다는 안도감을 이제라도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참 다행인 일이다.
‘예술인’에 부여된 ‘청년’이라는 계절
스스로 선택한 예술인의 길 위에서 수없이 헤매었던 나의 발걸음은 삐뚤빼뚤 하지만 선명하게 남아있다. 거기엔 아픈 실패의 자국도 있고 간절한 시도의 자국도 있고 인내한 성취의 자국도 있다. 사실 이것은 비단 예술인의 길이 아니라 보편적인 우리들 삶의 길이다. 그런데도 예술인 당사자로서 경험한 나의 길은 보편의 이해를 받기보다 어느 때는 돈도 안 되고 쓸데없다는 이유로 미련한 취급을 받거나 또 어느 때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특별한 취급을 받아왔다. 이 두 가지 모두는 어느 개인에게 큰 상처이고 부담이 되어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서 어떤 해가 비추는지 어떤 바람이 불어오는지 어떤 풍경이 펼쳐지는지 어떤 계절이 지나가는지 감지할 수 없게 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꼭 맞다. 내가 지금 예술인으로 살아남아 이렇게 ‘청년예술’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는 건 실로 놀라운 일이다.
솔직히 나는 그들만의 테이블 위에서 뚝딱 만들어져 나온 지원사업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동안 정책의 변화나 기관장의 들고 남에 따라 그러한 사업의 생성과 소멸이 수시로 반복되는 상황을 지켜보았고, 몇몇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현장 예술인들의 목소리가 그곳에 닿기에는 정책 테이블과 현장 바닥 사이의 간극이 너무나 크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최초예술지원’의 수혜자로서 “기존 예술지원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한 청년예술인이 예술창작활동 기회를 제공받아 예술현장에 정착하고 안정된 활동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⁵⁾와 같은 예술정책 성공 사례의 증거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나는 운 좋게 ‘청년예술’의 막차를 탔을 뿐인지도 모른다. 물론 나의 모호했던 예술을 ‘최초’로 전환하기 위해 자신을 설득하고 현재의 입장을 정리해갔던 과정은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이었고 나는 예술 활동을 시작한 이래로 거의 최초의 안도감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청년정책의 범주나 지원사업의 안전망을 벗어나서도 유지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하나 분명한 것은 반짝하고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엄연히 존재했던 그 시간이 내가 예술인으로서 걸어가는 길 위에 또 하나의 자국으로 남겨졌다는 사실이다. 비로소 나는 ‘청년예술인’이었던 당사자가 되었고⁶⁾ 그것은 내가 ‘청년’이라는 계절을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회적인 영역 안에서 ‘예술인’의 입장이 ‘청년’이라는 보편성과 구체성으로 호명되어 다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자체만으로도 나에게 있어 폐기된 ‘청년예술’은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청년 이후 다가올 ‘예술인’의 시간에서도 어느 계절을 감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부족한 필력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꾸역꾸역 써내려간 이유이다. 그 계절을 알고 있는 누군가로부터 보편의 지지를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 미련하지도 그리 특별하지도 않은 나의 직업은 예술인이다.
신지연이며 신소우주
저는 펭귄어패럴의 초보 미싱사입니다. 미싱이란 저에게 예술 작업으로서의 매개인 동시에 불안한 미래를 준비하는 생계의 기술입니다. 펭귄어패럴에서 매일 매일 연습시간을 보내고, 한 명 한 명 개인을 만납니다. 그 시간과 만남이 맺어 준 관계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와 주고받는 대화를 기록합니다.
