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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숨은참조'/말한다

[말한다] 미래를 여는 예술문 ⑥ 문화예술 행정에도 비평이 필요하다

by 서울청년예술인회의 2021. 7. 28.

문화예술 행정에도 비평이 필요하다

 

웨일

 

"2021년 한국에서 문화 행정을 통해 수행되는 각종 사업은 적극적인 비평의 영역이 될 수 있을까?"

짧다면 짧은 1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몇 개의 문화재단에서 직원으로 근무하며 크고 작은 사업을 운영했고, 동료들이 담당한 사업의 운영 방식도 간접적 지켜보며, 문화재단의 업무 수행 방식을 터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항상 부족했다.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마다 ‘혹시 내가 잘못된 프로세스를 이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서류로 적은 기획안 한줄 한줄은 효과적인 방법일까’와 같은 고민은 멈춰지지 않았다. 아직은 경력도 실력도 부족한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감 충만한 정체성을 가지는 것도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한 까닭에 ‘미래를 여는 예술문’과 함께 하게 되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기획자와 예술가들이 전달해 주는 ‘현장의 고민’을 바탕으로, 수행하는 사업의 큰 방향성과 미세한 프로세스가 ‘객관적 쓸모’를 획득하길 바랐다. (‘그렇다면 왜 재단 내에서 본인의 고민을 풀어볼 노력을 하지 않았는가’라고 질문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재단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대다수 재단의 업무환경은 보이거나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개인주의적이며, 사수가 없다고 가정하고 업무를 풀어가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어쨌든 이 글은 한 명의 사업 담당자가 문화예술행정을 수행하면서 자연스럽게 느꼈던 의구심에 관한 것이다. 돌이켜 보건데, 재단과 기관에서 행정을 수행하면서, 결과물의 형식과 내용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점은 '사업의 방향성과 방법론을 어떻게 설정하는가'로 요약된다. 그리고 이런 방향성 설정의 바탕이 되는 다수의 개념 중 내게 피부로 와닿는 세부적인 개념은 ‘지역’이었다. 광역문화재단과 기초문화재단을 포함하는 ‘문화재단’은 주로 문화예술진흥법과 ‘지역’문화진흥법에 그 설립 기반을 둔다. 따라서 작게는 사업 수행자인 행정가가, 크게는 재단이라는 조직 전체가 ‘지역’을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 사업 수행의 내용과 결과가 차이가 나게 된다.

구체적으로 밝히긴 어렵지만, 직전엔 문화공간을 조성하고, 공간 활성화를 위해 적합한 예술가와 기획자를 섭외하여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어가는 직무를 담당했다. 공간이 위치한 장소는 대규모 개발 사업과도 맞물린 곳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프로그램에 적합한 예술가와 기획자’를 이해하는 각자(사업에 관여된 개인과 기관)의 생각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각기 달랐고, 이는 ‘지역’의 개념을 이해하는 각자의 차이와 맞물려 있었다.

내게 지역이란 사업 목표에 따라 프로그램에 녹여내야 할 정도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근무했던 기관에게 지역은 더 짙은 개념이었다. 사업에 적합한 예술가나 기획자는 지역 기반으로 활동한 경력이 오래된 이들이 선호되었다. 표면적으론 이러한 협력자 기용 방식이 사업목적에 따라 합리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 마주한 지역 밀착형 네트워크는 강력한 의문점을 품게했는데, 냉정히 말해, ‘지역’과 밀착된 협업자는 문화예술계의 일반적 기준에서 역량이 담보된 협업자인지 증명되지 않았다. 그래서 함께 해왔던 지역 네트워크를 공고히 하는 전략들은 때때로 더 적합한 인물을 발굴하지 않는 나태한 행정이 되고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던지도록 만들었다. 더더욱 냉정한 말이겠지만, 특정한 지역 활동가에게 (공모의 과정을 생략하고) 기회가 주어지는 사업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해당 사업 방향성 유지하면서도 완성도가 높은 수준의 결과물을 구사해내는 네트워크 외부의 기획자와 예술가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지역 외부 인사 기용에 대해 ‘‘엘리트주의’와 같은 미사여구가 꼭 필요한 것일까.

