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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숨은참조'/듣는다

[듣는다] 현장인터뷰 <이 여름은 (언제) 끝나는 걸까요?> ✍자림

by 서울청년예술인회의 2022. 9. 14.

Title : 이 여름은 (언제) 끝나는 걸까요?

 

Prolog : 어떤 예감이 실재가 되어 돌아온 것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나에게는 C 만나 이야기 나누게 순간이 그랬는데, C 실제로 만나기 부터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언니로부터재미있는 작업을 하는 사람’, ‘너도 좋아할 같다 말과 함께 그의 이름이 나에게로 왔고, 그의 행보가흥미로운데, 뭐하는 사람이지?’ 라는 감각으로 기억되고 있던 와중에 그의 실재를 마주하게 것이다. 그를 만난 모임에서, 나는 그에게 커피를 사야 하는 미션에 당첨되었다.

무언가 엮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실의 역할을 도맡아 볼까.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이것이 자의인지 타의인지(여기서 '타의' '자의' 제외한 모든 묶음들을 말한다), 만약 섞여 있다면 얼만큼이 자의이고 얼만큼이 타의인지 도통 없다고 생각하면서.

  • Interviewer : 자림 [ 작업자 / 이하, Z]
  • Interviewee : 최추영 [ 소설가 / 이하, C]
  • Interview 일시, 장소 : 2022년 8월 10일 19:00 ~ 21:00, 온라인 줌

 

Z | 요즘 출퇴근하신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을 하시나요?

 

C | 영상 콘텐츠를 AI 프로그램에 넣으면 그 콘텐츠를 컷 단위로 적어주는 기술을 보유한 회사에 다니고 있어요. 매니저처럼 일을 배분하고 기관들과 소통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같아요. 관리직에 가까워요.

요즘은 주로 오후에 출근 해서 2시부터 6 반정도 까지 회사일을 하고요. 후에 '청년 지음'이라는 공간에서 추영으로서의 일을 10시까지 해요. ( 공간이 10시까지라서요.) 그리고는 건너편에 있는 바에서 술을 먹고 집에서 자고 출근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Z | 굉장히 성실하게 살고 계시네요.

 

C | 그렇게 2 정도 지냈더니 한계가 오기 시작했어요. 좋은 점은, 작업만 때는 돈이 벌리지 않는 불안함이 있었는데 요즘은 작업을 하러 너무 즐거워요. 고정 수익이 생긴 삶을 처음으로 경험해보고 있어서 적응 중이에요.

일이 재미는 있어요. 완전히 문학과 붙은 일은 아니라 머리를 그렇게 쓰지 않아도 되면서 동시에 다른 쪽을 알아간다는 느낌도 있고요. 출판사는 문학에 인접한 언어를 사용하는 기관이니까, 애매하게 소진된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런데 여기는 완전히 다른 분야라서, ' 끝내고 이제 본업으로 복귀한다', 이런 분명한 감각 있어요. 그리고 급여를 들은 친구들이 역시 IT업이 다고 말해줘서 붙잡고 있기로 했습니다. (웃음)

제가 회사에서 알바로 3년을 했어요. 그때 했던 일이 AI 딥러닝 시키는 작업이었는데 일에는 글이 필요해요. 예를 들면 공항의 안내 로봇들, 걔네가 수천 개의 대화를 수집해야 대화할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문장을 만들어주는 일이 필요한데 문장에 태깅이 되어야 해서 어절을 다양하게 나누어야 해요. 말투도 그렇고요. 그런 문장을 구성해 주는 일을 하다가 올해 정식으로 일을 하게 거죠.

사실 이번에 서교 링크 지원사업에 작업도 일에서 시작된 것도 있었어요. AI 결국 인간에 의해서 학습된 거라고 한다면, 인간과 AI 기억 차이는 얼마나 다를까라는 생각에서요. 지금 그래도 작업을 시작해야 해서 익수케(작가; 장소통역사라는 팀명으로 함께 활동하고 있다) 계속 공부를 하고 있는데 제가 AI 프로세스를 이해하고 있어서 조금 수월해요.

 

Z | 그 작업이 AI 이미지와 관련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기억과 연결될 수도 있겠군요.

 

C | 저희가 베이스로 삼는 책이 『오래된 기억들의 방』이에요.

