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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숨은참조'/말한다

[말한다] 칼럼|예술을 노동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을 때 ✍ 안준형

by 서울청년예술인회의 2020. 8. 14.



예술을 노동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을 때


✍ 안준형




예술과는 그다지 깊은 연을 맺지 않은 이유로 흔히 비전공자라고 불리곤 하는 친구들에게 내가 예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이러한 곤란은 순수 예술이라고 불리는 자리 언저리를 웃돌고 있는 이들이라면 몇 번쯤 경험해봤을 일이다. 그리고 만약 가능한 한 탁월하게 설명을 해낸다고 하더라도 친구들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을 것이다. 이를 섣불리 어려운 순수 예술에 대한 무지 정도로 일축하고 합리화할 수는 없다. 이는 지루한 도덕적 판단을 제쳐두고서라도 최소한 사실조차도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친구들은 나를 제외하더라도 어떤 공통된 일에 종사하고 있지도 않다. 누구는 반도체 공장에서 생산직 노동자로 지내고 있으며, 누구는 교사가 되기 위해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고 또 누군가는 요식업 사업을 하고 있는 등등 녀석들은 나 이외에도 서로간 종사하는 일들에 관해서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도 오직 예술을 한다는 것에만큼은 서로의 업종에 관한 무지함을 제쳐두고서라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어떤 간극이 있는 듯싶다.

예술과 노동의 관계를 생각한다는 건 위와 같은 간극을 의식하는 일이지 않을 수 없다. 여전히 예술만큼은 사회의 다른 어떤 일들보다도 유별난 듯 여겨진다. 2014년을 전후로 미술계에서는 예술과 노동의 관계에 관한 논의가 열띠게 벌어졌었다. 오늘날까지도 눈에 보이는 대다수의 예술가가 처해있는 열악한 현실과 예술계 제도 내에 만연한 불공정 계약 문제 등으로부터 터져나온 일련의 논의들은 이를 특수하게 낙후된 산업 부문의 개선되어야 할 문제로 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이 논의들은 예술과 노동의 관계라는 조금은 거창해 보이는 철학적 논쟁을 동반했다.¹⁾ 이는 분명 예술과 사회 간의 쉬이 설명하기 어려운 간극을 의식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어서 누군가는 바로 그러한 간극에서 예술가들의 비참한 삶이 부분적으로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간극은 사라져야 하며 예술은 노동으로 충분히 설명되어야 한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러한 간극이 이미 없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며, 바로 그러한 연유로 오히려 예술이 더욱더 비루해졌다고 보았다. 심미화된 자본주의로서의 신자유주의가 노동에 부과한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미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사실 노동과 예술의 간극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그로부터 얻어낸 최상의 결과물은 노동 시간의 불분명한 연장과 새로운 방식의 착취를 동반했지만 말이다. 오늘날 노동자들은 정해진 노동 시간 안에서 생산성이나 노동 강도, 숙련도와 같은 요구 보다도 열정과 창의성과 같은 심미적 가치를 요구받는다. 또한 정해진 노동 시간뿐만이 아닌 일상생활 전반에서까지 자기 자신을 탁월한 예술노동자로서 계발할 것을 종용받는다. 물론 일찍이 예술은 충만한 창의력과 열정을 바탕으로 정해진 노동 시간, 숙련도와 같은 고루한 외부로부터의 착취와 규율의 논리와는 안녕했다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제 예술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서 그러한 규율을 요구한다.예술노동 논쟁 안에서 어떤 작가는 이제 예술이 작품을 생산하는 과정이 여타의 알바노동보다 신성하다는 착각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고 강변했다. 이건 솔직히 알바노동자들 말도 들어 봐야 한다. 실제 우리의 착각은 정반대에 가깝지 않을까? 예술 생산을 충분히 노동의 관계 안에서 설명할 수 있을 때, 오히려 예술이 알바노동과 맞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더 진짜 착각에 가깝지는 않을까? 오늘날 대다수의 예술 작품은 도대체 가치를 생산하긴 하는 건지부터 의심스럽다. 전시가 끝나면 대다수의 작품들은 마땅한 행방을 기약하지도 못한 채 어디 창고에 처박히거나, 심지어는 보관할 공간도 마련하지 못한 이유로 그냥 폐기되어버리곤 한다. 그처럼 예술 생산품이 도저히 무가치해 보이는 까닭에 예술가들이 처하는 빈곤과 비참함은 현실이 되어버린다.

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자면 비전공자 친구들이 예술에 관해서 느끼는 간극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는 어쩌면 간극 조차도 아니었는지 모른다. 이미 노동과 예술이 거리낌 없이 친교를 맺는 세계에서 친구들은 이미 노동자임과 동시에 예술가로서 일하며, 삶을 경험해왔다. 그렇다면 친구들이 순수 예술을 함에 대해 그다지 우호적이지 못한 것은 흔히 합리화되는 것처럼 예술에 대한 무지이기는커녕 탁월한 예술적 판단의 일환으로 여겨져야 한다. 그들의 판단을 미적 판단으로 존중할 수 있어야 하며, 순수 예술의 자리는 노동의 가치와 상품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단순히 미적 가치도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냉대받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이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서 아무리 노동의 위상을 참조한다고 하더라도, 아마도 그들은 생산물로서의 순수예술 자체가 필요 없다고 여길지 모른다. 이미 그들의 삶 자체가 예술의 연장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비참한 예술가들의 삶 만큼이나 비루해진 순수예술에 대한 알리바이로서, 세상 사람들이 예술에 대해 무지하다는 식의 익숙한 이야기를 가지고 합리화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뼈아픈 일이다.

어쨌거나 항상 이야기의 중심을 돌고 있는 화두는 예술가들의 비참한 삶이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만 눈길을 돌려보면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예술계의 자리 또한 보게 된다. 블루칩 작가 운운, 억대를 호가한다는 식의 수사를 심심치 않게 동원하곤 하는 그곳은 비참함과는 전혀 거리가 먼 듯 보이며 오히려 호화스럽기까지만 하다. 그리고 이 완전히 상반되어 보이는 예술계의 두 모습이 사실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많은 작가가 어째서 그토록 비참한 삶으로 이어지는 고된 예술 생산 과정을 감내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을 예술가로서의 성장 과정 안에서 더 나은 예술계의 자리로 진입하기 위한 마땅한 절차로 본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려준다. 아마도 이것은 예술과 노동이 통합된 세계에서 나타난 최상의 결과물들 중의 또 다른 하나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예술이 갖는 세계에 대한 간극에 되레 내기를 걸고 싶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예술이 노동임을 거부하는 것은 주어진 비참한 현실을 기만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참한 현실과 더불어 그러한 비참함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들과의 사슬 모두를 끊어내고 싶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준형
시각예술을 기반으로 이미지의 정치성에 대한 비판적 분석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최근에는 게임 매체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아티스트 폴리티컬 파티 '배드 뉴 데이즈'와 마르크스주의 연구 기관 '조사'에서 활동하고 있다.

 


1) 미술 비평가 홍태림은 수많은 비평가 및 작가들이 참여한 지난 예술노동 논쟁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며 쓴 글 〈예술노동 뒤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에서 당시 경합했던 입장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정리했다. “예술은 노동이 아니다.”, ”예술과 노동의 가치는 같다.“, ”노동은 예술을 가능케 하는 최소한의 필요조건”. 크리틱칼, 2016. http://www.critic-al.org/?p=4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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