‘지역문화진흥’이라는 보호막 아래 철저한 점검이 이뤄지지 않은 채 진행되는 사업은 문화재단이 대규모로 양산된 이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환경으로 보여진다. 도시재생과 지역 커뮤니티 활성화를 위해 시행된 벽화 그리기 사업이나, 공공미술 프로젝트들을 통해 드러나 결과물들은 ‘지역’이란 개념이 문화 행정 현장에서 정교하게 쓰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지자체와의 협업과 장소특성적 관점을 녹여내야 하는 공공미술의 경우 1000억원 가량의 예산이 투입되지만, 결과물에 대한 논란은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한 기사는 키스 해링 작품을 ‘표절한’ 공공미술 프로젝트 산하의 벽화 작품을 지적했다. 해당사업은 지자체 주도로 이뤄졌는데,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제대로 된 전문자문위원의 피드백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인 유명작가의 작품을 표절함에도 이를 인지하지 못한 현실은, 재단과 지자체가 추진하는 사업 수행 방법이 최소한의 전문성을 담보하는지 다시 제고할 것을 시사한다. 이전부터 ‘벽화 그리기’ 류의 프로젝트는 그 취지와 완성도 면에서 많은 공격을 받아왔는데, 이러한 벽화 그리기 프로젝트 방식을 그대로 채택했다는 것도 과연 적절한 토의 속에서 이뤄진 것인지 살펴봐야 할 지점이다. 해마다 몇십억 단위의 예산이 투입되는 대다수 지역 자원 활성화 류의 사업 역시도 결과물의 완성도는 객관적으로 설득력을 지니고 있을까. ‘지역’이란 이름으로 예산대비 미진한 결과에 대해 매년 승인해 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성공과 실패로 문화예술 사업을 일괄 평가하는 것은 사업의 질적 수준을 제고하는 것만큼 또 다른 위험성을 내포한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문화예술 행정과 그 사업의 결과가 한 차원 더 발전하기 위해선 냉정한 평가가 필요한 시기이다. 과연 지역문화진흥법에서 가리키고 있는 ‘지역’이란 개념은 예술계에서도 인정하는 전문성과 함께 녹여내는 것이 진정으로 불가능한 것일까. 새로운 인적 네트워크를 확산하고, (특히) 젊은 작가와 기획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기획이었을까.

그러나 현실에선 한 사업의 모든 실무가 적은 인원의 행정가에게 맡겨지고, 더더욱 어려운 지점은 전문지식에 대한 인수인계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사업을 이끌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업을 마친 후에도, 다음 사업을 위한 사업 방향과 프로세스를 제고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간이 주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특정한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진 않다.

다만, 서로가 나아가기 위해 행정은 비평을 끌어안을 필요가 있다. (아니, 어쩌면 비평에게 역할을 분담하는 것이다.) ‘지역’은 아주 미시적인 예시일 뿐이다. (차츰 나아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직 행정의 영역에서 쓰이는 많은 개념은 적절한 제어지점을 찾지 못한 채 서류에서도 현장에서도 부유하고 있다. 비평이 활성화되어도 현실을 바꾸는 길은 또한 멀겠지만, 그럼에도 지금보다는 더 미래를 여는 예술문에 가까워지는 길은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오래된 미래를 새로운 미래로 전환하는 다음 세대를 위한-그리고 행정과 예술을 잇는-민간 거버넌스로 가는 하나의 경로일 것이다.

(원고를 쓰는 내내 생각한다. 10년 후의 나는 이 메모를 남긴 과거의 나를 후회하고 있진 않을까.)

 

필자소개

웨일은 잠시 잠깐 문화행정가로 근무하며,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예술계의 현실에 대해 차츰 눈을 뜨게 되었다. 실제론 예술이론을 전공하고 정책에도 관심이 있던 대학원 수료생으로, 스스로가 행정가인지, 공부를 하는 사람인지, 혹은 예술을 바탕으로 각종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인지 모든 게 헷갈리지만, 나름의 방향성을 잡고자 노력하고 있다. 


1) <키스 해링이 왜 거기서, 1000억 쏟은 공공미술졸속논란>, 일요신문, 2021.04.16. https://m.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398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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