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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숨은참조'/말한다

[말한다] 미래를 여는 예술문 ③ 나의 일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by 서울청년예술인회의 2021. 7. 28.

 

나의 일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의 침묵을 끝내십시오.¹⁾

 

강정아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노동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무형의 상상력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만들지만, 그 이미지를 만드는 실현자는 아니다. 이미지를 만들기까지 전반의 과정을 기획하고 그것을 만들어갈 사람들을 연결하고 동력을 주는 일을 하고 있지만, 이것을 ‘일Work’라고 할 수 있을까? 특정한 시간과 장소 안에서 온종일 무엇을 하고 있고 그 ‘무엇’은 어떤 상품과 생산을 창출하고 그에 따른 대가를 받아야 한다면, 나의 일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특정한 노동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고 출퇴근이 고정적이지 않은 상황, 정확히 말하면 이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유지하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 일을 수행함으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일이 생계수단이다.

특정 노동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고 고정적인 장소에 놓이지 않기에, 어떤 일을 수행한다고 말하기, 설명하기 어렵다. 나는 여전히 나의 가족에게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생산하고 만드는 이가 아니기에, 무형의 것을 그들에게 상상해보라고 요구하기에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일이 노동이 아니고 직업이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왔다. 하지만 이 일에 대해 임금 노동의 방식, 근로자, 노동의 시간과 강도에 따라 결정되기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적극적 상태가 비워져 버리고, 비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나는 나 자신의 일을 호명하는 말에 적극적이기로 한다.

나는 어떤 생산을 만들어내는 창작자이기보다 창작자가 시각적 이미지를 구현하는 일을 매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단순히 그들을 조력하기보다 하나의 주제와 키워드, 이야기를 만들고 엮는 기획을 한다. 일을 시작하기 위해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책상에 앉아 글을 쓰거나 사람을 만나서 미팅을 한다기보다 오히려 혼자 산책을 가거나 음악을 듣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날의 날씨와 온도에 따라 플레이를 하고 그 음악을 들으면서 멍하니 정념에 사로잡힌다. 이때, 발생하는 기분과 감정은 격양되고 마음이 고조되는데 또 어떤 때는 한없이 가라앉은 침잠의 방으로 가두어버린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위해 이러한 마음의 속도에 따라 상태를 점검하는데, 이 일은 긴 장거리를 앞둔 자동차를 점검하는 일과도 같다고 여겨진다. 나의 일은 자신의 마음을 돌보는 일부터 시작한다. 무엇을 생산하기 위한 목표를 생산하기보다 상태를 점검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꽤 오랫동안 이 패턴은 내가 어떤 상황과 상태에 놓여있을 때 ‘나는 행복한가’라는 추상을 ‘나는 어떤 상황일 때 마음이 평안한가’라고 구체적으로 자신이 위치한 상황을 생각하는 습관을 만들어준다. 비노동의 상태일 때, 특정한 장소에 위치하지 않은, 일의 생산을 위한 일이 아닐 때에도 최소한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일은 어떠한 교환가치와 상품성을 발휘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 상태는 상상/허구의 세계를 구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고 그 허구의 세계가 가치교환의 값어치를 발생시킨다. 나는 이 일로 생계를 꾸려 나간다.

그러므로, 나는 내 일을 호명하는 일에 대해 주저하지 않고 싶다. 시간과 장소에 얽매이기보다 자신의 사유를 좇아 그것을 그리는 일에 주저하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여전히 비노동의 상태는 사회적인 안정적 상태로 놓이는 수 없는 불안정성을 기반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땅, 모두에게 그 말을 감히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사유를 좇아가는 일이 업이 되는 삶이 되어보라고 권하고 요청할 수 있을까? 삶의 터전에 무기 없이 죽어 나간 수많은 죽음 앞에서 말이다. 8시간 이상의 노동 근로 앞에서 힘없이 추락한 이의 얼굴을 기억한다면 말이다. 그 시간을 보장하고 있는 자본이 어느 것 하나 되돌릴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면 말이다. 특정한 노동환경 상태에 이탈되면 어느 것 하나 보장되지 못하는 낭떠러지, 특정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을 때 이탈하기란 달리는 기차의 문을 열고 뛰쳐나가는 일과 같지 않을까? 사람이 죽지 않고 사람이 생산을 위한 도구가 아닌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 ‘무엇’을 어떻게 함께 말할 수 있을까? 구조의 바깥을 모색하는 것은 구조의 바깥이 있다는 걸 믿기에 방법을 모색할 것이다. 하지만 한 번도 보지도 듣지도 경험하지도 않은 세계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구조의 바깥보다 구조 안팎의 앎이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들을 집어삼키는 것”에 맞서기 위해서는 착취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자신들이 착취와는 다른 것을 향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는 자기 인식과 자기 확신을 상기하며, 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은 무엇일까 질문을 하게 한다.