1) “이런 상황에서 최근의 사회 변화를 눈여겨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예술가처럼 생각하기, 예술가적 삶을 살기를 지향하고 있다. 그리고 청년세대가 그런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의 대표주자인 것처럼 소개된다. 여기서 말하는 예술하기, 예술가하기의 속뜻은 천재성이나 수월성, 예술성과는 거리가 멀다. 창작하기, 나만의 브랜드 만들기, 내가 곧 일이자 기업이 되기 등이 더 어울린다. 최근 화제가 되는 유튜버, 크리에이터, 기획자들이 자신을 예술가라고 칭하는 경우를 나는 종종 목격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라이프 스타일이자 일의 방식으로 추앙받는 예술의 모습은 공고한, 독립적인 장으로 작동하던 전통적인 예술장과는 작동원리부터 다르다. 또한, 흥미롭게도 다수의 청년예술가는 이미 그런 장의 경계를 넘나들며, 무너뜨리며 일을 하고 있다. 미술작가가 공간 컨셉 디자인을 해주거나, 동네 카페에서 로컬 뮤지션의 음악을 들으며 워크숍이나 클래스를 받는 장면은 우리가 이미 익숙하게 목격하고 있는 예술의 변화이자, 사회의 변화이다. 그런 점에서 ‘청년예술’의 진정한 함의는 극심한 빈곤으로 죽음을 택하거나, 물리적으로 어린 나이임을 강조하는 것에 있지 않다. ‘청년예술’은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예술의 위치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런 전환은 전통적인 예술 장의 신화를 깨부수는 것을 제1의 요소로 삼는다. 서울문화재단의 청년예술인창작지원은 막대한 예산이란 외부의 힘으로 이 신화에 작은 돌을 던졌고, 그런 만큼 시각예술, 연극 등 각종 장르에서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내는데 소소하게나마 성공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예술 장 내부의 힘으로 더 큰 전환을 만들어내야 하는 국면에 돌입했다. 내가 이 글에서 주장하는 청년예술의 폐기는 그런 맥락 위에 존재한다. 청년이란 나이, 풋내기 애송이라는 경력의 미천함, 가난과 궁핍함의 아이콘으로 존재하는 청년이 아닌, 예술가하기의 성공적인 전환을 통해 사회와 긴밀히 소통하고 자신의 작업 세계를 공고히 쌓아가는 그런 청년예술의 시대를 호출하는 것이다.” 성연주, 청년예술을 폐기하라, 웹진 『숨은참조』, (2020.8) (https://seoulartist.tistory.com/34?category=917556)
2) 그 전후의 흐름을 살펴보자면 2016년 10월 수립된 ‘서울예술인플랜’에 따라 서울문화재단은 이전에 사용하던 ‘신진’ 혹은 ‘유망’ 예술을 ‘청년’ 예술로 재명명하여 2017년 지원사업에 반영하기 시작했고, 2018년부터는 기존에 운영되었던 ‘최초예술지원’과 더불어 ‘청년예술공간지원’을 신설하고 서울시로부터 ‘서울청년예술단’을 이관 받아 본격적으로 ‘청년예술’을 표방한 지원사업의 체계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3) 비슷한 뉘앙스의 지원사업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2019년에 시행한 ‘청년예술가생애첫지원’ 공모사업이 있다. (https://www.arko.or.kr/board/view/4013?bid=463&page=11&cid=1601932&sf_icon_category=cw00000019) 현재는 ‘아르코청년예술가지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운영되고 있다.
4) “정책의 목적을 구성하는 단계에서 정책 설계자의 청년예술인에 대한 인식과 무책임이 은연중에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서울예술인플랜과 서울청년예술단의 설계 주체가 일정 부분 전문성과 대표성을 갖고 있었음에도, 이를 공식화하는 과정에서 청년예술가를 대상화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아마도 여러 청년예술정책이 여전히 시혜적인 태도 혹은 그러한 인상을 풍기는 것은, 이렇듯 정책이 구상되는 단계에서 은연 중에 청년예술가를 딱하게 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리라.” 정진세, 〈청년예술을 폐기하더라도〉, 웹진 『숨은참조』, (2020.10) (https://seoulartist.tistory.com/34?category=917556)
5) 서울문화재단 청년예술지원사업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기존 예술지원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청년예술인 대상 맞춤형 지원시스템을 마련하여 다양한 예술창작활동 기회를 제공하고 예술현장에 정착할 수 있도록 안정적 활동 기반을 조성” (2018-2019)
6) “돌이켜 보면, 2017년의 서울청년예술단 사업은 일종의 ‘당사자’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마중물 사업으로 진행되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후 새롭게 등장한 역할모델이 정책의 파트너가 되어 사업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고, 재설계했어야 본 정 책이 보다 단단해지지 않았을까.” 정진세, 청년예술을 폐기하더라도, 웹진 『숨은참조』, (2020.10) (https://seoulartist.tistory.com/34?category=917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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