뇌과학자가 책인데, 어떻게 인간이 기억을 인지하고 그것이 인간을 구성하는지, 특히 정신병이랑 연결되는 부분이 많았어요. 혹시 『누런 벽지』라는 소설 아시나요? 어떤 여자가 산후 우울증에 걸렸는데, 머물고 있는 저택 벽지에서 계속 냄새가 나고 이상한 무늬가 그어진다고 생각하게 되는 소설이에요. 책은 이제까지 여성이 말했던 히스테릭한 감정들을 그저 질병으로 취급해서 치료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해석이 많았지, 여성이 느꼈던 감각에 대해 해석하는 경우는 적다고 말하는데, 이런 방식으로 서술하는 부분이 재미있었어요. 어떻게 보면 착란이잖아요. 약간 스산한 느낌도 들고요. 제가 공포로 삼는 것들은 이런 뭔가 이상한 감각인 같아요. '여기 있으면 되는 것들인데, 이상하게 여기에 있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들이요.

사람이 어떤 기억을 저장하기 위해서는 공간과 사건과 인물이 필요하대요. 가지 요소 하나라도 없을 사람이 느끼는 환각이 수도 있고 그래서 장기 기억으로 없는데, 대개 소설가들이 부유하는 인물을 만들 이런 장치를 사용한다는 것을 책에서는 문학이 아니라 뇌과학으로 설명을 하는 거예요. 베케트의 인물들이 그렇잖아요. 베케트에게는 공간이 없는 경우도 있고 혹은 사건이 없는 경우도 있고 혹은 그냥 목소리로써만 인물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그런 소설에서 공포감을 느끼고 이게 사실은 기억에 관련된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저는 잊어버릴까 글을 쓰는 사람이라 어떤 것들이 장기 기억으로 갈까, 그리고 그건 몸의 장기 기억으로 남아서 마치 신체 기관의 일부인 것처럼 작동을 하게 될까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우리가 모든 기억을 기억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기억 자체에 장기 기억이 있는 기억의 필터가 있어서, 필터랑 신경 자극이 되는 애들만 내가 평생 가져가는 기억이 된다고 해요. 그래서 저는, 기억이라는 구조화된 것이 아닐까, 기억을 그대로 학습하는 AI 있다면 걔랑 나랑은 어떤 차이점이 있고 어떤 것들을 기억으로 저장하려고 할까 라는 궁금증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같아요. 영화 애프터 양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내가 경험했던 것들이 모두 나의 것이었으면 좋겠다." 이게 AI 말하는 대사라서 의미심장한 있지만 저도 똑같이 생각했거든요. 이게 소설가로서의 자세라고 생각해요.

 

Z | 저는 감각을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두려운 같아요. 『누런 벽지』에서처럼 나만이 가지는 기묘한 감각들이 누구에게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걸 혼자 간직했을 마치 고립된 것처럼 느껴져요. 저는 차라리 그건 괜찮은데 그게 곡해될 때가 두려워요. 내가 가진 감각이 뭔지 표현함으로써 원치 않는 긴장감을 풀고 싶은데 그럴 없을 제가 가진 한계를 느끼게 되고 두려움을 느끼는 같아요.

 

C | 저도 비슷한 같아요. 왜냐하면, 제가 최근에 연인을 만났어요.

그럴 있잖아요? 자꾸 그런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걸까라는 생각이 . 그게 사람이랑 헤어졌을 때의 시기 같았어요.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곤란한 느낌을 받을 , 나는 결국 내가 괜찮은 사람이고 싶어서 빨리 관계를 정리해버리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하면서 계속 자리를 빙글빙글 돌았거든요. 그래서 '내게서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을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 하고 물어보고 싶어서 만났던 같아요.

' 말을 이해했다' 듣는 순간, 다음으로 나아갈 있겠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 시간을 가질 있었던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것 역시 정신적 자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말을 던지고 다음으로 나아가 다음 말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저는 뭔가 풀리지 않은 말의 구덩이에 갇혀서 계속 말에 대해서 곱씹는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한텐 이상하게 보이더라도 말에 대한 토로나 소회를 나눠야 되거든요.

소설 때도 그래요. ' 사람이 말을 곡해했으면 어떡하지?', 한편으로는 '곡해하면 어때' 하다가도 우리가 좋았던 기억마저도 순간 때문에 날아 갈까 끊임없이 돌아가서 '사실은 이러이러해서 내가 이런 말을 거야' 구구절절하게 말할 수밖에 없게 돼요. 내가 경험한 것들이 온전히 것이기 위해서는 같이 경험했던 사람도 조금은 비슷한 마음을 지녀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에게 언어로 강요한다고 느낄 때도 있어요.