최근 번역된『미술노동자』에서 “미술노동자라는 표현이 일관성을 갖기 어려운(심지어 모순된) 이유는 미술이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노동의 ‘바깥’이나 타자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상적 노동과는 달리 생산적이지도 평등하지도 않은 미술에서 노동은 여가 시간에 추구하는 자기표현이자 혹은 자본주의 막다른 골목에서 제시되는 유토피아적 대안으로 정의됨²⁾을 밝혔다. 이 책에서 예술의 일과, 재현의 시스템이나 의미화의 형식, 어떤 방식으로 공적 영역에 개입하고 경제와 자본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건네면서 미술노동자라는 용어 역시 노동에 미술이 연결되고 있고 노동이 형성하는 계급으로부터 미술인들을 멀어지게 한다는 점에서 다루기 힘든 갈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자기표현, 노동하지 않은 시간은 여가 시간과 노동하는 시간은 생산의 시간으로 표기함으로, 자기표현은 여가-시간적 여유가 있는 상태로 배치시킨다. 이것은 생산하지 않은 자는 잉여노동으로 귀결시키기 쉽다. 예술노동이 발산하는 잉여적 가치는 자본주의 내의 모순을 드러낼 수 있으며, 비물질적인 정동적인 노동으로 관계성을 나타날 수 있는 상상력을 제공하기도 한다. 특정한 노동조건(시간, 장소, 공간)에 위치하지 않을 때, 발생한 예술노동은 세 가지의 조건에 산정하지 않으며, 때론 어떤 물질을 생산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동하지 않은 시간 외에 작동하는 것이 아닌, 이 시간을 노동하지 않음으로 비물질적인 것을 생산하는 일로 전환했을 때 새로운 가치가 생산되고 그것이 다시 자본으로 연결되었을 때 노동의 조건은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문화예술계 상황은 더욱 위태로워졌고 임대료 상승과 하락으로 자영업자들은 문을 닫게 되며, 생계의 위협으로도 다가온다. 또한, 거리두기의 지침 앞에 문화와 예술의 기능성은 무력감을 느끼고 있지만, 기존의 우리가 알았던 체계와 질서의 변화는 새로움을 시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비대면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재택근무가 활발히 되었고 사교모임으로 저녁 시간이 꽉 찬 여가가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연결되는 일 또한 많아졌다. 함께하는 일이 아닌, 혼자 수행으로 동반하는 일들이 증가하면서 시간의 단위가 다르게 사용되는 경험을 우리 모두 맞이하고 있다.

이 변화는 8시간 노동을 하지 않으면 능률과 생산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기존의 체계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될 수 있고, 국가재난지원금을 통한 기본소득에 대한 실현 가능성의 목소리가 생성되고 있다. 임금이 지불되는 임노동의 방식에 균열이 생기고, 기존의 ‘노동’으로 인한 상품성은 비물질적이고 가상적인 허구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도 했다. 노동과 관계 맺어온 자본 또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알린다. 하지만, 이 ‘새로움’이란 것이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그것이 긍정일지 부정일지 그 미래를 재단하기보다 오히려, 더 이상 노동력이 상품성으로 귀결하지 않는, 시간과 장소와 공간으로 노동하는 ‘몸’으로 선점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다.

일을 시작하기 위해 마음의 속도를 점검하는, 자신의 일이 자신의 마음을 돌보는 일부터 시작하고자 하는 필자의 노력이 자기표현-여가의 시간으로 배치되는 것이 아닌, 노동하는 몸으로 전환하지 않은, 생산하지 않은 비생산과 쓸모없는 것이 가진 무한한 힘을 상상할 여지로 개발되길 바란다. 이것이 예술노동이 노동창조로 자기표현과 좋아하는 일이 노동하는 것과 명백하게 연결되길 바라며, 노동의 유의어를 찾기를 바라본다.

필자는 최근 읽었던 구절의 문장을 떠오르며 이것을 예술 노동이라 부르고자 한다.

 

떠돌이 삶과 공기처럼 가벼운 직업이라는 천국의 유혹은 당연히 슬픈 종말을 맞아야만 한다. 존재하지 않는 숲, 읽을 수 없는 문자, 모델이 없는 이미지를 너에게 만들어줄게. 언제나 새처럼 허공에 떠 있어. 태양에 취하지. 수다스럽고, 텅 빈 아파트의 사방팔방에서 노래해. 호화 저택에서 다락방으로, 또 시골에서 도시로 오가고. 내일 어디에서 일하게 될지를 오늘은 몰라. 언제나 새로운 동료들과 새 인물들이 있어. 도처에서 신참들이 오지. 성밖지대 어디서나 한상 차려주고. 층마다 다 아는 이들. 그러니 언제나 좋은 하루. 떠돌이 삶과 공기처럼 가벼운 직업이라는 천국의 유혹은 당연히 슬픈 종말을 맞아야만 한다.³⁾

 

“우리는 이 혁명을 지지해야 한다. 우리가 속한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변화의 초석을 닦아야 한다.

이 행동은 미술이 자본주의로부터 완전한 결별함을 뜻한다._어느 미술노동자”⁴⁾

 

필자소개

강정아는 손과얼굴 콜렉티브, 히스테리안 독립출판사를 운영하며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구별 짓기에 관한 간극을 채집하고 기록과 연구를 바탕으로 출판,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1) 급진적 실천을 향해, “당신의 침묵을 끝내십시오.” 이 문구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군의 개입을 폭로하는 광고의 일부로 19654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에 실렸다. 미국 예술가들이 조직한 첫 번째 반전운동으로 기록됐다.

2) 줄리아 브라이언 미술노동자: 급진적 실천과 딜레마,열화당, 2021,155.

3) 자크 랑시에르,프롤레타리아의 밤,문학동네, 2021, 21.

4) 줄리아 브라리언,미술노동자: 급진적 실천과 딜레마,열화당, 2021, 들어가며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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