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예술’을 폐기하라
✍ 성연주
문화사회학 연구자
euniceseong@gmail.com
2017년, ‘청년예술’의 등장
청년예술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그동안 다양한 예술 장르는 각자의 방식대로 젊은 2-30대 신진예술가를 씬의 유망주로, 나아가 예술계의 거장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다양한 제도를 마련해왔다. 이를테면, 문학의 ‘젊은작가상’, 시각예술의 ‘젊은모색’, 공연예술 분야의 각종 콩쿠르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나는 ‘소수 엘리트의 선발을 통한 씬의 상징적 가치 부여’라는 전통적 예술가양성프레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결의 ‘청년예술’이 2017년 등장한 것을 목도했다. 그것은 바로 <서울청년예술단 사업>과 <서울문화재단 최초예술지원사업>이었다. 막대한 예산의 투입, 대규모 인원 선정, 활동비 70만 원 10개월 지원 등 이 사업들에서 단행된 파격적인 조치가 미친 여파는 상당했다. 이 사업을 통해 새로운 얼굴들이 다수 씬에 등장하였고, 이 사업을 시작으로 청년/청년문화/청년예술을 기표로 한 지원사업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청년예술은 그렇게 2017년 새로운 개념으로 재탄생했다.
‘청년예술’에 질문을 던지기
그런데 ‘청년예술’이 예술계와 문화정책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학술적, 이론적, 담론적, 또는 정책적 논의는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선정 작품에 대한 미학적 논의나, 선정자의 변을 들어보지 못한 채, 그리고 사업을 기획한 공공기관의 의도를 분석해보기도 전에, 개념의 전복을 촉진했던 서울문화재단 사업은 청년의 이름을 다시 ‘신진’으로 돌려놓았다(2020년 예술지원체계 개편). 그사이 청년예술이 무엇인지, 청년예술가는 어떤 사람들인지 질문을 던지는 주체는 별로 없었다. 이러한 현장의 파급력과 정책 담론화 사이의 가시화된 격차에 주목하여, 나는 ‘청년예술’에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청년예술지원사업 팩트체크(fact-check)
가시화된 격차라고 명명하였으니, 우선 기본적인 팩트체크부터 해보자. 다음 그래프는 2016년부터 19년까지 서울문화재단 사업 예산을 정리한 것이다(그림1). ‘기존지원사업(파란색)’은 예술가지원, 예술작품지원, 공연장상주단체육성지원, 공연단체다년간지원 등의 기존에 운영하던 사업의 예산을 모두 더한 것이다. ‘유망예술지원’은 연령/경력 기준 청년에 해당하는 일련의 지원사업을 말하고,¹⁾ ‘청년예술인창작지원’은 2016년 신설된 ‘최초예술지원_비기너스 프로젝트(50여 건, 각 200만 원 지원)’라는 작은 사업단위에서 2017년 또 하나의 지원 범주가 신설되어 본격적으로 청년예술지원사업이 운영된 것을 말한다.여기서 분기점은 2017년이다. ‘청년예술인창작지원’에 투입된 예산 규모는 서울시(서울청년예술단 운영)와 서울문화재단(최초예술지원 운영)을 합해 총 130억으로, 2016년 기존 ‘예술창작지원’ 예산 86억 원을 크게 상회한다. 2016년 ‘비기너스 프로젝트’의 청년예술인 선정 건수가 50여 건인 데 반해, 2017년에는 약 700여 건(최초예술지원사업 600여 건, 청년예술단 100여 건)을 지원하여, 선정 규모는 전년 대비 약 14배 증가하였다(50→700건). 2018년부터 서울청년예술단 사업이 재단으로 이관 및 예산 규모가 축소되어 총 70억 원, 2019년 총 90억 원으로 2017년 대비 예산과 선정 규모는 감소하였지만, 청년예술인창작지원은 여전히 기존 예술창작지원사업과 동등한 규모의 예산을 쏟아부었다.
‘청년예술’이 담론화되지 못한 이유: 부르디외(Bourdieu)를 경유하여
수많은 청년예술가에게 서울청년예술단은 든든한 안전망이었다. 또래끼리의 크루 결성, 10개월 동안 지급된 활동비를 통해 최소생활비 해결(매월 70만 원), 작품제작비 별도 지원 등은 사실상 그 어떤 연령대의 예술가도 경험해본 적 없는, 생활과 창작을 모두 아우르는 지원이었다. 최초예술지원사업 또한 ‘공공지원 경험 없음’을 지원 자격으로 내걸어 새로운 얼굴들이 처음으로 공공과 관계를 맺고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장으로 기능하였다.