그리고 미워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끝나는 힘들었더라도 전체 기억을 나쁜 기억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까, 사람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될까 하는 생각 끝에, 굉장히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모습을 자주 봤던 같아요.

 

Z |  미워하는 잘하고 싶어요. 미워하고 싶은데 그걸 하니까 오히려 이상해지는 상황들이 있었고요.

 

C | 저는 제 에너지 효율을 위해서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그건 오로지 저를 위해서예요. 사람이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그것과는 별개로 나에게 그것이 미운 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죠. 미워하면 저는 그걸 오래 곱씹거든요. '걔가 나한테 그랬을까'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미워하지 않게 되면 이유는 없지만 '나쁜 마음에서 그런 아니었겠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악의라는 이유가 없는 감정임을 아는데도 악의를 다시 겪고 싶지 않으니까 이유를 찾게 되는 같아요.

어떻게 보면 이해에 대한 강박 때문인 같기도 해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했을 너무 외로웠고 그때마다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될지 모르겠으니까, 언제나 이해되는 상황 속에서 살고 싶기 때문에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거죠. 그러면 다리 뻗고 있게 되는데 타인의 의도에 대한 생각을 하면 사람이 마음 속에 너무 오래 남는 같아서 미운 사람을 복기할 때마다 오히려 죄를 저한테서 찾는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그냥 네가 선해서 그런다고 하는데 저는 제가 절대 선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 선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함께 웃음) 그리고 과정도 글을 쓰기 위한 어떤 씨앗으로 만들고자 내가 끝까지 가보는 거고요. 선한 사람들은 그냥 선한 채로 살지 그것을 토로하거나 지겹도록 붙잡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이기적이기 때문에, 마음의 빚이 최대한 없는 사람이고 싶어서 미워하는 감정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같아요. 그리고 다음을 기약할 없는 것들도 있으니까요. 전 연인과 대화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 '내 여름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이 입추였거든요. 그런 예감이 들 때가 있잖아요. 이건 평생 기억에 남겠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예감하게 되는 순간들이요. 그래서 저는 다정함의 힘을 조금 더 믿는 편이에요.

 

Z | 죄의식에 대해서도 얘기해보고 싶어요.

저는 존재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거든요. 내가 존재하는 누구한테도 좋은 아닌가 생각하면 부끄럽고 그래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도 생기는 같아요. 그게 책임감으로서 발현되는 것과 죄책감으로 나타나는 것이 동전의 양면처럼 왔다 갔다 한다고 느껴요.

 

C | 저는 스스로 '내가 말을 잘못하고 있는 아닌가?' 혹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아닐까?'라는 생각을 때가 많아요.

그리고 그건 도의적인 차원에서 '내가 잘못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보다는 '나는 나쁜 사람이고 싶지 않아' 커서인 같아요. 게다가 자기 의심도 많은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커서 그런 같기도 하고요. 열심히 살고, 쉬는 시간 없이 움직이는 이유는 딱히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라기 보다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고 싶은 욕망 때문인 같아요. 요즘은 나에게 조금은 자비롭고 싶어서 이런 생각도 해요. 곁에 좋은 사람들이 있고, 사람들 옆에 나도 좋은 사람으로 있고 싶어서 잣대 잣대에 맞추려다 보니 불안도가 끊임없이 높아지게 아닐까? 하고요.

 

Z | 제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을 나라는 고정되어 있는 어떤 값이 아니라 가변성 기호로서 존재한다는 느낌도 들어요. 그래서 반응도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고요. 어떤 기호가 될 것인지 내가 결정할 수 있나? 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은 좀 회의적이예요. 일단 노력은 해볼 수 있겠지만, 나에게 이미 주어진 어떤 요소들, 내가 잘 활용할 수 있는 원소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C | 상대방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상처받았던 것 처럼, 내가 어떤 말을 해서 누군가를 상처 주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짙게 하는 밤에, 누구도 답을 내려줄 없잖아요.

최대한 그런 밤을 지니지 않으려고,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죄의식을 떨쳐 고해하려고 하는 거죠. 질문하고 글을 쓰고 하는 저의 일종의 고해 행위에요. '제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다' 말하기 위해서는 죄에 대해서 곱씹고 문장으로 정리해야 되는데 그게 저한테는 공포 소설 같기도 해요. 하나의 고해 성사를 이해 가능한 범위로 끌어내는 . 그런데 저는 제가 착한 사람이어서 이런 소설을 쓰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고 모든 사람에게 선한 사람이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그저 내가 잘못했을까 매일 우는 느낌에 가까워요. 다른 사람을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들을 때마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는 것도, 그게 자동적으로 되는 어떡하나 싶죠.