하지만 ‘청년예술’은 끝내 담론화되지 못했다. 나는 부르디외의 이론을 경유하여 이렇게 된 과정과 결과를 짧게나마 분석해보고자 한다. 그동안 예술은 예술가들의 천재성이나 작품의 위대한 예술성을 담보로 하나의 견고하고, 분리된, 독립된 영역을 고수해왔다. 이를 부르디외를 빌려 ‘상징자본’이라 칭한다면, 상징자본이 중요하게 작동하는 상, 비엔날레, 콩쿠르가 권위를 부여하는 제도로 작동하고 있고, 이런 제도는 기성 예술가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굴러간다. 이런 성장 트랙을 따라 씬의 중심으로, 위로 올라가면 예술가는 엄청난 개런티를 받거나, 비싼 값에 작품을 판매하는 소위 지배자로 거듭나게 된다(아래 표 참조).
반면 서울청년예술단이나 최초예술지원사업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나이, 또는 청년예술가의 생계 곤란 문제는 예술가들이 자신을 뽐내거나 서로에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내기물로 작동하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이 사업들은 실질적 효과에 비해 예술가의 포트폴리오로 작용하는 상징적 효과가 약했고, 청년예술가들끼리 크루와 네트워크를 만든다는 것도 공고한 예술 씬을 뒤흔들 만큼의 엄청난 파괴력을 담보하기 어려웠다. 안정적인 생계지원비를 모두 꿈꾸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술가로 사는 삶의 성공을 단순히 생계의 유지만으로 보지 않는 상황에서 이 사업들이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 씬을 만들기에는 무언가 2% 부족했다.
부르디외 이론 | 예술 장 | 청년예술정책 |
상징자본 | 예술성, 천재성, 수월성 - 예술에 대한 미학 | 나이? |
문화자본 | 상, 비엔날레, 작가전, 콩쿨, 유명대학 입학, 유명단체 입단 | 서울청년예술단, 최초예술지원이라는 정책과 사업? |
사회자본 | 기성 예술가/단체/기관들의 네트워크 | 청년(신참자)들끼리의 네트워크? |
경제자본 | 레슨비, 등록비, 개런티, 작품비 | 안정적인 생계지원비? |
‘청년예술’을 폐기하라
이런 상황에서 최근의 사회 변화를 눈여겨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예술가처럼 생각하기, 예술가적 삶을 살기를 지향하고 있다. 그리고 청년세대가 그런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의 대표주자인 것처럼 소개된다. 여기서 말하는 예술하기, 예술가하기의 속뜻은 천재성이나 수월성, 예술성과는 거리가 멀다. 창작하기, 나만의 브랜드 만들기, 내가 곧 일이자 기업이 되기 등이 더 어울린다. 최근 화제가 되는 유튜버, 크리에이터, 기획자들이 자신을 예술가라고 칭하는 경우를 나는 종종 목격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라이프 스타일이자 일의 방식으로 추앙받는 예술의 모습은 공고한, 독립적인 장으로 작동하던 전통적인 예술 장과는 작동원리부터 다르다. 또한, 흥미롭게도 다수의 청년예술가는 이미 그런 장의 경계를 넘나들며, 무너뜨리며 일을 하고 있다. 미술작가가 공간 컨셉 디자인을 해주거나, 동네 카페에서 로컬 뮤지션의 음악을 들으며 워크숍이나 클래스를 받는 장면은 우리가 이미 익숙하게 목격하고 있는 예술의 변화이자, 사회의 변화이다.
그런 점에서 ‘청년예술’의 진정한 함의는 극심한 빈곤으로 죽음을 택하거나, 물리적으로 어린 나이임을 강조하는 것에 있지 않다. ‘청년예술’은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예술의 위치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런 전환은 전통적인 예술 장의 신화를 깨부수는 것을 제1의 요소로 삼는다. 서울문화재단의 청년예술인창작지원은 막대한 예산이란 외부의 힘으로 이 신화에 작은 돌을 던졌고, 그런 만큼 시각예술, 연극 등 각종 장르에서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내는데 소소하게나마 성공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예술 장 내부의 힘으로 더 큰 전환을 만들어내야 하는 국면에 돌입했다. 내가 이 글에서 주장하는 청년예술의 폐기는 그런 맥락 위에 존재한다. 청년이란 나이, 풋내기 애송이라는 경력의 미천함, 가난과 궁핍함의 아이콘으로 존재하는 청년이 아닌, 예술가하기의 성공적인 전환을 통해 사회와 긴밀히 소통하고 자신의 작업 세계를 공고히 쌓아가는 그런 청년예술의 시대를 호출하는 것이다.