 

Z | 작가님이 공포라는 감각으로 작업을 하게 계기는 이런 맥락들이 있어서였던 건가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나요? 계속해서 공포를 주제로 가져가시는 아닌 걸로 알아요.

 

C | 넓은 범위에서 공포는 계속 다룰 같아요.

제게는 언제나 이해할 없음, 불가해함이 주제인 같고 그것과 가장 가까운 단어가 공포, 두려움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타인을 이해할 없음에 시선이 갔다면 요즘은 나를 이해할 없음에 시선이 가고 있는 같고요. 나는 대체 뭘까? 나는 대체 이런 생각을 떨칠 없을까라는...

공포에 대한 편견이 없어졌을 공포를 쓰기 시작했던 같기도 해요. 옛날에는 귀신 얘기를 써야 공포라고 생각 했는데 베케트나 제발트,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책들에서 일종의 무서움을 느꼈고 이런 것도 공포라고 호명할 있겠구나 생각하는 순간부터 사실 공포의 영역이 넓다는 깨달았어요. 저는 소설에서 공포스러운 순간을 많이 찾는 사람이더라고요. 만약 내가 좋아하는 감각을 밀집시켜 놓는 작업을 한다면 감각은 두려움에 가깝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fear factor라는, 단적으로 말하면 벌레를 먹으면 천만 원을 받는 그런 가학적인 프로그램의 우승자 시점에서 소설을 썼어요. 그게 공포 소설이었죠. 그때 집에 알코올 중독자 아저씨가 살고 있었는데 아침에 문을 열고 나가면 아저씨가 집에 들어가고 앞에 앉아 있을 때가 있었어요. 냄새가 진동하는 복도에서 사람의 눈이 되게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동시에 슬픔도 느꼈던 사람은 저렇게까지 술을 먹을까, 그때는 제가 고등학생이었으니 이해할 없는 범위에 계셨죠. 내가 영원히 없는 영역에 있기 때문에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고 표현하거나 아니면 뭔가의 중독자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어요. 동시에 저는 제가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이라 사람들에게 끌렸던 같기도 해요. 왜냐면 밝은 사람들 앞에서 ' 사실 죽고 싶다' 말했을 , 무거운 의미의 죽고 싶다가 아닐 있는데 너무 깊게 받아들여지면 내가 하는 생각이 잘못됐나 싶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 방식으로 생각해 보니 사실 사람들은 두려움이 많은 사람인 아닐까 싶었어요. 생각은 어떤 공포스러운 상황을 이겨낸 사람이 사실은 가장 겁이 많은 사람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그게 제 첫 공포 소설의 시작이 됐죠.

 

Z | 좋아하는 것보다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 나눌 깊은 얘기를 나눈다는 느낌이 들어요.

 

C | 가까워진다는 느낌.

그리고 내가 두려워하는 것을 사람도 두려워한다고 느꼈을 가지는 안정감도 있어요.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무서운 같이 느껴서 안정감을 느낀다는 자체가 되게 이상한 느낌을 때도 있죠.

 

Z | 작가님의 태도라고 할까요. 캐릭터로 정의해 보자면 푸릇푸릇하고 청년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공포라는 감정도 왠지 청년스럽고요.

 

C | 제가 아직 고정된 값이 없고 끊임없이 뭔가를 수정해 나갈 계획이 있다는 점에서 정신적으로 청년이라고 느껴요.

그리고 사회도 아직 저를 청년이라고 여길 같아요. 사회가 규정해 놓은 나이의 범위 안에 있으니까요. 저는 청년이 자신의 열의와 열정으로 뭔가를 태워 소거할 있는 사람, 열정이 ' 있어!' 보다는 '끝까지 가보지 ' 이런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것이 소진되더라도 아까워하지 않는 마음. 뭔가 다시 도모할 있을 같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요. '아직 어리니까 그럴 있다'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입추에 ' 20 여름이 끝났다' 생각했을 약간 슬펐어요. 제 젊음이 끝나가고 있는 것 같아서요.

저는 프랑스 영화에 나오는 웃긴 할머니가 되고 싶거든요. 세상의 모든 풍파를 겪어 , '일단 해봐 할머니' 되고 싶은 마음이요. ' 이러 저러해서 애를 만나러 가려고요' 어떤 할머니는 '하지 , 그런 무의미해. 너만 상처 받아' 하는 할머니가 있다면 저는 '일단 해봐. , 데려다 ?' 이런 할머니가 되고 싶은 거죠.

영화 라붐에서 운명적으로 여자애와 남자애가 만났다가 남자애가 다른 지역으로 가서 헤어지는 신이 있어요. 그런데 여자애 할머니가 걔를 엄마 아빠 몰래 차에 태워서 국경 쯤에 데려다 줘요. 장면을 보면서 '네가 후회 없게 하고 싶은 해봐. 위험하지만 않으면 . 내가 데리러 .' 이렇게 말하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같아요.

 

Z | 그렇게 살아 할머니여야 도와줄 수도 있을 같아요.

 

C | 젊지 않을 , 멋있다고 생각되는 분들도 많잖아요.

자기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체, 자신의 단단함으로 어떤 안정감을 주는 작가들도 있다고 생각해요. '나도 살다 보면 저런 것들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오겠지'라는 확신을 주는 작가들이 있기 때문에 젊다는 것을 그저 긍정적으로만 느끼지 않게 돼요. 내가 늙어가고 있기 때문일까 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세월이 있는 힘이 분명 있다고 생각해요. 젊다는 어떤 것을 빨리 단정하지 않는 감각이라면 세월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편견이 아니라 '살면서 이런 것들을 겪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생각해. 때문에 나는 세계를 이렇게 관조하고 있어.' 라고 있을 같아서예요. 세상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사람이 되면, 그런 정도의 지성이 되는 것은 오히려 어떤 사람들한테 고민하며 사는 것이 유의미함을 일깨울 있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은 쉽게 얻어 지는게 아니라는 느끼게 해주는 어른들이 있거든요.

 

Z | 예술인이란 어떤 걸까요. 저는 행정적인 분류대로라면 예술인이 아니에요. 정형화된 결과물이나 기록된 경력이 없기 때문이죠. 내가 너무 나의 이야기에 집착해서 그것을 통용되는 방식으로 번역해 내지 못하는 걸까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작업을 이어가면서 이것은 무엇으로 분류될까,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도 들어요.

 

C | 들으면서 가지 생각을 했어요. 저는 이상하게도 문학 쪽으로는 예술인 증명을 없고 시각 예술가로는 가능해요.

투고한 문예지가 이상의 발간이력이 있어야 한다는 기준이 있어요. 글이 실린 문예지는 신생이에요. 때문에 기준에 따르면 전시를 2회차 했기 때문에 미술 작가가 되는 거예요. 최근에 가끔 만나는 분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테일러 숍을 하는 분인데 저는 그분도 예술가라고 생각하거든요. 인체를 연구하고, 패션을 큐레이팅하면서 자신의 감각을 드러내니까요. 그분이 자신은 테일러 숍을 하게 되면 스스로 무의미한 사람이 같은데 너는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소설가로서 남지 않냐고, 그게 부럽다고요. 그런데 저는 만약 내가 소설을 이상 쓰지 않는다면, 소설가로 남을 있나 라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예술가는 현재 진행형이지 완료된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어쨌든 내가 작업은 몸과 머리속에 남아 있으니까, 그리고 결국 말하고 싶은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말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돌아간다고 생각해서 예술가는 언제나 상태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같아요. 오늘은 예술가지만 내일은 예술가가 아닐 수도 있고요.

저는 2시부터 6시까지는 근무를 하고 있으니까 예술가가 아니지만 퇴근하는 순간 예술가가 되고, 그래서 제가 회사에서는 수영이라고 불리니까 '수영이 퇴근하고 추영이 출근한다' 이런 식으로 익수케한테 얘기하거든요. 약간 운동감 같기도 해요. 하다가 갑자기 하면 힘든 것처럼, 꾸준히 계속 해야 준비 운동 없이도 있는 그런 운동감이요. 어렸을 수영을 배워 놓으면 자세가 좋지 않더라도 어쨌든 헤엄은   있는 것처럼 예술이라는 상태를 경험한 사람들은 영원히 기운에서 벗어날 없는 바운더리 안에서 살게 되는 같아요. 그래서 스스로는 예술가라고 생각하지만 사회는 저를 예술가라고 생각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는 탈부착식 같아요.

 

Z | 작가님을 시각 예술가로만 증빙할 있다는 웃프네요.

 

C | 지금의 시스템 안에서는 시각 예술가로 분리될 가능성이 가장 높죠.