5명의 필자를 초대하며: 정진세, 신지연, 김선기, 오경미, 장은정
청년예술의 폐기는 예술지원기관과 예술가의 변화를 통해 시도해볼 수 있다. 관련한 정책적 제언을 여기서 짧게 덧붙여보면, 우선 예술지원기관은 전통적인 예술 장의 신화가 끝났음을 인정하고, 예술이 사회의 더 보편적인 문법과 연결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최근 몇 년 사이 두드러진 경향을 보이는 사회적 예술(또는 예술의 사회적 가치)은 순수예술의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마치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가장 순수하고 정교한 예술작품에서 사회적 의미를 끌어내고, 사회적 예술을 적극적으로 표방하는 프로젝트에서 예술의 미학적 가치를 끌어낼 수 있어야 사회/비사회 구분을 넘어 예술을 도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최근 대두되는 예술가의 매개자형 작업(생활예술, 지역문화, 예술교육 등 여러 분야)에 참여하는 예술가들이 많은데, 예술지원기관은 이런 일이 예술가의 생계가 아니라 작업에 도움이 되는 기회로 만들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기획, 프로젝트, 거버넌스, 협치, 참여, 매개 등의 단어로 표현되는 다양한 일의 기회는 임금(wage)의 기회가 아니라 경력(career)의 기회로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다음으로 예술가는 자신의 권리와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한 주제 중심의 소규모 다양한 연대를 끊임없이 조직하고, 이 연대들의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여성문화예술연합, 미술인생산자모임 등 최근 조직된 연대체의 양상을 보면, 심화한 주제를 중심으로 소수의 활동가가 다수의 예술가와 함께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연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연대 활동은 예술가의 작업과 괴리된 것이 아니다. 이는 그 무엇보다 자신의 작업과 긴밀히 호흡하는 활동이다. 따라서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동료를 찾고 연대해야 하고, 더 주제를 좁히고 특정화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더하여, 예술가들은 자신의 창조성과 예술성의 가치를 인정받는 기회가 예술 장 너머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생산, 비물질, 비경제적 노동의 현장에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노동의 문법을 구축하는 것은, 자신의 작업을 정의하고 규정하는 새로운 방식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노동은 결코 전통적 예술 장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나는 이 글이 하나의 담론으로, 나아가 정책으로 작동하기 위해 5명의 필자를 초대했다. 서울청년예술단 기획에 참여한, 극작가이자 비평가인 정진세와 최초예술지원사업에 선정된 작가 신지연을 통해 실제 사업의 기획과 집행에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들어보고자 한다. 이어서 청년연구자 김선기, 문화예술노동연대 사무국장 오경미, 그리고 문학평론가 장은정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청년예술의 사회적 정의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 말이 가져온 사회적 효과에 대해 릴레이 형식으로 담론을 이어가고자 한다.
서울문화재단의 청년예술인창작지원사업은 2019년 공식적으로 사업을 종결하고, 신진-유망-중견의 생애주기 지원체제로 사업을 개편하였다. 동시에 서울문화재단은 2020년 충정로에 청년예술청을 개관 준비 중이기도 하다. 이처럼 ‘청년예술’이란 언어는 정책에 따라 없어지기도 하고, 또 새롭게 생겨나기도 한다. 하지만 청년예술가란 ‘사람’은 언제나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항상 존재할 것이다. 이런 정책과 현장의 틈새에서 정책화된 ‘청년예술’의 폐기가 유의미한 ‘청년예술’의 담론화로 나아가는 마중물로 작동하기를 소망해본다.
1) 연극: 서울연극센터 뉴스테이지(NEWStage), 무용: 서울무용센터 닻(dot), 다원예술, 전통예술, 음악: 문래예술공장 맵(MAP), 시각예술: 서교예술실험센터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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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연구릴레이 프로젝트는 그 이름에 걸맞게 '소논문' 정도의 글쓰기를 목표로 했다. 아래에 첨부된 파일은 원 의도대로 작성된 학술적 글이다. 필진들과 조율하는 과정에서 짧고 압축적인 글을 새롭게 작성하게 되었지만, 위의 글에 미처 담지 못한 학술적 문제제기, 이론적 적용이 더 궁금하다면, 첨부파일을 확인 바란다.
청년예술(인)의 사회적 정의와 효과
– 부르디외 장 이론(field theory)과 프레카리아트(precariat) 담론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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