이상하지 않아요? 전시를 소설로 배치했는데 그것이 전시라는 포맷으로 오픈 되었다는 이유로 시각 예술가가 된다는 . 그게 예술가를 보호하기 위함이고 사회에 자리 잡게 하기 위해서 만든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회에서 계속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서 존재하게 만드는 같아요.

 

Z | 규정된 방식으로 예술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계속 미끄러지는 감각을 느끼게 되죠. 제가 인터뷰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C | 제가 생각하는 청년 예술가는 무엇을 보든 새롭다고 여기는 사람일 같아요.

어떤 보더라도 단정적으로 '이런 것에 가까운 예술이다'라고 판단 내리지 않고, ' 사람만이 있는 무엇이다' 라고 생각해서 사람이 하고 싶은 무엇인지지 계속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요. 아까 청년 예술가를 너무 긍정적으로 신화 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이런 부분을 지니고 있다면 청년 예술가는 너무 긍정적인 상태일 같아요.

 

Z | '장소통역사'라는 명을 작가님의 언어로 소개해 주신다면요?

 

C | 아라크네가 신들의 문란함을 양탄자로 만들어서 거미가 되잖아요.

저는 예술가들은 일종의 아라크네의 후손적인 면모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베를 짜는 행위가 씨실과 날실이 겹쳐지는 무수한 점들이 어떤 이미지를 형성해 나간다는 부분에서  예술적이라고 생각 하거든요. 실뜨기 , 무언가 형상을 만들어내려면 절대 혼자서 없고 다른 사람의 손가락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나열해 놓으면 거기에 코멘트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덧붙이는 방식으로 동료 작가들과 실뜨기 워크숍을 했었어요. 장소통역사로서 익수케 작가와 작업 때도 비슷해요. 서로가 번갈아 씨실 혹은 날실이 되기도 하거든요.

'장소통역사'라는 이름은 서울문화재단에 서류를 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긴 한데(웃음), 처음엔 저희 작업이 VR 소설 공간을 재탄생 시킨다는 형식적인 차원의 접근이었어요. 그러다 저도 불안의 장소를 만드는 스타일이고 VR 가상의 공간을 만드는 거니까 서로 다른 장르로 자기가 만들고 싶은 장소를 통역한다고 생각해서 '장소통역사'라고 했던 거예요. 작업이 진행 되면서 오히려 문학이라는 장소와 시각예술이라는 장소를 예술가가 서로 통역한다는 의미로 나아가기 시작했어요.

 

Z | 요즘 준비하고 계신 작업들에 대한 이야기로 인터뷰를 마무리할 게요.

 

C | 장소통역사로는 개의 작업을 준비하고 있어요.

하나는 익수케 작가를 중심으로 백제 고대 언어와 관련된 작업이고요. 하나는 초반에 이야기했던 AI 관련된, 우리는 어떤 기억으로 직조된 인간일까를 주제로 하는 작업도 리서치 중이에요. 다른 것은 용산 기지 자료를 모아서 사운드 아티스트 분과 함께 용산을 산책하는 느낌의 작업을 하려고 해요. 용산기지가 기묘한 공간이잖아요. 미군들이 한국에 적응할 있도록 미국을 그대로 옮겨온 건데 사실 진짜 미국이라고 수도 없고 미국이 아니라고 수도 없고요. 이와 유사한 지역이 세계에 많다고 생각해요. 고향도 그렇죠. 고향은 나의 기억으로 직조된 어떤 대상이지 진짜 공간으로서 실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웹진 비유에서 연재되고 있는 아픔 단위 프로젝트인데 제가 코로나 걸렸을 매일 일기를 썼었거든요, 아픔이 사라질까 봐요. 그래서 '아픔은 기록이 가능한가'라는 주제로 썼던 일기를 기반으로 무용하는 친구와 협업하고 있어요. 저희가 낭독 작업할 무용을 해줬던 친구가 있는데요. 친구가 보청기가 고장 나서 갑자기 온몸에 소리가 쏟아졌을 구역질이 났던 일에 대한 얘기를 언젠가 표현해 보고 싶다 했어요. 장애 아픔과 질병 아픔이라는 것이 서로 대화할 있고 기록할 있는 것이라면 기록을 활자나 낭독 혹은 몸짓의 형태로 구분하여 뭔가를 시도해 있지 않을까 상상하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요. 확실히 고정 수익이 생기니까 작업할 조금 몰입도가 생겼다고 해야 될까요. 다른 방식의 투쟁적인 느낌이 들더라고요. 예전에는 지원사업을 따내야 작업 있다, 였다면 이제는 조금 내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작업을 있겠다는 모종의 여유가 생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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